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재앙을 이기기 위하여 왕이 힘써야 할 10가지 - 1

從心所欲 2022. 3. 26. 08:36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은 신하들이 이복형인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反正)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왕위에 갑자기 오르게 되었다. 그가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中宗)이다. 정현왕후(貞顯王后)는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가 1479년 왕비의 자리에서 폐출된 뒤 다음 해인 1480년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8년 후에 진성대군을 낳았다. 성종에게는 연산군에 이은 둘째 아들로 진성대군과 연산군은 12살의 터울이 있었다.

 

자력이 아닌 신하들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왕권은 처음부터 나약할 수밖에 없었다. 중종은 왕위에 오르자 자신이 사랑했던 부인과 강제로 헤어져야만 할 정도였다. 그의 첫 번째 정비(正妃)였던 단경(端敬)왕후가 연산군 때의 권신이었던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라는 이유로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이 폐위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공신들은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자신들의 공로를 은근히 과시하면서 왕을 대신하여 정국을 주도했고, 한편으로는 다시는 연산군과 같은 폭군이 나오지 않도록 왕을 견제하였다.

 

이런 훈신(勳臣)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그들을 견제고자 한 중종의 노력이 조광조를 필두로 하는 사림(士林)의 기용이었다.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기는 했지만 이내 중종 자신이 사림이 주장하는 철인 군주정치에 염증을 느끼면서 기묘사화로 사림을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조정은 심정을 필두로 한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는 가운데 척신세력과 훈구파의 세력다툼으로 정치적인 혼란은 계속되고 각종 옥사 등이 이어졌다. 정국 불안은 국방정책의 혼란으로 이어져 북쪽 국경지대에서는 야인(野人)들의 침탈이 잦아지고 남쪽에서는 왜인들이 삼포왜란(三浦倭亂)을 비롯한 수차례의 왜변(倭變)이 일어났다.

 

이러한 내우외환 속에서도 중종은 오랜 기간 왕위에 머물렀다. 그런데 재위 35년째가 되는 1540년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라에 심한 가뭄이 들었다. 《중종실록》에는 5월부터 세자를 시작으로 영의정과 백관(百官)들이 연이어 기우제를 올렸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럼에도 비가 안 오자 급기야는 중종이 직접 사직단(社稷壇)과 종묘에 나아가 기우제를 올렸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 1540년의 흉년에 이어 다음 해 봄에도 비가 오지 않았다.

중종은 다시 또 종묘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성 밖의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을 찾아 비를 빌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릴리언 메이 밀러(Lilian May Miller) <Autumn Evening(가을 저녁)>]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홍문관에서는 중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의 제목은 ‘재앙을 이기기 위해 힘써야 할 열 가지 일’이다. 후세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라는 이름이 붙여진 상소문이다.

홍문관(弘文館)은 궁중의 서적과 문서 처리를 담당하는 관청이지만 왕의 자문기관이기도 했다. 연산군 때의 여러 가지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해 중종은 홍문관의 역할을 강화시켰는데, 그 홍문관의 정3품부터 종6품까지의 소위 옥당(玉堂)으로 불리는 관리들이 나서 재앙을 이겨내기 위해 왕이 해야 될 일 10가지를 상소하였다. 이 상소문의 맨 앞에 이름을 올린 소두(疏頭)는 이언적(李彦迪)이었다. 중종 36년인 1541년 4월 2일의 일이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언적(李彦迪) 등 【직제학 이준경(李浚慶), 응교 유진동(柳辰仝), 부응교 송세형(宋世珩), 교리 권철(權轍)과 이황(李滉), 부교리 김반천(金半千), 부수찬 이홍남(李洪男), 박사 박공량(朴公亮), 저작 민기(閔箕), 정자 홍담(洪曇).】 이 상소하기를,

"생각하건대, 하늘과 사람 사이에는 한 가지 원리가 관통하므로 위와 아래에 간격이 없어서 하늘에는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하늘에 응답하는 실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성을 쌓아서 하늘을 감동시키고 덕을 닦아서 재앙을 이긴다면, 하늘은 비록 감동시키기 어려운 것이나 이렇게 하여 감동시킬 수 있고, 재앙은 비록 그치게 하기 어려운 것이나 이렇게 하여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득한 가운데에 처해 있는 몸으로서 높고 높은 위에 있는 하늘을 감동시키고, 공구수성(恐懼修省)하여 혁혁하게 진동하는 경계를 돌이키는 것은, 평범한 행동으로 한두 달 안에 그 효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구수성(恐懼修省) : 몹시 두려워하며 수양하고 반성함.

삼가 생각하건대, 주상전하께서는 어질고 거룩하신 자질로 완성된 사업을 지키시며 정신을 가다듬어 정사를 돌보시느라 날이 밝기 전에 옷을 입고 해가 진 뒤에 저녁을 드셨습니다. 이른바 하늘을 공경하는 일과 백성을 염려하는 정사에 있어 마음을 다하지 않으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치의 보람은 더욱 멀어지고 잘못된 정사는 더욱 많아져서, 아래에서 백성이 원망하되 혜택은 더욱 막히고, 위에서는 하늘이 노여워하여 재변이 거듭 나타납니다. 옛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재변이 많고도 크기가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었고 근년보다 심한 때도 없었습니다.
겨울에 천둥이 치고 땅이 흔들리며, 눈도 안 내리고 얼음도 얼지 않아,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고 봄은 겨울같이 춥습니다. 음양(陰陽)이 차서를 어기고 천기(天氣)가 어그러지자, 무더위로 가뭄이 들어 못이 마르고, 습기로 돌림병이 생겨 사람과 가축이 거의 다 병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잇달아 죽어가고 소와 양들도 죽어 쓰러지는데, 나라의 의원도 기술을 쓸 수 없고 임금의 제사에도 희생을 바칠 수 없어서, 박절한 재앙이 살갗을 깎으려 합니다.
아! 이것은 하늘이 전하를 크게 경계하여, 보호하고 안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정성을 쌓아 하늘을 감동시키고 덕을 닦아 재앙을 이기기 위해 무엇을 힘써 실천하셔야 하겠습니까?

신들이 보건대, 전하께서 재앙을 만난 뒤로, 부지런히 애써 폐정을 고치려고 대신에게 묻고, 자신을 죄책(罪責)하는 분부를 내려 지난날의 허물을 징계하시니 신들이 교서를 읽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분발하여 마지않습니다. 전하께서 요(堯)·순(舜)의 마음을 가지셨는데도, 뭇 신하가 전하를 요·순이 되실 길로 인도하지 못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요·순의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하니, 이것은 참으로 오늘날의 뭇 신하의 죄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공구수성(恐懼修省)하시는 도리와 자신을 죄책하시는 실지로 미루어 보면, 임금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신 것에도 어찌 허물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신들이 감히 전하께서 오늘날 힘쓰셔야 할 열 가지 일을 아뢰겠으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대저 열 가지 일이라 하는 것은 그 강(綱)이 하나이고 그 목(目)이 아홉인데, 참으로 한 강에 종사하여 그 도리를 다한다면, 아홉 목(目)이라 하는 것은 행동의 도구요 시행하는 방편일 뿐이니, 어찌 실행하기가 어렵다고 걱정하겠습니까.

무엇을 한 강(綱)이라 하느냐 하면,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는 것입니다. 자사자(子思子)가 이르기를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동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에 통달하는 도(道)이다.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얻고 만물이 생장한다.’ 하였습니다.
▶자사자(子思子) : 공자의 손자인 급(仍). 자사(子思)는 자.

대저 도의 큰 본원(本原)은 하늘에서 나와 마음에 갖추어지고 만사에 흩어지니, 천지를 통하여 한 가지 원리이고 만물을 통틀어 한 가지 본체(本體)입니다. 아직 발동하기 전의 지극히 고요하고 발라서 치우친 데가 없는 것이 중(中)의 체(體)이고, 이미 발동한 뒤에 절도가 어긋나지 않아서 어그러진 데가 없는 것이 화(和)의 용(用)입니다. 이룬다[致]는 것은 미루어서 그 지극한 데까지 다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때에 천리(天理)를 간직하고, 나타나지 않고 드러나지 않을 때에 인욕(人慾)을 막아 큰 근본이 서서 달도(達道)가 행하여지고, 체와 용이 부합하여 물아(物我)가 하나로 되면, 이로 말미암아 속으로 스며들어 투철해지고, 차서 넘쳐 유통하여, 자신으로부터 집으로 나라로 천하로 미쳐서, 천지가 천지의 제자리를 얻고 만물이 만물의 제자리에 안정하여 그 삶을 이루지 않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堯)와 순(舜)과 우(禹)와 탕(湯)과 문‧무(文武)가 천지와 나란히 서서 화육(化育)을 도와 이루되, 우러러보고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어, 기린이 그 수풀에서 놀고 봉황이 언덕에서 울며 요사한 재변이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문‧무(文武) : 주(周)나라의 문왕과 무왕.

대저 전하께서 명철하신데도 오늘날의 근심이 있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성학(聖學)의 공효를 다하지 못한 것이 있고 중화의 극치를 다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학이 이미 고명하시니, 다시 더 학문에 뜻을 두실 것이 없습니다.’라고 진언하는 자가 있습니다. 아!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오직 경사(經史)를 섭렵하는 공부로 전하의 학문을 도울 뿐이고, 요·순과 삼왕(三王)의 도리는 전하께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의 거룩하고 밝은 임금들은, 도(道)가 맞지 않는 때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느 때고 배우지 않은 때가 없었고, 도가 없는 사물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 가지라도 배우지 않은 것이 없어서, 반우(盤盂)에 명(銘)이 있고, 궤장(几杖)에 계(戒)가 있었으며, 설어(暬御)의 잠(箴)과 고사(瞽史)의 풍(諷) 등 마음을 간직하고 덕성(德性)을 배양하는 모든 방도에 있어서 그 지극한 것을 쓰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 몇 가지 일이 없습니다.
▶삼왕(三王) : 우왕, 탕왕과 주나라의 문·무왕.
▶반우(盤盂) : 반과 우. 반은 대야같이 물을 담아 세수나 목욕에 쓰는 그릇. 우는 사발같이 음식을 담는 그릇.
▶명(銘) : 자신을 반성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경계의 글을 금석(金石)이나 기물(器物) 등에 새겨 넣은 것.
▶궤장(几杖) : 안석과 지팡이.
▶계(戒) : 경계의 글.
▶설어(暬御) :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사랑받는 신하(臣下). 근시(近侍).
▶고사(瞽史) : 주(周)나라 때의 관명(官名)으로, 고(瞽)는 풍악을 맡고 사(史)는 음양·천문·예법(禮法) 등의 글을 맡았다.
▶풍(諷) : 풍자. 넌지시 깨우치는 글.

어진 사대부가 임금을 가까이하여 강론하고 규계(規戒)할 수 있는 것은 경연(經筵)의 몇 시간뿐이고 그 밖에는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진강(進講)하는 글도 이제(二帝)·삼왕(三王)이 주고받은 심법(心法)의 뜻과  공자(孔子)·맹자(孟子)·주자(朱子)·정자(程子)가 성현의 가르침을 전한 강학(講學)의 요체가 아니니, 경연에서 얻는 성학은 아마도 날마다 고명한 데로 나아가기에는 넉넉하지 못할 듯합니다. 이때 이외에 대궐 안에 깊이 계시어 한가히 쉬실 때에는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이 오직 환관(宦官)·궁첩(宮妾)의 무리뿐입니다. 그러므로 군자와 함께하여 감화되는 도움은 없고 하루 힘쓰고 열흘 게을리하게 될 염려만 있으니, 이러한 때에 성학의 공부하시는 방도를 신들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깊고 넓은 궁중에서 마음이 사물을 대할 때에, 심성(心性)을 간직하여 기르고 살피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데가 있어서 큰 근본이 확고하게 서지 못하여 통달하는 도리를 행하는 데에 막히는 것이 많은 듯합니다. 이 때문에 궁금(宮禁)은 막아서 엄하게 할 수 없고, 기강(紀綱) 또한 어디에 힘입어 세울 수 없으므로, 인재를 가리는 것이 혹 혼잡하여지고, 삼가해야 할 제사가 문란해지며, 백성의 고통을 돌보려 하여도 돌보아지지 않고, 교화를 밝히려 하여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형벌을 삼간다고는 하나 오히려 억울한 옥사가 많고, 사치를 막는다고는 하나 폐습은 여전하며, 간언(諫言)을 받아들인다고는 하나 직언(直言)이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말단으로부터 근본을 찾고 흐름을 따라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앞날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것을 두려워하고 삼가서 마음을 돌려 바른길로 향하지 않으십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학이 지극하지 못함을 아셔서 더욱 정일(精一)한 공부를 하시고, 남을 책망하지 마시고 자신을 책망하시며, 밖에서 찾지 마시고 안에서 찾으시며 늘 삼가고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속이지 마시고 혼자 있을 때를 삼가시는 실제를 일삼으소서. 그렇게 하시면 모든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지러이 많은 온갖 사물을 응대하는 데 어디에나 성학의 공부를 쓸 곳이 아닌 데가 없어서, 중화의 지극한 공부를 저절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강(綱)이 이미 거행되면 그 목(目)은 절로 펴질 것이니 어찌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여워하여 근심할 재변이 있겠습니까마는, 신들이 그 아홉 목을 아뢰겠으니, 전하께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가 상소문의 앞부분으로 이후 열거 할 9가지 항목에 대한 개론 부분이다. 그 요점은 ‘치중화(致中和)’이다. 즉 재앙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왕이 중화(中和)에 이르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왕이 더 공부에 심혈을 기울여야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