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재앙을 이기기 위하여 왕이 힘써야 할 10가지 - 2

從心所欲 2022. 3. 28. 11:25

이어지는 상소문에서 열거하는 9목(目)의 첫 번째는 <궁금불가불엄(宮禁不可不嚴)>이다.

궁금(宮禁)은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로, 우선 임금이 거하는 곳부터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궁금(宮禁)을 엄하게 해야 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집이 다스려지고서 나라가 다스려진다.’ 하였습니다. 그 집을 다스리지 못하고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으므로 왕화(王化)의 근본은 궁금에 있는 것입니다.
▶왕화(王化) : 임금의 덕화(德化).
궁금이 엄숙하지 않으면, 간사한 길이 안팎으로 통하고 바른길이 조정(朝廷)에서 막히어, 공정한 논의는 막혀서 통하지 않고 도리에 어긋난 것이 현혹을 하여 간사한 술책을 부리므로, 그때 가서는 난망(亂亡)을 구제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대개 군신(君臣)의 위아래 사이와 친척의 안팎 사이에서 정의(情意)가 오가며 유통하는 것이 한 몸 안의 위아래에서 혈기가 오르내리며 유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므로 그 사이에서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혈기가 유행하는 것도 제 길을 따라서 다니면 화창하고 안순(安順)하여 온 몸이 편안하지만, 제 길을 잃으면 어그러지고 막혀서 온갖 병이 나게 됩니다. 정의가 통하는 것도 바른길을 거쳐서 통하면 광명정대하여 조정이 화평하나 삐뚤어진 길을 거쳐서 통하면 어둡고 굽어서 속이고 재앙을 만드니, 국가의 안위가 여기에서 결정됩니다.
이치가 반드시 이러하다는 것을 이미 쉽게 알 수 있고, 지난 일이 이미 이러하였다는 것도 분명한 증험이 많습니다. 그런데 대대로 임금들은 거의 다 외정(外庭)에서 함께하는 자는 물리치고 멀리하여 관례에 따라 만날 뿐이고, 궁위(宮闈)에서 연줄을 대어 붙는 자는 가까이하고 믿어서 의지하고 말을 들어 주니, 무슨 마음에서 이렇게 하십니까. 외정의 신하가 성신(誠信)으로 임금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막히게 한 것은 그들의 죄이겠으나, 연줄을 대어 붙는 무리들이 어찌 성심으로 임금을 사랑하겠습니까. 이들은 은총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것을 성취하려는 것이니, 반드시 나라를 어지럽히려는 꾀를 미리 품은 것은 아니겠으나, 이해(利害)가 걸려 있을 때에 사세가 몰리면 무슨 짓인들 하지 않겠습니까.
▶외정(外庭) : 궁궐 밖.
▶궁위(宮闈) : 궁궐.

기묘년 이래로 사림(士林)들이 크게 화를 입은 것이 다 이로 말미암아 번복되었으므로 궁위에 관계되는 일이 모두 한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징계하는 뜻이 없이 도리어 혹 조장하고 전의 폐단을 말끔히 없애려 하지 않으시니, 화란이 언제 그치겠습니까. 관직을 제배(除拜)하는 데에는 절로 공론이 있고 그 책임이 전형(銓衡)에게 있는데, 특별한 명이 뭇사람의 생각 밖에서 나옵니다. 송사와 억울한 일을 심리하는 데에는 절로 실정이 있고 책임이 유사(有司)에게 있는데도 혹 잗단 일까지 몸소 결단하시므로, 뭇사람이 듣고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의심스러워합니다. 흐르고 흘러서 그치지 않으면 하늘에 사무치게 되고, 타고 타서 꺼지지 않으면 들판을 다 태우게 될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묘년 : 1519 중종 14년.

조정에는 복심(腹心)인 신하가 있고 이목(耳目)인 벼슬이 있으며, 후설(喉舌)인 지위가 있는데, 복심은 모의(謀議)할 수 있고 이목은 문견(聞見)할 수 있으며, 후설은 명을 출납(出納)할 수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모의하고 이로 말미암아 문견하며 이로 말미암아 출납하면, 조정의 시비와 인물의 현부(賢否)와 정사의 이해는 그 진위(眞僞)가 어지럽혀질 수 없을 것이며, 호령하는 즈음에도 일이 바르고 말이 순하므로 인심이 모두 복종하여 두려워하거나 의혹하지 않아서, 중화(中和)를 이르게 할 수 있고 재변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심(腹心)인 신하 : 임금의 가슴과 배가 되는 신하. 몸 가운데서 복판을 차지하는 것처럼 중한 벼슬에 있는 신하를 말하는 것으로, 곧 재상을 뜻한다.
▶이목(耳目)인 벼슬 : 임금의 귀와 눈이 되는 벼슬. 곧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
▶후설(喉舌)인 지위 : 임금의 목구멍과 혀가 되는 지위, 곧 승지의 자리.

 

[릴리언 메이 밀러(Lilian May Miller) <Father Kim on Muleback(노새를 탄 아버지 김씨>]

 

9목(目)의 두 번째는 <기강불가부정(紀綱不可不正)>이다.

 

기강(紀綱)을 바루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예전에 정치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 체요(體要)를 바르게 하였는데, 기강이 그것입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그물이 벼리에 달려 있어, 조리가 있어서 어지럽지 않은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무릇 넓은 천하의 많은 백성들은 누구나 다 즐기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며, 누구나 다 슬기와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모아 다스려서 한 군데로 돌아가게 하지 않으면, 서로 훔치고 빼앗으므로 어지러워져서 화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사군, 공장, 장사치 위에는 사(士)를 두고 또 그 위에는 대부(大夫)를 두고 또 그 위에는 경(卿)과 공(公)을 두고, 그렇게 하고 나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올려놓아 상하(上下)가 서로 유지하고 귀천(貴賤)이 서로 의지하게 하였습니다. 또 이를 위해서 예절로 선후를 매기고 정사로 게으름을 단속하며 법으로 제도를 지키는데, 이것이 다 기강을 돕기 위한 제구입니다.

그러나 기강은 스스로 설 수 없고 반드시 어진 사람이 있어야 서며, 기강은 스스로 행하여질 수 없고 반드시 공도(公道)가 있어야 행하여집니다. 대저 어진 사람이 있는 곳은 의젓하여 범과 표범이 산에 있는 형세가 있고, 공도가 있는 곳은 환하여 해와 달이 중천에 있는 밝은 때와 같아서, 여우와 너구리가 혼이 빠져 숨고 어두운 그늘이 빛을 받아 밝아집니다.
아! 이것은 재상(宰相)이 도와서 이룰 책무이나, 그 기틀은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사방을 강기(綱紀)하여 편안함이 붕우(朋友)에 미치면 백벽(百辟)과 경사(卿士)가 천자를 사랑하고 직무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백성이 편안하게 되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기강의 책임이 대신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붕우(朋友) : 일반적으로는 벗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뭇 신하를 가리킴.
▶백벽(百辟) : 여러 제후(諸侯).
▶경사(卿士) : 조정의 뭇 신하.
또 이르기를 ‘힘써 마지않는 우리 임금은 사방을 강기하셨다.’ 하였는데, 이것은 기강의 책임이 임금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대저 이런 다음에야 국가가 큰 바위처럼 안정하고 불꽃처럼 성하여, 무너지고 흩어지는 형세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번거롭고 잗단 뭇 옥송(獄訟)과 뭇 신계(愼戒)까지 성려(聖慮)를 수고롭게 하고 지나치게 잔 회계 문서도 혹 전하께서 결단하시니, 이것은 임금으로서 유사(有司)의 직무를 간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자코 있는 것이 재상의 체모에 맞는 것으로 여기고 흐릿하게 하는 것을 복을 누리는 큰 슬기로 여겨, 해야 할 일에 힘쓰지 않으니, 이것은 대신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돌보는 직임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기강이 떨치지 않고 공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면 그 책임이 대간(臺諫)에게 돌아가니, 대간의 직임도 중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을 채우고 누락된 것을 주우며, 악을 없애고 선을 들어 올릴 뿐이고, 그 본원(本原)에 대하여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정(私情)이 성하고 공도가 사라지며, 법령이 무너지고 백사(百司)가 게을러지며, 선물을 보내어 해이하게 하고, 청탁하여 문란하게 하고, 뇌물을 써서 요동하고, 간교한 꾀로 어지럽힙니다. 이로 말미암아 한 나라의 기강이 거의 다 무너졌으므로 전하께서 기강을 고치려 하시더라도 그 정사가 막연하여 상응하지 못하고 시시각각으로 서로 이끌어 망하는 지경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이것이 하늘이 사랑하고 아껴서 크게 경계하기를 그치지 않는 까닭입니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행하여 얻지 못하는 것이 있거든 돌이켜 자기에게서 구하라.’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경(盤庚)의 ‘조리가 있다.’는 말을 거울삼고  문왕(文王)의 ‘힘써 마지않는다.’는 도리를 본받아 돌이켜 구하여 중화(中和)의 공을 이루시어, 기강을 바르게 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바르게 되고, 팔과 다리 같은 대신이 덕을 같이하여 공도가 크게 행하여지게 하소서. 그러면 백성들의 원망을 그치게 하고 화기(和氣)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반경(盤庚)의 ‘조리가 있다.’는 말 : 이것은 기강에 관한 목(目)을 언급하는 첫머리에서 ‘《서경》에 이르기를 벼리가……’한 말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반경상(盤庚上)에 있는 글로, 하(夏)나라의 제17대 왕인 반경이 박(亳)으로 도읍을 옮길 때에 신민에게 옮기는 것의 편리를 설명하는 가운데에 나온 말이다.
▶문왕(文王)의 ‘힘써 마지않는다.’는 도리 : 이것은 앞에서 ‘《시경》에 이르기를……’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힘써 마지않는다.……’의 글귀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역박(棫樸)에 있는데, 이 편은 문왕이 사람을 잘 임용하여 어진 신하가 많음을 기린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