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건축물

산사(山寺) 2 - 가람배치

從心所欲 2019. 3. 31. 13:46

 

석가모니의 전도(傳道) 초기인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의 승려들은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정한

거주지가 없었다. 승려들은 독신으로 지내면서 걸식하는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인도 기후의 특성 때문에

우기(雨期)에는 이와 같은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외출보다는 한곳에 모여 정진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사분율(四分律)≫1의 기록처럼, 장마철에 외출한 불교수행인들이 질퍽해진 땅 위에 나온 벌레를 밟아

죽이게 되는 경우가 있어, 불살생(不殺生)의 계율관에 문제가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에 석가모니는 우기를 피하려는 실리적 이유와 교세가 비대해지는 데 따른 화합의 필요성에서 우기의 석 달

동안 바깥출입을 삼가는 규율을 정하게 되었다. 이 여름 석 달 동안 출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는

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이 안거를 하게 될 때 가장 필요한 일은 규율을 정하는 것과 공동으로 생활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다. 규율은 부처가 직접 제정하였지만 장소를 마련하는 일은 경제력 있는 신도들의 시주에

의지해야만 하였다. 이에 신도들이 부처님과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 안거할 장소를 자발적으로 마련하였다.

 

[안거를 위하여 선방으로 향하는 스님들, 조계사 사진]

 

불교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집단거주의 장소는 죽림정사(竹林精舍)와, 수닷타(Sudatta)라는 인물이 산을

온통 금으로 덮어서 마련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기원정사(祈園精舍) 등이 있다. 이들 정사는 안거를 지내기

위한 실제적인 목적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 불교교단의 공동재산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당시의 절은

단순한 공동주거지의 성격을 띠었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종교의례를 집행하는 성소(聖所)로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동안거(冬安居) 중인 해남 대흥사, 청여스님 사진]

 

[해남 대흥사, 청여스님 사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유명한 불국사는 예외이지만, 통상 절이라고 하면 부처를 모신 주불전(主佛殿)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가람(伽籃)이 도입될 시기에는 사리를 모신 불탑이 가람의 중심이었다.

 

[불국사, 매일경제 사진]

 

가람은 기원전 2세기경에 신앙의 대상인 불탑과 수행 장소로서 인도에서 시작되었는데,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스투파(Stupa:佛塔)가 가람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사리를 모신 불탑이 예배의 대상이었다가

후에 불상이 출현됨에 따라 불상으로 변하고, 그 불상을 모시기 위한 불당인 금당(金堂)이 등장하게 되었다.

금당은 본존불을 안치하는 가람(伽籃)의 중심 건물을 가리키는 동시에 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통징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금당이라는 명칭은 전당 안을 금색으로 칠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금색의 본존불을 내부에 안치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고려 초까지는 불전을 금당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이후 법당

(法堂)이라는 명칭이 쓰였다.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2, 보물 제41호, 전북일보 사진]

 

불상의 출현에 따라 불탑 중심의 가람배치는 불상을 모신 불당과 불탑이 함께 놓이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가람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변천, 발전되었으며, 동아시아의 가람배치는

중국의 궁궐건축과 인도의 불탑이 결합된 형태를 따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불교 도입 초기부터 탑 건립이 성행하였다. 또한 금당을 비롯한 강당, 승방 등의 건물들이

가람에 배치되면서 불탑을 중심으로 일탑식, 쌍탑식, 무탑식 등으로 가람 배치형식들이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는 드물기는 하나 탑이 절의 외곽지대로 밀려가거나 건립되지 않는 경우도 생겨났지만,

우리나라 일반 절에서 탑과 불전은 가장 기본적인 구조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가람배치를 논할 때에는

탑의 배치 형식에 기준을 둔다. 즉, 탑이 불전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면 일탑식(一塔式) 가람배치, 두 탑이

불전 앞 동서로 대칭하여 세워지면 쌍탑식 가람배치, 탑이 하나에 금당이 셋일 경우에는 일탑삼금당식

(一塔三金堂式) 가람배치라고 한다. 이는 탑과 불전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 하는 차이점에서 생겨난

가람 배치이다.

탑이 예배의 주 대상이 될 때에는 일탑식으로 배치하였고, 불상이 주된 예배대상으로 될 때에는 쌍탑식 가람

배치를 취하였다. 우리나라의 사원은 불전 중심으로 된 가람배치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리신앙(舍利信仰)이

열렬하였기 때문에 탑에 대한 숭배도 매우 커서, 양자를 동시에 숭배하는 가람 배치법이 우리나라 가람배치의

골격을 이루면서 발전되어 왔다.

 

[통도사 전경, 양산시청 사진]

 

[해인사 전경]

 

고대 우리나라의 절은 주로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시 중심지에 건립되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이 수행과 포교 사이에서 어디에 역점을 두느냐에 따라, 그리고 시대 상황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입지조건에

변화가 생겼다. 수도를 중심으로 넓은 사역(寺域)에 걸쳐 장엄한 건축물을 가지는 절을 평지(平地)가람형이라

한다. 이런 절들은 특히, 왕실의 원당(願堂)이나 국찰(國刹) 등이 많고, 동시에 교통의 편리함 때문에 대중적

불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반면 심산유곡에 자리 잡은 절은 산지(山地)가람형이라 하는데, 신라 말엽에 들어 온 선종(禪宗)의 영향과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주로 수행생활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특징을 지녔다. 이와 같은 절들은 현재까지도 수도

도량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우리나라 절이 주로 산지가람형인 까닭에 대해서는 산악숭배 경향을 꼽기도 한다.

명산의 봉우리마다 불보살(佛菩薩)의 명호가 붙여지고 그곳을 골라 절터로 잡는 것은, 우리 고유의 산악숭배

사상이 불교로 흡수되는 과정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순천 송광사 전경, 조판형 사진]

 

통상 대웅전으로 불리는 금당 또는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가람의 중심이 되는 불전이다. 큰 힘이 있어서

도력(道力)과 법력(法力)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대웅(大雄)’은 고대 인도의

‘마하비라’를 한역(漢譯)한 말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된 것이다.

 

[수덕사 대웅전, 이재은 사진]

 

그런데 대웅전 안에는 불상이 하나만 모셔져 있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하나라는데 웬

불상이 이렇게 많은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수덕사 대웅전 불상3]

 

불교에서는 삼존불(三尊佛)을 모신다. 석가모니 이전에도 부처가 있었고,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에도 계속

존재하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세상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삼존불은 삼신불(三身佛), 삼세불(三世佛)이라고도 하는데 법당 안에 본존불(本尊佛)과 좌우에서 협시하는

보처불보살(補處佛菩薩)을 합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대개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세 부처를

말하는데, 법신은 법으로서의 부처님을 뜻하는 말로, 구체적으로는 비로자나불로 나타난다. 보신은 수행을 통해

무궁무진한 공덕을 갖춘 부처님으로 아미타불이고, 화신은 응신(應身)이라고도 하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여러 형상으로 나타나는 부처를 말한다. 인도에서 출현한 석가모니불도 응신이며,

과거의 7불을 비롯한 많은 부처와 미래의 미륵불도 모두 응신에 속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를 모실 때는 현세불로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과거불로는 연등불(燃燈佛), 미래불로는

미륵불을 모신다. 연등불 대신 갈라보살(竭羅菩薩)을 모시기도 하며 이 경우에는 미륵불도 미륵보살이 된다.

또한 현세불인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편 불전의 본존불과 양(兩) 협시보살을 합하여 삼존불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미타여래는 관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이 협시하고, 약사여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석가여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한다.

 

[하동 쌍계사 대웅전 불상4, 신광호(문화재수리기술자) 사진]

 

 

 

참조 : 시공 불교사전(곽철환, 2003, 시공사), 문화원형백과(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사분율(四分律) : 4대 계율서(四大戒律書)의 하나로, 석가모니 입멸 후 100년경에 담무덕(曇無德)이 상좌부(上座部)의 근본율 중에서 자기 견해에 맞는 것만을 네 번에 걸쳐 뽑아 엮은 율문 불서(律文佛書). 소승불교(小乘佛敎)의 계율서로서, 비구가 지켜야 하는 250계와 비구니가 지키는 348계가 기록되어 있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2. 실상사(實相寺)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때 증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했다가 귀국해서 세운 절로 알려져 있으며 철로 만들어진 여래좌상은 9세기 중엽에 조성된 초기 철불(鐵佛)의 실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3.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본문으로]
  4. 좌측으로부터 세지보살, 아미타불, 관음보살, 석가모니불, 월광보살, 약사여래불, 일광보살 순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