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44 - 망국의 진실

從心所欲 2020. 4. 20. 17:54

[정조의 능인 건릉 입구 숲길]

 

정조가 죽고 11세의 어린 나이의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정국은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가 중심이 된 벽파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 벽파는 천주교를 아버지와 임금을 부정하는 패륜의 사학(邪學)이라 규정하여 순조 1년에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다. 명분은 사학 퇴출이지만 시파에서도 특히 남인들에 천주교도가 많았기 때문에 실상은 남인 시파 세력을 꺾기 위한 노론벽파의 정치 공세인 동시에 정조의 탕평을 보좌했던 인물들에 대한 보복이기도 했다. 벽파는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했지만 그들의 권세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기간으로 끝이었다.

 

정조는 1800년에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일 뜻을 굳힌 상태였었다. 하지만 그 해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미루어졌다. 이틈에 정순왕후의 친척 오빠인 김관주는 이 혼사를 막기 위한 방해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 같은 김씨라도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였고 김조순은 안동 김씨로 본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김조순은 시파쪽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순조 2년인 1802년에 김조순의 딸은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순원왕후(純元王后)다. 김조순은 경종 때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했다가 소론으로부터 사흉(四凶)으로 지목 받았던 노론 4대신 중 하나인 김창집의 4대손이다. 1804년 정순왕후가 물러나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그동안 정권을 주도했던 정순왕후 주변의 척신들은 점차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반면 김조순을 포함한 안동김씨 가문은 점차 권력을 키워 가다가 1809년의 대기근과 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순조의 국정 장악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다.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정치는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대리청정 때 잠시 제지를 받기도 하였지만 효명세자가 이른 나이에 사망함으로써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김조순이 죽은 뒤에도 그 아들 김유근(金逌根)이 권력을 계승하여 1834년에 순조가 사망할 때까지 안동 김씨의 세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순조는 죽기 전, 효명세자의 장인인 풍양 조씨 조만영(趙萬永) 가문의 조인영(趙寅永)에게 헌종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헌종이 즉위한 뒤 대비 순원왕후가 수렴 청정한 1840년까지는 대왕대비의 친정인 안동 김씨 가문과 헌종의 외가인 풍양 조씨 가문의 인물들이 서로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하였다. 헌종의 친정 기간에는 풍양 조씨가 우위에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헌종이 죽은 뒤에는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강화도에서 농부로 살던 왕족을 데려다 허수아비 왕을 세움으로써 다시 안동 김씨 일가가 권력을 되찾았다. 이때의 안동 김씨는 앞 시기보다도 훨씬 커다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실제로 조선은 이때부터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정국가에서 허수아비 왕을 세운다는 것은 이미 왕조로서의 운명이 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까지 세울 수 있는 독점적 절대 권력은 결국 부패할 수밖에 없고 안동 김씨는 그 길을 갔다. 그리고 그 끝은 조선의 패망이었다.

 

[건릉]

 

이상이 대강 살펴본 조선 당쟁의 역사다. 혹자는 어지간히도 싸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500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짧게 잡아도 250년이다. 그런 긴 세월 속에 오히려 이 정도의 정치적 갈등이 없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또 혹자는 너무 쓸모없는 논쟁만 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대의 논쟁은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의 눈에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논쟁이 그 시대의 가치관에서는 목숨보다 중대한 사안이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당쟁에 뛰어들었던 그들의 행적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로 다툰 그 쓸데없어 보이는 예송논쟁이 그 시대에는 왕조의 법통을 이어가는 중대사였다. 누군가는 논쟁의 중심에 민생이 빠졌다는 지적을 할 수도 있다. 조선은 왕정 국가다. 역시나 현재의 국가개념으로 그때를 봐서는 안 된다. 그 시대 민생에 관심을 가졌던 국가가 세계 어딘들 있었는가? 거의 모든 국가들이 왕권이나 정치적 특권을 독점한 소수 지배계급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던 시대였다.

 

우리는 휘그(Whig)와 토리(Tory)를 영국 정당의 시초라고 배우면서도 애써 우리 당쟁의 역사는 부끄럽게 여긴다. 종교 문제로 왕위계승권을 놓고 의견 대립으로 시작된 저들의 파벌이 우리 선조들이 벌였던 당쟁의 내용이나 역사보다 뭐가 더 훌륭한가? 우리 선조들은 서로 싸우는 중에도 왕권에 대한 견제를 놓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 조선에 폭군이 없었던 사실을 결코 우연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쟁이 조선말까지 계속되었다면 매국노 몇 명이 작당해서 그렇게 쉽게 나라 말아먹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망하더라도 더 어렵게 망했을 것이다.

 

동해에서 서울로 활어를 운송할 때 탱크 안에 가물치를 넣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잡아먹으려고 쫓아다니는 가물치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물고기들이 훨씬 더 많이 싱싱하게 살아서 서울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확인해보지 못해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개념적으로는 공감이 간다. 결과로만 본다면 당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왜란과 호란을 이겨내고 나라를 지켰지만 세도정치 100년 만에 나라가 망했으니 말이다. 60년 넘게 자민당이 독점해온 일본 정치의 결과가 보여주는 오늘의 현실과 그 예견되는 앞날을 보더라도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는 말이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일풍경> Canton Woodvil의 일러스트, 런던뉴스]

 

당쟁 때문이 아니라면 조선은 왜 망했을까? 현학적으로 두루뭉술하게 말한다면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들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가지 때문에 망했다고 하는 것은 자칫 논리의 비약이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조선은 망할 때가 돼서 망한 것이다. 조선은 500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축적된 문제들로 노쇠해져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어 망한 것이다. 단지 조선만의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나라가 그랬다. 이 세상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는가? 사람이 노쇠하면 죽듯 나라도 노쇠하면 망하게 마련이다. 건강상태에 따라 사람의 수명이 다르듯 나라도 국가 기반에 따라 그 존속 기간도 다르다. 100세 노인이 사망했을 때 의사가 직접적 사인을 심근경색으로 적었다 해서 심근경색이 사망의 유일한 원인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이 왜 망했는가를 묻기 보다는 왜 그때 망했는가를 묻는 것이 더 합리적일 듯 싶다. 개인적으로는 청나라가 망해서라고 생각한다. 조선은 내내 군사력을 중국에 의존했던 나라였다. 만일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승리했다면 적어도 그때, 조선이 일본에 의해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을 지켜줄 청나라는 패했고, 더 이상 조선을 지켜줄 나라가 없어져 버렸는데 조선은 자신을 지킬 아무런 힘이 없었다.

 

조선을 건국할 때 혹시라도 무력으로 위협이 될 수 있던 유일한 나라는 중국뿐이었다. 그러나 인구, 재정, 규모 등 모든 것을 따졌을 때 조선이 중국에 무력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시작부터 중국에 대하여 사대(事大)를 외교의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덜 위협적인 여진과 왜의 무력 도발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대응했지만 이들에 대한 정책도 근본은 교린(交隣)이었다. 조선은 중국과의 관계만 원만하다면 굳이 군사력을 확대할 이유도 없었고 실제로도 조선은 사대부에 의한 유교적 문치국가를 표방하며 군사력은 등한시했다. 임진왜란 때처럼 혹 군사력이 필요하면 중국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조선말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압력이 심해질 때도 조선은 청나라를 믿었다. 청나라가 그렇게 맥없이 일본에게 패할 줄은 조선의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자주국방을 얘기한다. 하지만 핵을 가진 중국이나 러시아에 대하여 재래식 무기체제로 자주국방을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우리도 비슷한 대응력을 가져야 저들이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텐데 우리의 우방이라는 미국이 오히려 그걸 막고 있다. 우리의 안보를 자신들에게 맡기라면서도 저들은 “America first!"를 내걸고 우리에게 불이익을 강요하고 있다. 일본이 언제 일본할지 모르니 우리가 경계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것마저도 저들은 일본 편에 가깝다. 그런데도 성조기를 흔들며 대로를 누비는 무리들이 여전하다. 우리가 언제까지 미국의 시혜국으로 살아야 하는가? 우리도 같이 “America first!"를 외쳐야 한다는 말인가!

 

반미, 친미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도 주권국가로서 나라의 이익을 최우선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이 작은 나라는 그 당연한 일마저도 조심스러워해야 한다. 함부로 감정에 쓸려 다닐 일이 아니다. 이 살얼음판에서 우리의 국익을 지키는 일에는 정부나 국민이나 모두 지혜로워야 한다.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일제가 조선을 찬탈했을 당시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조선인의 편에 서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조선인은 자신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조선인이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데도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