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이라고 하면 흔히 아래 건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 사진은 희정당의 남쪽 행각(行閣)일 뿐이다. 희정당 본 건물은 이 행각 뒤에 숨어있다.
희정당(熙政堂)이라는 이름의 건물 역사는 기구하다. 연산군 2년인 1496년에 지어진 이후,
임진왜란, 인조반정, 1833년, 1917년의 4번에 걸쳐 건물이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20년에 지어진 것이다.
《순종실록부록》순종 10년 11월 10일(양력) 기사는 1917년의 소실(燒失)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대조전(大造殿)에서 오후 5시에 불이 났다. 불은 대조전 서온돌(西溫突)에 연접한 나인(內人)들의 갱의실(更衣實)에서 일어나 내전(內殿)의 전부를 태워버렸다. [대조전(大造殿), 흥복헌(興福軒), 통명문(通明門), 양심합(養心閤), 장순문(莊順門), 희정당(熙政堂), 찬시실(贊侍室), 내전(內殿), 창고(倉庫), 경훈각(景薰閣), 징광루(澄光樓), 옥화당(玉華堂), 정묵당(靜默堂), 요화당(曜華堂), 요휘문(曜暉門), 함광문(含光門)이다.]
불은 오후 8시에 비로소 진화(鎭火)되었다.】
때마침 서북풍이 불어와 불길이 순식간에 번지면서 위 <동궐도>의 대조전과 희정당 일대가 거의 다 타버린 것이다.
다시 《순종실록부록》순종 10년 11월 14일에는 그 후속 기사가 실렸다.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 이하 고등관(高等官)이 화재 이후의 처리 방법에 대하여 회의를 하고, 임시 궁전[낙선재(樂善齋)이다.]을 응급 수리하는 비용 6만 5,000원을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하기로 하였다. 신전(新殿)은 조선식으로 건축하기로 하고, 그 외에는 서양식을 참조하기로 하였다. 건평은 약 700평으로 하고 건축 및 설비, 잡비 등을 개략하여 54만 6,300원이 되었다. 금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대정(大正) 8년까지 준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왕직(李王職) : 이왕직의 이(李)는 조선왕실의 성(姓)인 전주 이씨를 지칭하고, 왕(王)은 일본의 왕실봉작제의 작위명(爵位名)을 의미하며, 직(職)은 업무를 담당하는 직관(職官)이란 의미이다. 이왕직은 1910년 망국과 함께 대한제국황실(大韓帝國皇室)이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됨에 따라 기존의 황실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宮內府)를 대신하여, 일본의 궁내성(宮內省)에 소속된 기구로 설치되어 1911년 1월 31일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
그런데 새로운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목재 조달 방법이 경악스럽다. 《순종실록부록》순종 10년(1917년) 11월 27일 기사다.
【이왕직(李王職)에서 전각(殿閣)을 중건하는데, 경복궁(景福宮) 내의 여러 전각 [교태전(交泰殿), 강녕전(康寧殿), 동행각(東行閣), 서행각(西行閣), 연길당(延吉堂), 경성전(慶成殿), 연생전(延生殿), 응사당(膺社堂), 흠경각(欽敬閣), 함원전(含元殿), 만경전(萬慶殿), 흥복전(興福殿)이다.]의 옛 재목을 옮겨 짓는 일을 총독부(總督府)와 의논하여 정한 후 보고를 올렸다.】
창덕궁에 다시 내전(內殿)과 침전(寢殿)을 짓느라 경복궁의 내전과 침전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위 <북궐도> 상으로 보면 그래도 다른 건물들이 꽤나 남아있을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일제는 자신들이 조선에서 정치를 개시한 5주년을 기념하여, 이 일이 있기 2년 전인 1915년에 경복궁에서 ‘시정오년(始政五年)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었다. 그것을 기념하여 저들이 만들었던 기념포스터를 보면 당시의 경복궁 실상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이미 근정전, 경회루, 강녕전, 교태전을 빼고는 이미 싹 다 갈아엎어 놓은 상태였다. 거기서 내전, 침전 지역까지 훼손했으니 그 많던 경복궁 건물은 다 사라지고 근정전과 경회루만 덩그러니 남아있게 된 것이다.
경복궁의 강녕전을 뜯어다 희정당을 짓고, 경복궁의 교태전을 뜯어다 대조전(大造殿)을 짓고, 만경전(萬慶殿)을 옮겨 경훈각(景薰閣)을 재건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조전의 솟을지붕은 사라지고, 경훈각의 2층인 징광루(澄光樓)는 아예 올리지도 못하고 1층으로 마감하였다. 희정당은 원래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였으나, 건물을 양쪽으로 길게 늘려 정면을 11칸으로 만들었고 측면도 4칸으로 늘려 지었다. 완전히 새로운 건물을 창조한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옛 궁궐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맞춰 새 건물을 짓는 당위성을 논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기는 하다. 경복궁에 있던 옛 건물은 뜯어 없애고, 창덕궁에는 옛 모습도 찾지 못한 건물들이 들어서 옛 건물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그저 안타깝다는 이야기다.
이왕직이 애초 계획한대로 희정당은 겉은 조선식으로 내부는 양식으로 꾸몄다.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을 깔고, 유리 창문을 달았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를 걸었다. 보물 815호라고 한다. 건물 양쪽 각 1칸과 뒤쪽 1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나머지 정면 9칸과 측면 3칸을 방과 응접실, 회의실 등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의 가운데 3칸이 응접실이다. 이 응접실의 동쪽과 서쪽 벽 상단은 당시의 서화가였던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그린 금강산 그림 두 점으로 장식하였다. 비단에 그림을 그려 벽에 붙인 부벽화(付壁畵) 형식이다.
작년에는 효성그룹에서 ‘창덕궁 전등 복원 사업’을 진행하여 희정당과 대조전에 각각 6개와 1개가 걸린 샹들리에와 건물의 복도 조명을 다시 밝혔다. 100년전 설치되었던 그 모습과 느낌대로 복원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국립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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