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왕들은 누구의 젖을 먹고 자랐을까?

從心所欲 2022. 2. 13. 16:31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분유가 없었으니 모든 아이들은 젖을 먹고 컸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왕들은 어릴 때 왕비의 젖을 먹고 자랐을까? 

 

조선시대의 사대부 집안에서는 유모를 들여 아이에게 대신 젖을 물리게 했는데, 이는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출산일이 가까워지면 엄격한 심사를 통해 미리 유모를 선발하여 대기시켜 아이를 키울 준비를 시켰다. 그런데 그 유모의 신분은 대부분 천민이었다. 양가집 여인은 남녀유별의 유교적 윤리 때문에 쓸 수가 없어 결국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천민의 여자를 골라 유모를 삼았다. 몰론 아무나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종실의 여종이나 왕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內需司)의 여종 가운데서 골랐다. 그래서 옥체(玉體)로 불리는 조선 왕들의 귀한 몸은 아이러닉하게도 모두 천민의 젖을 먹고 자랐던 것이다. 출산 후 21일을 뜻하는 삼칠일(三七日)까지는 생모의 젖을 먹기도 하였다고는 하지만 이후에는 오직 유모의 젖만 먹었다. 왕비가 산후에 건강을 빨리 회복하는 것만큼이나 이어서 또 다른 회임을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되는 것도 중요했기에 고된 육아의 임무는 유모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왕실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를 전담하는 보모(保姆)상궁이 따로 배정된다. 그러나 이 보모상궁은 왕자나 공주의 양육을 담당하는 나인[內人]들의 총책임자일 뿐, 수유는 전적으로 유모의 몫이다. 그러니까 유모는 보모상궁의 감독 아래 수유를 하는 것이다. 세자의 경우에는 양육을 담당하는 나인이 약 10인에 이르고, 보모상궁 외에 부보모상궁이 배치되어 2인이 격일제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모상궁은 늘공이라 출퇴근이 있어 아이와 떨어지기도 하지만 유모는 밤낮없이 아이와 함께 생활했다. 유모는 아이가 3살이 될 즈음까지는 궁중에서 같이 생활하다가 이후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만 아이가 임금의 맏아들인 원자(元子)일 경우에는 계속 궁중에 머물면서 궁녀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원자 또는 세자가 자라 왕이 되면 유모는 외명부(外命婦) 종1품인 봉보부인(奉保夫人)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봉보부인이라는 칭호와 직위는 세종이 자신의 유모를 대우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유모 이씨(李氏)를 봉하여 봉보부인(奉保夫人)을 삼았는데, 임금이 아보(阿保)의 공을 중하게 여겨 옛 제도를 상고하여 법을 세우게 하였더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삼가 예전 제도를 상고하오니 제왕이 유모를 봉작(封爵)하는 것이 한(漢)나라에서 시작하여 진(晉)나라를 거쳐 당(唐)나라까지 모두 그러하였고, 내려와 송(宋)나라 조정에 미치어 진종(眞宗)의 유모 유씨(劉氏)를 진국연수보성부인(秦國延壽保聖夫人)을 봉하였으니, 마땅히 예전 제도에 의하여 이제부터 유모의 봉작을 아름다운 이름을 써서 봉보부인이라 칭하고, 품질(品秩)은 종2품에 비등하게 하소서."
▶아보(阿保) : 보호하여 기름.

하므로, 그대로 따라서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었다.  [세종실록 세종 17년(1435년) 6월 15일 기사]

 

세종 때에는 봉보부인이 종2품이었지만 이후 종1품으로 격상되었다. 봉보부인에게는 공식적으로 종1품 관직의 녹봉이 지급되는 한편, 왕들이 따로 쌀, 노비, 토지, 옷, 콩, 땔감 등 생활에 필요한 여러 혜택을 수시로 제공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유모의 남편과 자식, 친인척의 천민 신분을 면해주기도 하고, 남편과 자식에게 높은 관직을 주기도 했다. 특히 궁 밖에서 성장하여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성종과 불우한 성장과정을 거친 연산군은 자신의 유모에게 특별대우를 해 주어 신하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 살아서 봉보부인에 책봉되었던 왕의 유모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외명부의 품계를 받는 대상은 왕실여성과 문무관(文武官)의 부인들이다. 왕실여성을 제외하고 남편의 직위와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역할에 의해 봉작을 받는 것은 봉보부인이 유일하다. 천민 출신을 종1품의 직위에까지 오르게 한 것은 대단한 대우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의 친자식을 떼어놓고 남의 자식을 대신 키운 대가다. 자기 자식을 버려놓고 남의 자식을 젖먹이고 있을 때 어느 어머니가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아마 왕들도 그런 고마움을 잘 알았기 때문에 유모에게 이런 특별대우를 했을 것이다.

 

[신한평 <자모육아(慈母育兒)>, 지본담채, 23.5 x 31.0 cm, 간송미술관 ㅣ일재(逸齋) 신한평(申漢枰)은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로 도화서 화원이었다. 신한평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그림은 어쩌면 신한평이 자신의 가족 모습을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고 있다. 그러한 추측이 맞는다면 오른쪽에 눈을 비비고 있는 아이가 신윤복이고 젖을 먹고 있는 어린아이가 동생인 신윤수(申潤壽)가 되는 것이다. ]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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