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138

조선의 기생 16 - 기생의 지아비

인조(仁祖) 대 이후로는 서울에 악가무를 전업으로 하는 장악원 여기(女妓)를 따로 두지 않았다. 소위 경기(京妓)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물론 내의원, 혜민서의 의녀(醫女)와 공조, 상의원의 침선비(針線婢)는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그들은 장악원 소속도 아니고 연향에 보조자로 동원될 뿐 악가무가 주업도 아니다. 그래서 궁중의 연향행사가 있으면 그때마다 각 지방에서 뽑아 올린 선상기(選上妓)들이 서울로 올라왔다가 궁궐 행사를 마치면 다시 자기 소속 고을로 돌아가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런 체제는 이후 조선 말기까지 계속 유지되었고, 영조 대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도 “진연 때에, 여기 52명을 선상한다. 특별한 지시가 있으면 가감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서울에 따로 머물 곳이 없는 이들 선상기들이..

우리 옛 뿌리 2021.07.07

조선의 기생 15 - 김만덕

정조 17년인 1793년 11월에 장령(掌令) 강봉서(姜鳳瑞)가 이런 상소를 올렸다. 【"제주도는 여러 차례 흉년이 들었지만 지난해처럼 추수할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굶어 죽은 사람이 몇 천 명이나 되는지 모르는데, 올해 8월에 또 큰 바람이 연일 불어서 정의현(旌義縣)과 대정현(大靜縣)은 적지(赤地)나 다름없고 제주 좌면(左面)과 우면(右面)도 혹심한 재해를 입어 내년 봄이면 틀림없이 금년보다 배나 더 굶주림을 호소할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 이철운(李喆運)은 밤낮없이 술에 취하여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환곡을 마구 받아들이면서 매 섬[斛]마다 반드시 두서너 말의 여유 곡식을 더 받고 나누어줄 때는 곡식 1말과 7, 8되[升]에 불과한데도 그 남은 ..

우리 옛 뿌리 2021.06.26

조선의 기생 14 - 김금원과 호동서락기

중학교 1학년 여자아이가 혼자 원주의 집을 나서 제천과 단양을 거쳐 금강산과 설악산을 유람하고 내친 김에 서울구경까지 하고 돌아왔다. 교통과 치안이 좋은 지금 시절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무려 200여 년 전쯤인 1830년에 이런 여행을 실제로 감행한 조선여성이 있었다. 김금원(金錦園) 이란 여성이다. 김금원이 여행을 하면서 지은 시들을 모은 시문집이자 기행문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의 발문에 그녀는 여행을 떠나게 된 내력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관동(關東)의 봉래산(蓬萊山) 사람이다. 스스로 금원(錦園)이라 호를 하였는데, 어려서 잔병이 많아 부모가 불쌍하게 여겨 여자가 해야 할 가사나 바느질은 가르치지 않고 글공부를 시켰다. 글 공부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경사(經史)에 대략 통하게 되..

우리 옛 뿌리 2021.06.21

조선의 기생 13 - 매창

황진이의 명성이 워낙 독보적인 탓에 조선에서 사실 황진이에 견줄만한 다른 기생은 없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논개(論介)가 있지만, 논개는 살아생전의 기생으로서가 아니라 의롭게 죽은 행위로써 이름을 얻은 것이기 때문에 그 명성의 의미는 다른 차원이다. 논개는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로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이다. 비록 황진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조선시대에 나름의 명성을 얻었던 기생으로는 전북 부안(扶安)의 기생인 매창(梅窓)이 있었다. 황진이보다 약 50년 뒤에 태어난 기생으로, 당대에는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명기(名妓)의 쌍벽을 이룬다는 말을 들었었다. 생몰연도가 알려지지 않은 황진이와는 달리 매창의 문집인 「매창집」..

우리 옛 뿌리 2021.06.15

조선의 기생 12 - 황진이

기녀(妓女)는 기역(妓役)이 부과된 천인 여자들이다. 천민의 노비(奴婢) 중에서 뽑힌 자들이니 애초부터 신분상으로 대접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고, 변방 무관의 살림을 돌보아주는 방직기나, 지방관아의 각종 행사와 사신 접대에 동원되는 관기로서의 역할도 사회적으로 존중받을만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수청이라는 명목으로 이 남자 저 남자와 몸을 섞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일상은 유교사회의 관점에서는 ‘상것 중에서도 천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광대’ 창(倡)자를 써서 창기(倡妓)라고 불리던 호칭이 시간이 가면서 ‘몸 파는 여자’라는 뜻을 갖는 창(娼)자와 섞여 쓰이다가 나중에는 거의 창기(娼妓)로 굳어진 것만 보아도 기생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시각을 짐작할 수가 있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였던 반계(..

우리 옛 뿌리 2021.06.09

조선의 기생 11 - 솜방망이 처벌

지금도 일반 서민의 삶을 ‘ㅈ’도 모르는 판사들이 세상 물정이나 민심과 동떨어진 어이없는 판결을 싸놓는 통에 법을 우습게 아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듯이, 조선시대의 축첩(蓄妾)에 대한 원칙 없고 물렁한 징계는 사대부들의 몰염치를 부추겼다. 황음무도함을 이유로 모든 백성의 아버지라는 왕까지 몰아내놓고도,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염치도 없이 국가의 재산인 관기들을 취하여 첩으로 삼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이중성을 보였다. 물론 이런 행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기는 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재위 8년인 1513년에 변경을 지키는 장수(將帥)들인 변장(邊將)들이 축첩(蓄妾)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1539년에..

우리 옛 뿌리 2021.06.02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

【지난여름에 윤세신(尹世臣)이 나에게 말하기를, “명천(明川)의 남쪽에 칠보산이 있는데, 기이하고 뛰어나며 웅장하고 수려하여, 풍악산(楓嶽山)에 버금갑니다. 그곳에 가보려고 합니다”라고 했다. 내가 그를 말려 말하기를, “잠시 내 일이 한가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나랏일에 얽매여 바쁘고 분주하여 겨를이 없었다. 지금에야 나는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가게 되어, 마침내 가서 보기로 결심했다.】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1514 ~ 1547)가 쓴 의 서두이다. 1542년 3월에 이루어진 임형수의 칠보산 유람길에는 미리 약조가 되었던 명천현감(明川縣監), 회령군수(會寧郡守), 경성(境城)향교 교수(敎授) 3인이 동행했다. 출발하는 날은 마침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고 비까지 내려 ..

우리 옛 뿌리 2021.05.29

조선의 기생 10 - 기생 첩

허조(許稠, 1369 ~ 1439)는 태종과 세종을 도와 조선 초기의 예악제도(禮樂制度)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강직한 발언으로 좌천되기도 하고 귀양도 갔다. 죽은 뒤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고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묘정(廟庭)에 배향된다는 것은 임금이 생전에 총애하던 신하나 공로가 있는 신하의 신위(神位)를 임금의 사당에 함께 모셔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조선 중기에 성현(成俔)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인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허조(許稠)에 대한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허문경공은 조심스럽고 엄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엄격하고 법이 있었다. 자제의 교육은 모두 「소학(小學)」의 예를 써서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許公)은 평..

우리 옛 뿌리 2021.05.25

조선의 기생 9 - 여악제도의 혁파

연산군 12년인 1506년 9월 1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朴元宗)과 이조 참판(吏曹參判)에서 갑자기 9품의 무관직인 부사용(副司勇)으로 강등된 성희안(成希顔)이 중심이 되어 반정(反正)을 일으켰다. 이들은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그가 곧 중종이다. 멀쩡한 왕을 반역을 통하여 몰아냈으니, 반역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몰아낸 왕의 온갖 실정이 부각되어야 했다. 당연히 연산군이 운용했던 여악제도가 도마 위에 올랐고 연산군의 황음(荒淫) 무도(無道)함과 나라에 끼친 폐해가 《연산군일기》의 마지막 장과 《중종실록》첫 장에 열거되었다. 【시녀 및 공·사천(公私賤)과 양가(良家)의 딸을 널리 뽑아 들이되, 사자(使者)를 팔도에 보내어 빠짐없..

우리 옛 뿌리 2021.05.16

조선의 기생 8 - 공물(公物)

연산군의 여악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특별한 관심과 행각을 후대는 흔히 그의 황음무도(荒淫無道)함에만 초점을 맞추어 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금 색다른 해석도 있다. 사대부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확실히 하기 위한 행위로 보는 시각이다. 그렇다고 연산군의 방종과 음란함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두 요인이 합쳐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꽤 흥미가 있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폐모사건에 대한 보복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왕을 능멸한다는 ‘능상(菱狀)’에 대한 분노로 신하 전체를 대상으로 학살과 다름없는 짓을 자행한 갑자사화 즈음에 연산군의 여악 챙기기가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여악 또는 기생은 국가의 소유물이었다. 그래서 기생이나 여기(女妓)를 가리켜 공물(公物)이라는 표현이 지속적으로 등..

우리 옛 뿌리 2021.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