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건축물 35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이라고 하면 흔히 아래 건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 사진은 희정당의 남쪽 행각(行閣)일 뿐이다. 희정당 본 건물은 이 행각 뒤에 숨어있다. 희정당(熙政堂)이라는 이름의 건물 역사는 기구하다. 연산군 2년인 1496년에 지어진 이후, 임진왜란, 인조반정, 1833년, 1917년의 4번에 걸쳐 건물이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20년에 지어진 것이다. 《순종실록부록》순종 10년 11월 10일(양력) 기사는 1917년의 소실(燒失)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대조전(大造殿)에서 오후 5시에 불이 났다. 불은 대조전 서온돌(西溫突)에 연접한 나인(內人)들의 갱의실(更衣實)에서 일어나 내전(內殿)의 전부를 태워버렸다. [대조전(大造殿), 흥복헌(興福軒), 통명문(通明門)..

금강산 장안사 - 사성지전

대웅보전 동편에 위치한 사성지전(四聖之殿)은 대웅보전과는 별개의 축을 이룬 구역의 건물이다. 대웅보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신성루라는 누각이 있었고 사성지전에도 또한 법왕루라는 별도의 누문이 있었다. 가람배치에서 이렇게 한 개의 절 안에 2개의 축을 갖고 2개의 중층 법당과 2개의 누각 건물을 둔 것은 특이한 경우다. 사성(四聖)은 불교에서는 불(佛). 보살(菩薩). 성문(聲聞). 연각(緣覺)을 가리키거나 아미타불.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대해중(大海衆)보살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장안사의 사성지전은 어떤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성문(聲聞) : 원래의 의미는 석가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당시의 제자들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이후 불교의 교설을 듣고 스스로의 해탈을 위하여 정진하는..

금강산 장안사 - 대웅보전

겸재 정선의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그림이 많고 유명하지만 진재 김윤겸도 장안사를 그렸다. 서기 500년대 중반 즈음에 창건된 장안사는 이후 비에 무너지고, 불에 타기도 하여 여러 차례 중건이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건물을 중수한 것은 1863년이었다. 그러나 그 규모는 원래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림으로는 많이 본 장안사이지만, 지금 실물로 장안사를 본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1년 6.25 전쟁 당시 폭격을 받아 모조리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흑백사진 유리 건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있어 그 면모를 대강 짐작해볼 수는 있다. 장안사는 대웅보전과 사성지전을 각각의 중심축으로 하는 두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성지전은 대웅보전의 동쪽에 위치한다. 이..

산사(山寺) 3 - 전각의 의미

석가, 약사, 아미타 삼세불상은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유행한 대표적 삼불상으로 조선시대 불전(佛殿)을 대표하는 큰 대웅전에 봉안되어 왔다. 석가불은 이 세상인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이고, 약사불은 약사유리광세계의 교주이며, 아미타불은 극락정토세계의 교주이다. 즉 석가불은 현세이면서 이 세계의 부처님이고, 약사불은 동방(東方)의 부처님이면서 과거의 부처님이며, 아미타불은 서방(西方)의 부처님 이면서 미래의 부처님이어서 시간적인 세(世)는 과거, 현재, 미래세이면서 이 세계, 동방세계, 서방세계 등 공간적인 세(世)도 되는 것으로 시·공간적인 삼세의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반면 법화사상에서의 삼세불은 정광불(定光佛)이 과거불 , 석가불이 현재불 , 미륵불이 미래불이다. 불상을 모신 법당을 대개 대웅전으로 ..

산사(山寺) 2 - 가람배치

석가모니의 전도(傳道) 초기인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의 승려들은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정한 거주지가 없었다. 승려들은 독신으로 지내면서 걸식하는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인도 기후의 특성 때문에 우기(雨期)에는 이와 같은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외출보다는 한곳에 모여 정진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사분율(四分律)≫1의 기록처럼, 장마철에 외출한 불교수행인들이 질퍽해진 땅 위에 나온 벌레를 밟아 죽이게 되는 경우가 있어, 불살생(不殺生)의 계율관에 문제가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에 석가모니는 우기를 피하려는 실리적 이유와 교세가 비대해지는 데 따른 화합의 필요성에서 우기의 석 달 동안 바깥출입을 삼가는 규율을 정하게 되었다. 이 여름 석 달 동안 출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

산사(山寺) 1 - 삼문(三門)

명산은 물론이고 웬만한 산치고 절 없는 산이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 산에는 절들이 많다. 그래서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산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절 구경을 하게 된다. 허다 못해 수학여행 길에라도 한번은 보게 된다. 그럼에도 절에 대한 특별한 기억들은 별로 없다. 대부분 남들 뒤따라 생각 없이 쫓아다닌 절 구경이라 그렇다. 격식을 갖춘 산사(山寺)들은 대개 삼문(三門)을 갖추고 있다. 불교에서 삼문은 법공(法空), 열반(涅槃)으로 들어가는 3가지 해탈문(解脫門)을 가리키는데, 즉 공문(空門), 무상문(無相門), 무작문(無作門)을 이른다. 그래서 사찰의 본당을 열반이라 비유하여 거기에 이르는 3단계의 누문(樓門)을 세운 것이다. 이때의 삼문은 산문(山門)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사찰에 세 개의 문을 둬서 진입을..

우리 옛 건축물 29 - 문화재 유감

일제의 고건축학자가 완전 해체한 뒤 재조립하면서 망가뜨려 놓은 석굴암을 우리 정부가 원형에 기초한 복원을 하겠다고 1962년에 정비 사업에 나선다. 1964년까지 3년 동안 공사를 해서 복원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습기가 차고 누수가 생겨 몇 년 뒤 재차 공사를 했지만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는 1976년, 관광객의 출입을 막는다며 유리벽 설치를 해놓고는 지금까지도 그 상태이다. 석굴암은 본래 본존불 주위의 10대 제자상과 11면 관음상으로 둘러진 방을 한 바퀴 돌면서 참배하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인데 유리벽으로 막아 놓았으니 그 의미도 사라져버렸다. 유리벽 안으로는 절에서 허락하는 때에 일정 금액 이상의 시주를 하면 스님과 같이 안에 들어가 기도를 할 수도 있다고는 한다. 그렇지만..

우리 옛 건축물 28 - 궁궐단청에 대한 의문

사찰이나 궁궐에 가보면 처마 밑 단청은 모두 녹색의 기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 궁궐의 단청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숭유배불 정책을 강력히 시행했던 조선이었는데 어떻게 궁궐과 사찰의 단청이 이렇게 차이가 없을까? 지금의 단청을 보면 사찰단청은 아무리 못해도 금단청이고 궁궐단청은 그보다 한 단계 낮다는 모로단청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이후 호국불교의 절실함에서 시작된 불사 재건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사찰단청이 화려함을 더하여 극도로 화려한 금단청양식이 성립되어간데 반해, 전란으로 재원이 고갈되고 연이은 궁궐건축에 따른 부담으로 궁궐의 단청은 오히려 간소화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설명이 있기는 합니다. 실제로 궁궐을 재건하면서 단청에 사용할 진채(원래 조선시대의 안료는 진채, 당..

우리 옛 건축물 27 - 마루와 온돌

궁궐 건물이나 사찰 법당의 바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마루입니다. 하지만 궁궐의 정전 바닥은 원래 전돌(벽돌처럼 흙을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창덕궁 인정전 바닥은 현재 마루로 되어있지만 이는 구한말 순종 때에 이르러 인정전에 전기와 커튼을 설치할 때 바꾼 것으로 근정전이나 명정전은 지금도 바닥이 전돌입니다. 사찰 법당도 거의 전부라 할 만큼 마루 일색이지만 이것도 원래는 전돌 이었었다는 의견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마루는 습기가 많고 더운 지방에서 발달한 남방적 요소이지만 북방적 요소인 온돌과 함께 같이 구성된다는 것이 한옥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함경도 같은 경우는 워낙 추운지방이라 살림집에서 마루가 쓰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루의 재료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