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왕의 평생학습 - 경연

從心所欲 2022. 2. 23. 14:06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 병풍 中 제5폭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 병풍 中 제6폭 <주교도(舟橋圖)>부분 ㅣ 정조의 도강행렬을 구경하기 위하여 나온 백성들] 

 

왕(王)은 군주국가의 상징적 존재이자 실질적 권력자이다. 그래서 흔히 왕이라고 하면 무소불위의 존재를 연상한다. 그러나 조선의 왕 자리가 그리 녹녹치 않았음은 여러 기록을 통해 쉽게 확인이 된다. 정치적 어려움 뿐 아니라 일상의 어려움도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공부이다. 왕들은 그 만인지상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것도 혼자 알아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신하들 앞에서 학습하고 또 검증까지 받아야 했다. 이것이 경연(經筵)이다. 경연(經筵)은 ‘경전(經典)을 공부하는 자리’란 뜻이다. 경연은 이른 아침에 하는 조강(朝講)부터 낮에 하는 주강(晝講), 밤에 하는 석강(夕講), 그리고 밤중에 신하를 불러 하는 야대(夜對)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3 ~ 4살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세자가 되면 시강원(侍講院)이라는 세자 교육전담 기구를 통한 교육까지 받은 왕이 무슨 새삼스럽게 경전 공부를 하나 하는 의문도 있겠지만 말하자면 심화교육이다. 경전 구절을 바탕으로 신하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유학에 대한 식견과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안목과 역량을 높이는 자리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공부라면 머리를 흔들며 진저리를 내는 판인데, 왕의 자리에 올라 국사를 보는 틈틈이 공부까지 해야 했으니 왕 노릇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연산군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부터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경연에 참가하지 않아 대간(臺諫)으로부터 경연에 부지런히 힘쓰라는 상소를 받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영조의 경우에는 “…나는 춘궁(春宮)에 있을 때부터 자못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춘궁에서는 오래 전부터 석강하는 법이 없었기에 내가 처음으로 열었던 것이다.…”라고 할 만큼 오히려 경연을 달가이 여겼다.

 

그런데 경연은 단순히 공부만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신하들이 국정 현안을 제기하고 왕권의 행사를 견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왕의 입장에서는 공부도 해야 하고 잔소리를 듣는 자리이기도 했다.

아래는 중종 때의 어는 경연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이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대사간 정대년(鄭大年)이 아뢰기를,
"국가에 태평한 날이 오래 계속되어 모든 일이 해이해졌는데, 문무(文武)의 일이 더욱 해이해졌으므로, 상께서 정시(庭試)를 보이고 시사(試射)를 열어 인재를 격려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며, 또한 조종조에서도 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방의 백성들 중에 굶어 죽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는데도 국가는 그 숫자를 알지 못하며, 비단 지방만이 아니라 서울에서 굶어 죽는 자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인데, 이러한 때 따로 규칙을 정하여 회시(會試)와 복시를 보이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미편(未便)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재를 권장하고 격려하는 일은 일반 규정으로는 할 수 없으므로 많은 규정을 정하여 인재를 고무하려고 했던 것이 나의 처음 계획이었다. 그러나 여러 날을 번거롭게 아뢰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중종이 과거시험을 치르도록 지시하였는데 신하들이 여러 차례 반대의견을 내놓았고, 그런데도 중종이 지시를 철회하지 않자 대사간이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어죽어 나가고 있는 때에 과거시험을 치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다시 거론하면서 중종은 결국 자신의 지시를 거두고 만 상황이다. 이 기사만 보면 얼핏 중종이 철없는 지시를 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당시 조정은 나라에서 쓸 만한 인재가 부족하여 고심하고 있던 상황이다. 특히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수령들의 자질 부족 문제로 중종은 여러 차례 대신들과 의견을 나누며 과거시험 외에도 천거를 통하여 인재를 발굴하여 쓰는 방법까지 논의하던 때다. 그래서 아마도 중종은 인재 발굴의 필요성 때문에 과거를 고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은 전해에 이미 흉년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고 실행하기 위하여 구황 경차관(救荒敬差官)을 파견하였고 춘궁기인 3 ~ 4월에 힘써 구황하라는 전교를 내린 바 있다. 국정은 종합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인재를 발굴하는 과거 시험을 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분론으로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국정운영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합리적인 발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중종은 신하들의 등쌀에 자신의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황 경차관(救荒敬差官) : 중앙 조정에서 흉년에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일로 지방에 파견하는 임시 관원.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헌부의 정4품인 장령(掌令)이 왕을 힐난하고 나선다.

장령 김로(金魯)가 아뢰기를,
"상께서 권려(勸勵)에 유념하시어 조그만 폐단은 헤아리지 않으시므로 사중(司中)이 즉시 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서울 부근 사람들이 별거(別擧)가 있다고 생각하여 양식을 싸들고 모여들어, 그 폐가 작지 않다고 합니다. 애초에 뜻하지 않게 우연히 한 번 시행하는 것은 괜찮지만, 흉년에 여러 날 시험을 보여서 무사들이 양식을 싸들고 모여들게 하는 것은 매우 마땅치 못합니다. 또 근고에 없던 천재지변으로 노약자들은 신음하면서 이리저리 뒹굴다가 구렁에서 죽어갑니다. 한 지아비가 설 자리를 잃더라도 천지가 편치 않은 법인데, 하물며 굶주린 백성들이 길바닥에 즐비하니 천재 재변이 있는 것이 어찌 이상한 것이겠습니까.
후한(後漢) 때 양사(楊賜)가 말하기를 ‘왕이 마음에 품은 것이 있고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비록 얼굴에 나타내지 않더라도 다섯별이 그 때문에 자리를 옮긴다.’고 했습니다. 왕의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별자리의 모양이 하늘에서 변동함이 이와 같으므로 선유(先儒)들이 재변에 대해서 어떤 일의 응보로 일어난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근래에 태백이 주현하고 지진이 잇달아 일어나니 상께서 두려운 마음으로 몸을 닦고 살피시며, 미세한 일까지도 생각하고 두려워하며 공경한 뒤에야 비로소 천재지변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권려(勸勵) : 권하고 격려함.
▶사중(司中) : 관아. 공무를 집행하는 곳.
▶별거(別擧) : 3년마다 치르는 식년시(式年試) 이외에 특별히 치르는 과거.

 

장령 김로가 하는 말은 경연이 있기 4달 전쯤인 전년 11월에 치러진 무과(武科) 과거 때의 일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나 흉년과 과거시험을 연결하여 고사까지 들먹이며 왕의 마음이 올바르지 못해 흉년과 같은 천재지변이 생겼다고 비난하고 있다. 지금 평범한 사람끼리라도 상대방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비난해 오면 화를 참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지만 중종은 이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경연은 왕이 학식을 얻는 자리가 아니라 인격수양을 하는 자리라 불러야 맞을 것 같다.

이어서 특진관(特進官)이 또 다른 문제로 왕을 공격한다. 특진관(特進官)은 경연에 참석하여 왕의 고문에 응하던 관직으로, 2품 이상의 관리 가운데 의정부나 육조(六曹), 한성부의 관직을 역임한 사람가운데 선발되었다.

 

특진관 상진(尙震)이 아뢰기를,
"상께서 지성으로 사대하시는 까닭에 부경(赴京)하는 행차가 잇달므로 일로(一路)가 받는 폐단이 다른 도보다 갑절이나 됩니다. 성절사와 동지사의 연례 행차에는 타는 말과 짐 싣는 말과 활 잘 쏘는 수군(水軍)이 본디 정해졌고, 특별 행차의 경우는 각 관아의 인리(人吏)와  일수(日守)를 정하여 보냅니다. 비록 넉넉한 고을과 빈약한 고을을 구분하여 호송을 정한다지만 그 차례가 자주 돌아오며 먼 고을에서는 여러 날 만에 의주(義州)에 이르게 됩니다. 말의 파리하고 살진 것을 점검하여 파리한 말은 퇴짜를 맞게 되는데, 그 말 주인은 말을 팔아 의주(義州) 사람의 말을 얻어서 요동에 갔다 온 뒤에는 다시 그 말은 주인에게 돌려주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게 됩니다. 한 몸의 고달픔도 헤아릴 수 없으나 양식을 싸가지고 가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습니다. 전에 호송군(護送軍)이 가지고 갔다가 남은 쌀로 모자와 가죽신을 무역해 온 일이 있었는데, 도사(都事)는 몰래 은냥을 싸갖고 가서 무역하였다고 생각하고 일제히 수색하여 잡아들였으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송군들은 만약 수색하지 않으면 의주 사람이 몰래 은냥을 부친다고 하기에 도사를 시켜서 수색하여 잡으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물건은 잡지 말라고 전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부경(赴京) : 여기서 경(京)은 중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말로, 부경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일을 뜻한다.
▶호송군(護送軍) : 중국에 왕래하는 사신을 요동(遼東)까지 호송하는 군대, 조선에서는 의주 만호(義州萬戶)가 통솔하였다. 요동에서부터는 중국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하였다.

 

당시 한성부 판윤이었던 상진(尙震)은 중종이 중국 섬기기를 극진히 하느라 중국에 사신을 자주 보내는 까닭에 사신을 호송하는 호송군(護送軍)의 잦은 징발로 평안도의 피해가 극심하다는 점을 거론하였다. 한성부 판윤으로 제수되기 전 평안도감사로 있었기 때문에 현직에서 겪었던 고충을 토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놓아두고 말단의 문제만 늘어놓은 까닭에 중종의 답변도 지엽적인 것으로 끝났다. 이래서야 무슨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경연에 참석한 신하들의 문제 제기는 계속된다.

 

김로(金魯)가 아뢰기를,
"신래(新來)의 폐단은 철저히 없애야 합니다. 사대부가 처음 벼슬길에 나설 적부터 모름지기 행실을 닦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폐단이 도리어 이와 같아서 가산을 탕진하며 심지어 남에게 빚을 얻어 쓰기까지 하니 이는 결코 청렴하기를 기르는 방도가 아닙니다. 인심이 탐오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난 겨울에 아뢴 바와 같이 큰 부호나 상인의 데릴사위가 되어 종신토록 빚쟁이 몸이 되면 중인(中人) 이상은 처음 먹은 마음을 변할 리 없겠지만 중인 이하는 변하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전례(前例)에, 예문관이 선생(先生)을 위하여 신래가 잔치를 주선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근래에 승문원이 이를 본받아 권지(權知) 30여 원이 제각기 잔치를 요구하니, 한미했던 선비가 첫 벼슬을 하였는데 무슨 수로 이를 마련해 내겠습니까. 풍속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풍속이 없어진다면 선비들의 버릇이 청렴하고 깨끗해질 것입니다.
즉위하신 초에, 흉년이 든 해에는 유가(遊街)를 금했으므로, 문·무과에 등과한 선비들이 머리에 꽃을 꽂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대궐 문을 나서면 꽃은 뽑아버리고 갓만 쓰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염치의 도가 없어져서 국가가 유가를 하지 말라고 명하는데도 대낮에 거리를 돌면서 조금도 부끄러운 빛이 없습니다. 비단 문·무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이 어린 생원·진사과의 연소한 자들까지 이를 본받아 하고 있습니다. 이다음부터는 3일 동안 유가하는 외에 신래란 명칭을 모조리 제거한다면 그 폐단을 없앨 수 있습니다."
하고,
▶신래(新來) : 과거에 새로 급제하여 처음 관직에 나온 사람을 선배가 가리켜 이르는 말.
▶선생(先生) : 선배 관원.
▶유가(遊街) : 과거급제자들이 시가를 행진하는 풍습.

참찬관 김광준(金光準)이 아뢰기를,
"유향소(留鄕所)와 경재소(京在所)를 설치하는 것은 본시 고질화된 폐습을 금지하고 마을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서인 것으로, 그 임무가 오륜(五倫)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인심이 옛날과 같지 않아서 사대부가 처음 벼슬길에 오를 적부터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이 있는데, 하물며 유향소가 무슨 수로 청렴하고 개결한 선비를 가려내서 하겠습니까. 대부분이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조그만 고을마다 유향소와 향사당(鄕射堂)을 두고 있어 그 폐해가 심합니다.
대저 의식이 넉넉해야만 예의를 차리는 법입니다. 각 고을의 아전들은 항상 고역을 치르면서도 월봉이 없는데, 관원들에게 무례하다거나 범람(泛濫)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므로 속전(贖錢)을 지나치게 징수하게 됩니다. 수령이 간혹 유향소를 시켜 관창(官倉)의 물품을 출납하게 할 경우 유향소는 수령의 귀와 눈만 위할 뿐 조금도 부끄러움을 모르며 즐겨 권력을 농간하므로 아전이나 백성들은 그에게 미움을 당할까 두려워서 그를 수령 다음으로 대우하니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성종대왕 즉위 3년에 유향소를 혁파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비록 영구히 없애 버릴 수는 없지만 천재 재변으로 인하여 진휼하는 이때, 임시로 이를 혁파한다면 백성들은 그 실제적인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기생은 혹 변방의 장수들을 위하여 두기도 하고 혹 내연(內宴)에 쓰이기도 하므로 지방에서 세공(歲貢)으로 보내옵니다. 백성들이 극도로 굶주리는 이때, 울긋불긋 고운 옷을 입고 손님 앞에서 찬시중을 하는 것을 백성들이 본다면 틀림없이 ‘조정은 우리들이 굶주려 죽을 지경인 줄도 알지 못하고 저렇듯 호화롭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도 혁파한다면 백성들은 조정의 염려하는 뜻을 알아 줄 것입니다.
▶참찬관(參贊官) : 경연에 참여하는 정3품 당상관직.
▶유향소(留鄕所) : 지방 풍속의 조정과 향리의 규찰을 담당하며 군현(郡縣)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
▶경재소(京在所) : 지방의 유향소를 관리 감독하기 위하여 설치한 중앙기구.

각 고을의 관비(官婢)들은 손님 대접에 바빠서 겨를이 없습니다. 이는 관비의 수는 제한되어 있는데, 기생들은 오직 잔치 놀이와 풍악 익히기만을 일삼으며, 관비의 나머지 수효가 많지 않아서 서로 교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임시로 기생을 혁파한다면 관비들은 아마도 번(番)을 쉬고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대신(大臣)과 의논하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이번에는 왕에 대한 직접적인 성토다.

 

검토관(檢討官) 민전(閔荃)이 아뢰기를,
"요즈음 상체(上體)가 미령하여 경연에 나아가지 못한 지가 이미 여러 달입니다.  요(堯)·순(舜)은 백년토록 마음을 졸이어 지극히 다스려진 세상인데도 학문과 덕행을 갈고 닦기를 게을리 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조종조 또한 하루 세 차례 경연에 나아가고도 밤에는 야대(夜對)를 하며 상참(常參)과 조참(朝參)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아랫사람을 자주 접하면 상하의 정의(情義)가 서로 통하여 아뢰고 싶은 말이 있으면 위에 주달하기 마련이며, 임금도 또한 날마다 사류(士類)들을 친하시면 그 얼굴과 행동에서 사(邪)와 정(正)을 알 것입니다."
하니,
▶사류(士類) : 원래의 뜻은 학문(學問)을 연구(硏究)하고 덕을 닦는 선비의 무리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조정 신료(臣僚)들을 지칭.

 

중종은 그 당시 감기를 앓고 있었다. 50을 넘어 당시로서는 이미 고령이었다. 중종이 꾀병을 부린 것도 아닌데 경연청에 속한 정6품 관직의 젊은 검토관(檢討官)의 이런 지적에 중종은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 그래도 중종은 이렇게 답했다.

 

상이 일렀다.
"요즈음 마침 편치 못하여 오랫동안 시사(視事)하지 못하였다. 지난번 정시(庭試)에는 친림(親臨)하려 하였는데 대신들이 만류하여 하지 않은 것이다. 평소에 어진 사대부를 접하는 것은 마땅히 말한 바와 같이 하겠다." [《중종실록》 중종 37년(1542년) 3월 15일 기사]

 

이 기사는 중종 재위 초반의 기사가 아니라 재위 37년째가 되는 해의 기사다. 중종의 나이 55세 때이다. 왕위에 오른지 37년 된 왕에게 경연에 나오지 않았다고 면박을 주고 있다. 이런 시달림이라면 기가 약한 왕은 경연 때문에라도 제 명을 다하기 어려웠을 듯싶다.

경연에서 왕을 이렇게 닦달한 신하들은 모두 평소에 왕만큼 학업에 정진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