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138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 ~ 1555)는 형조참판과 호조참판을 역임한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문장가이자 서예가였다. 안동부사로 있던 1518년에는 퇴계 이황을 향교에서 직접 가르치기도 했었다. 이현보는 시문에 능하여 우리말 시가를 비롯하여 다수의 시조작품을 창작하였고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 시조작가로 조선시대 문학사에서 소위 강호가도(江湖歌道)로 불리는 문예활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경상도 예안현 분천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호는 농암(聾巖)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외에 설빈옹(雪靈翁)이라고도 하였다. 분강촌(汾江村)에 있던 그의 종택은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로 옮겨진 상태다. 농암종택에는 고문서류를 비롯하여 전적, 그림 등을 비롯한 여러 자료가 전하는..

우리 옛 뿌리 2022.05.02

대원군, 부원군

대원군(大院君)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고종의 아버지였던 흥선(興宣)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흥선 대원군이 너무도 유명하고 다른 대원군에 대하여 들어볼 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자칫 대원군은 이하응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조선에는 이하응 말고도 3명의 대원군이 더 있었다. 다만 그들은 모두 사후에 대원군에 봉해져 대원군으로서의 활동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특별히 거론될 일이 없었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왕위 계승은 자식이 우선순위이지만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가 그 다음 순위였다.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왕위에 오른 영조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물론 정조처럼 손자가 왕위에 오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 가운데는 자손이나 형제 같은 대를 이을 후사(後嗣) 없이 죽는 경우가..

우리 옛 뿌리 2022.04.18

재앙을 이기기 위하여 왕이 힘써야 할 10가지 - 6

9목의 여덟 번째 항목은 이다. 사치(奢侈)를 막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사치가 폐해가 됨이 심합니다. 하늘이 온갖 물건을 낳되 사람이 그것을 취하여 쓰니 사람은 온갖 물건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이 끝이 없고, 물건은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는 것인데 그 나는 것에 한정이 있습니다. 욕망은 끝이 없기에 천하의 물건으로 한 사람을 받들어도 넉넉하지 못하고, 나는 것은 한정이 있기에 한 사람이 천하의 물건을 다 써도 모자랍니다. 하늘이 낸 물건을 다 없애어 하늘이 노하고, 백성의 고혈을 짜서 백성이 원망하여, 원망을 쌓고 노여움을 쌓는데도 알지 못하면, 쟁탈이 일어나서 난망(亂亡)이 뒤따를 것입니다. 근래 왕자(王子)의 집은 극도로 넓고 크..

우리 옛 뿌리 2022.04.09

재앙을 이기기 위하여 왕이 힘써야 할 10가지 - 5

9목의 여섯 번째 항목은 이다. 교화(敎化)를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두 가지가 있는데, 형정(刑政)과 교화(敎化)뿐입니다. 형정은 밖에서 제재하는 방도이고 교화는 마음에서 느끼게 하는 방도인데, 형정으로 제재하면 백성이 면하되 염치가 없게 되고 교화하여 느끼게 하면 염치가 있고도 바루어지는 것입니다. 대저 교화하는 방도는, 그 사람의 마음에 없는 것을 굳이 행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도(常道)를 지키는 덕(德)은 각각 스스로 넉넉히 갖추었으므로, 그 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것에 말미암아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소 행하여 이끌어 주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것이 없어서 떨쳐 일어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교화가 밝지 않아서 사습(士習)이 바르..

우리 옛 뿌리 2022.04.06

재앙을 이기기 위하여 왕이 힘써야 할 10가지 - 4

9목의 네 번째 항목은 이다. 제사를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역경(易經)》 췌괘(萃卦)에 이르기를 ‘임금이 사당을 두었다.’ 하였습니다. 제사하여 보답하는 것은 인심에 근본하는 것입니다. 성인이 의례를 제정하여 덕(德)을 이룸으로써, 사람은 매우 많으나 마음이 향하여 우러르는 데를 하나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심이 향하는 데를 몰라도 성경(誠敬)을 다할 수는 있고, 귀신을 헤아릴 수는 없어도 귀신이 오게 할 수는 있습니다. 인심을 모아 합치고 중지(衆志)를 모아 거느리는 도리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지극히 큰 것으로는 종묘(宗廟)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죽은 이를 살아 있을 때처럼 섬기고 없는 이를 있는 것처럼 섬기는 것이 지극한 효성입니다. 사직(社稷)에 제사하는 것은..

우리 옛 뿌리 2022.04.03

재앙을 이기기 위하여 왕이 힘써야 할 10가지 - 3

9목의 세 번째 항목은 이다. 인재를 가려 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뭇 관원에게 달려 있으니, 관직은 사사로이 친근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오직 재능 있는 사람에게 주며, 관작은 악덕(惡德)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오직 어진 사람에게 주소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재를 가려 쓰는 것은 나라를 가진 이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본디 스스로 군자라 생각하고 소인을 소인으로 여기지만, 소인 또한 스스로 군자라 생각하고 군자를 소인으로 여기니, 각각 자기가 옳다 하여 서로 배척하면, 임금은 그 간사함과 바름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경방(京房)이 원제(元帝)에게 묻기를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은 어찌하여 위태로워졌겠습니까?’ 하..

우리 옛 뿌리 2022.04.02

재앙을 이기기 위하여 왕이 힘써야 할 10가지 - 2

이어지는 상소문에서 열거하는 9목(目)의 첫 번째는 이다. 궁금(宮禁)은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로, 우선 임금이 거하는 곳부터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궁금(宮禁)을 엄하게 해야 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집이 다스려지고서 나라가 다스려진다.’ 하였습니다. 그 집을 다스리지 못하고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으므로 왕화(王化)의 근본은 궁금에 있는 것입니다. ▶왕화(王化) : 임금의 덕화(德化). 궁금이 엄숙하지 않으면, 간사한 길이 안팎으로 통하고 바른길이 조정(朝廷)에서 막히어, 공정한 논의는 막혀서 통하지 않고 도리에 어긋난 것이 현혹을 하여 간사한 술책을 부리므로, 그때 가서는 난망(亂亡)을 구제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대개 군신(君臣)의 위아래 사이와 친척의 안팎 사이에서 정의(情..

우리 옛 뿌리 2022.03.28

재앙을 이기기 위하여 왕이 힘써야 할 10가지 - 1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은 신하들이 이복형인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反正)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왕위에 갑자기 오르게 되었다. 그가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中宗)이다. 정현왕후(貞顯王后)는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가 1479년 왕비의 자리에서 폐출된 뒤 다음 해인 1480년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8년 후에 진성대군을 낳았다. 성종에게는 연산군에 이은 둘째 아들로 진성대군과 연산군은 12살의 터울이 있었다. 자력이 아닌 신하들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왕권은 처음부터 나약할 수밖에 없었다. 중종은 왕위에 오르자 자신이 사랑했던 부인과 강제로 헤어져야만 할 정도였다. 그의 첫 번째 정비(正妃)였던 단경(端敬)왕후가 연산군 때의 권신이었던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라는 이..

우리 옛 뿌리 2022.03.26

대군, 군, 공주, 옹주

조선시대의 왕실 자녀들에 대한 호칭을 보면 대군(大君)이 있는가 하면 군(君)이 있고, 공주(公主)가 있는가 하면 옹주(翁主)도 있다. 3대 왕인 태종에게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그리고 나중에 세종이 된 충녕대군 같은 아들들과 함께 경녕군, 함녕군, 온녕군 처럼 군(君)으로 불리는 아들들도 있었다. 또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가 있었는가 하면 정신옹주, 정정옹주, 숙정옹주 등도 있었다. 이런 호칭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군은 왕자 가운데 정비(正妃)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주어지던 작호(爵號)이다. 왕비 외에 후궁들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은 군(君)이다. 공주도 마찬가지다. 왕비에게서 태어난 딸은 공주, 후궁에게서 난 딸은 옹주의 작호가 주어졌다.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과 정선공주, 경정공주, ..

우리 옛 뿌리 2022.03.18

왕의 평생학습 - 경연

왕(王)은 군주국가의 상징적 존재이자 실질적 권력자이다. 그래서 흔히 왕이라고 하면 무소불위의 존재를 연상한다. 그러나 조선의 왕 자리가 그리 녹녹치 않았음은 여러 기록을 통해 쉽게 확인이 된다. 정치적 어려움 뿐 아니라 일상의 어려움도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공부이다. 왕들은 그 만인지상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것도 혼자 알아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신하들 앞에서 학습하고 또 검증까지 받아야 했다. 이것이 경연(經筵)이다. 경연(經筵)은 ‘경전(經典)을 공부하는 자리’란 뜻이다. 경연은 이른 아침에 하는 조강(朝講)부터 낮에 하는 주강(晝講), 밤에 하는 석강(夕講), 그리고 밤중에 신하를 불러 하는 야대(夜對)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3 ~ 4살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세자가 ..

우리 옛 뿌리 2022.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