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45 - 붕당론

從心所欲 2020. 5. 11. 06:48

구양수(歐陽修)는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ㆍ시인ㆍ문학자ㆍ역사학자이다. 1007년에 출생하여 66년 동안 정치적, 문학적으로 활발한 삶을 살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송나라 인종(仁宗) 때인 1036년, 곽황후(郭皇后)의 폐립을 주장하던 재상 여이간(呂夷簡)은 이를 반대하는 범중엄(范仲淹)을 무고하여 귀양을 가게 만들었다. 이에 범중엄과 더불어 신진 관료파에 속했던 구양수는 간관(諫官)으로서 범중엄을 변호하는 간언을 하다가 역시 여이간에 의하여 이능(夷陵, 현 후베이 성)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1043년에 인종이 다시 범중엄 등을 중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자 정적들이 붕당(朋黨)으로 몰면서 공격하였는데 이에 구양수가 붕당에 대한 적극적인 논리를 전개한 것이 붕당론(朋黨論)이다.

 

[구양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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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 분당론>

 

신이 듣기에 붕당(朋黨)이라는 말은 예로부터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직 임금(人君)께서는 군자와 소인(小人)을 분별한다면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무릇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의(道義)를 함께 함으로써 붕(朋)을 이루며,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이익이 같아서 붕(朋)을 결성하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래서 신은 소인(小人)에게는 붕이 없고, 오직 군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오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소인이 좋아하는 것은 이익과 녹봉이고 탐내는 것은 재화인 때문입니다. 그 이익을 같이 할 때는 잠시 서로 끌어들여 당(黨)을 만들고 붕(朋)이라 하지만 이는 거짓입니다. 그 이익을 보고 앞을 다툼에 이르러서는, 혹 이익이 다하면 서로 사귐이 멀어지고, 심한 자는 오히려 서로 해치려 하니, 비록 그 형제 친척이라도 능히 서로 보호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은 소인에게는 붕이 없고, 그들이 잠시 붕을 만드는 것은 거짓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군자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지키는 바가 도의(道義)며, 행하는 것이 충성과 신의이며, 아끼는 것은 명예와 절개입니다. 이것으로 자신을 닦으면 도를 함께 하여 서로에게 이롭고, 이로써 나라의 일을 하면 한마음으로 함께 다스려 처음과 끝이 한결 같습니다. 이것이 군자의 붕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된 사람은 마땅히 소인의 거짓된 붕을 물리치고 군자의 참된 붕을 중용하면 곧 천하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요(堯)임금 시절에 소인배인 공공(共工)⋅환두(驩兜) 등 네 명이 하나의 붕을 만들고, 군자인 팔원(八元)⋅팔개(八愷) 등 열여섯 명이 하나의 붕을 만들었는데, 순(舜)이 요임금을 보좌하여 네 사람의 흉악한 소인의 무리를 물리치고 팔원⋅팔개 등 군자의 붕을 나아가게 하였으니 요의 천하가 잘 다스려졌습니다. 순(舜)이 스스로 천자가 됨에 이르러서는 고요(皐陶), 기(夔), 후직(稷), 설(契) 등 22인이 조정에 나란히 늘어서서 서로의 아름다움을 일컬으며 밀어주고 양보하여, 무릇 스물두 명이 하나의 붕이 되었습니다. 순임금은 그들을 모두 등용하여 천하을 또한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신하가 억만 명이 있었으되, 오직 억만 가지의 마음이 있었으나, 주(周)나라의 신하는 삼천 명이었지만, 마음은 오직 하나였다.”고 하였습니다. 주왕(紂王) 시절에는 억만 사람의 마음이 각각 달라 가히 붕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주(紂)왕이 이 때문에 나라를 잃었습니다. 주(周)나라 무왕의 신하 삼천 명은 하나의 큰 붕을 이루고, 주(周)나라가 그들을 등용하여 흥하게 되었습니다.

 

후한 헌제(獻帝) 때에 천하의 명사들을 다 모아 잡아들여 구금시키고는 당인(黨人)이라 지목하였습니다.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한(漢)나라 황실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비로소 후회하고 깨달아 모두 풀어서 당인들을 석방하였으나 이미 구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나라 말년에 이르러 붕당의 논의가 점점 일어났는데, 소종(昭宗) 때에 이르러 조정의 명사를 다 죽여서 간혹 그들을 황하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청류(淸流)이니 탁류(濁流)에 던질만하다”고 하더니, 이에 당나라가 마침내 망하였습니다.

 

대저 앞 시대의 군주 중에 능히 사람마다 마음을 다르게 해서 붕을 하지 못하게 함은 은나라 주(紂)왕 같은 이가 없었고, 선인(善人)이 붕을 만드는 것을 금한 것은 후한의 헌제(獻帝)만한 이가 없을 것이며, 청류(清流)의 붕을 베어 죽인 것은 당나라 소종(昭宗)의 시대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개 그 나라를 혼란시키고 멸망하였습니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일컬어 밀어주고 양보하여 스스로 의심하지 않음은 순임금의 스물두 명 만한 이가 없었고, 순임금 또한 의심하지 않고 모두 등용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순임금이 스물두 명의 붕당에게 속았다고 책망하지 않았고, 또 순임금을 총명한 성군이라고 칭하는 것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나라 무왕의 시대에는 그 나라의 신하 삼천 명이 모두 하나의 붕을 만들었습니다. 예로부터 붕을 이루는데 있어 많고 또한 큰 것은 주(周)나라만한 나라가 없었지만, 주나라가 오히려 이 때문에 흥한 것은 선인(善人)이 비록 많더라도 물리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저 임금이 된 자는 흥하고 망하고 다스림과 혼란의 자취를 마땅히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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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는 자신의 주장을 더 강력하게 보이기 위하여 요순임금 시대까지 끌어들였지만 중국에서 당쟁의 역사는 당나라 말의 ‘우이당쟁(牛李黨爭)’이 당쟁의 대명사처럼 인용되고 있다. 우승유(牛僧孺), 이종민 등을 영수로 하는 ‘우당(牛黨)’과 이덕유(李德裕)를 영수로 하는 ‘이당(李黨)’ 사이에 약 40여 년간 대외정책, 개혁정책, 불교우대 등의 문제를 놓고 상호 충돌했던 당쟁이다. 이 당쟁이 이렇게 오래 지속된 데에는 황제들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당쟁을 이용한 측면도 적지 않았다. 우이당쟁을 겪으면서 당나라 조정은 붕당을 제압하거나 조정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국력이 쇠퇴하다 결국 서서히 무너져 갔다. 당나라 말에 절도사 주전충(朱全忠)은 절개의 상징이던 청류파 선비들을 붕당을 지었다는 죄목을 덧씌워 학살하였다. 이후 중국에서 붕당은 관료들에게 일종의 금기가 되었다.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붕당을 이루게 되었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붕당을 이뤘다는 자체만으로도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구양수의 붕당론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의 주장은 소인들의 붕은 거짓 붕당인 위붕(僞朋)이며, 군자들의 붕이 참된 붕당인 진붕(眞朋)이라는 ‘진붕위붕설’로 축약되었다.

 

후세에 조선의 선비들에게 법(法)과 같은 존재인 주자(朱子) 역시 붕당에 대하여 긍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구양수와는 조금 달랐다.

주자는 우선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붕당을 싫어하게 마련이라는 전제를 깔았다. 그러면서도 북송이 구법당을 몰아내고 신법당이 전횡하면서 망국(亡國)을 초래했다는 사례를 들며 ‘붕당은 조정 신하 사이의 서로 다툼에 그칠 뿐이지만 그것을 미워하여 없애고자 한다면 나라마저 망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고 주장하였다. 주자는 붕당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군자를 정치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필요한 정치형태로 보았다. 그래서 붕당이 있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군자의 당이 있다면 정승도 군주와 함께 그 당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조선에서는 16세기 초에 사림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자, 기득권인 훈구세력은 사림(士林)의 정치 활동을 붕당이라고 공격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붕당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훈구파가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붕당관으로 사림의 결집을 불충(不忠)으로 몰아 탄압의 구실을 삼은 반면, 사림들은 훈신·척신들을 ‘소인의 당’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계의 우세가 확실해진 뒤부터는 구양수나 주자의 붕당론이 정설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인조정란 이후에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는 체제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붕당의 존재를 죄악시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17세기에 들어서면서는 구양수와 주자의 주장을 넘어서 군자당에도 소인이 있을 수 있고, 소인당에도 군자가 있을 수 있다는 인식으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같은 붕당 내에서도 군자소인의 분별이 엄정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각 당파의 의리를 굳게 옹호하는 강경파가 존재하는 가운데도 탕평책을 수용하는 온건파가 서로 병존하는 양상으로 붕당은 18세기말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 ‘당쟁’에 대해서는 이미 19세기 중반에 이건창(李健昌)이 『당의통략 黨議通略』을 통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정리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적인 비판 작업은 오히려 나중에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침탈해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크게 악용, 왜곡되었다. 일본 어용학자 및 언론인들은 『당의통략』을 오히려 조선인도 이미 당쟁의 폐단을 인정한 예로 삼아 이른바 당파성론(黨派性論)을 만들어냈다. 조선인들은 정치적으로 서로 싸우기를 좋아하는 민족성을 가져 망국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들의 논점이었다. 당파성론은 다른 식민주의적 역사 해석과 함께 일제의 국권탈취를 합리화, 정당화하고 한국인에게 패배주의 의식을 심어 식민 통치를 감수하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대한제국의 학정참여관(學政參與官)이 되어 식민통치를 기획한 인물 중의 하나였던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 1870 ∼ 1953]가 1907년 발표한 「한국정쟁지(韓國政爭志)」는 그런 의도에서 쓰여진 최초의 조선시대 정치사였다.

 

이렇듯 식민주의 사관의 일환으로 일제가 창출한 당파성론은 우리에게 의외로 많은 영향을 끼쳐, 일제강점기는 물론 그 후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어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 일례로 1923년, 안확(安廓)이 「조선정치사(朝鮮政治史)」를 통하여 정쟁이란 것은 어느 역사에나 있기 마련인 것으로, 오히려 조선시대의 붕당간의 대립은 나름대로 이념 지향성을 가져 서양 근대의 정당 정치에 비견되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그 후로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당파성론의 잔재가 여전히 횡행하고 서울대 이영훈이나 연세대 유석춘 같은 막장들이 교단에 빌붙어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식민사관이 이 땅에 얼마나 깊게 뿌리박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이제라도 우리가 깨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조선정치사(朝鮮政治史)」는 안확이 원래 8권으로 계획하였던 『조선문명사』시리즈 중 유일하게 출간된 것으로 「조선문명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자산(自山) 안확(安廓, 1886∼1946)은 일본에 유학하여 니혼[日本]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하였으며 3·1운동 당시 마산 지역의 만세운동을 조직, 주도하였고 국어와 국문학, 국사를 비롯한 국학에 대한 글 140여 편을 저술,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