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14 - 김금원과 호동서락기

從心所欲 2021. 6. 21. 05:48

중학교 1학년 여자아이가 혼자 원주의 집을 나서 제천과 단양을 거쳐 금강산과 설악산을 유람하고 내친 김에 서울구경까지 하고 돌아왔다. 교통과 치안이 좋은 지금 시절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무려 200여 년 전쯤인 1830년에 이런 여행을 실제로 감행한 조선여성이 있었다. 김금원(金錦園) 이란 여성이다.

김금원이 여행을 하면서 지은 시들을 모은 시문집이자 기행문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의 발문에 그녀는 여행을 떠나게 된 내력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관동(關東)의 봉래산(蓬萊山) 사람이다. 스스로 금원(錦園)이라 호를 하였는데, 어려서 잔병이 많아 부모가 불쌍하게 여겨 여자가 해야 할 가사나 바느질은 가르치지 않고 글공부를 시켰다. 글 공부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경사(經史)에 대략 통하게 되고 고금의 문장을 본받아 배워 흥이 나면 때때로 시문(詩文)을 짓기에 이르렀다.

▶관동(關東)의 봉래산(蓬萊山)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있는 산.

 

가만히 내 인생(人生)을 생각해 보았다. 금수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실로 다행이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되 야만인이 사는 곳에 태어나지 않고 우리나라와 같은 문명국에 태어난 것은 더욱 다행이다. 그러나 남자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로 태어난 것은 불행이요,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지 못하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것도 불행이다. 그러나 하늘은 나에게 산수(山水)를 즐기는 어진 성품과 눈과 귀로 듣고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어 다만 산수를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고절하게 보고 듣게 해 주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하늘이 나에게 총명한 재주를 주어 문명(文明)한 나라에서 이를 글로 쓸 수 있게 하였으니 이 또한 좋지 않은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규방(閨房) 깊숙이 들어앉아 여자의 길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세상에 이름을 날릴 것을 단념하고 분수대로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 세상에는 첨윤(詹尹)의 거북이 없으니 굴자(屈子)가 점친 것을 본받기도 어렵다.

▶첨윤(詹尹)의...점친 것 :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충신이었던 굴원(屈原)이 태복(太卜) 정첨윤(鄭詹尹)에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점쳐달라고 한 고사를 인용한 것. 태복(太卜)은 점을 치는 관직의 우두머리.

 

그러나 그 말에 이르기를,

“책략은 짧으나 지략이 넉넉하거든 그 뜻대로 결행하라.”

라고 하였으니 내 뜻은 이에 결정되었다.

아직 혼기에 미치지 아니 한 나이에 강산(江山)의 승경(勝景)을 두루 보고 증점(曾點)을 본받아 세속의 일 다 잊고 맑은 물에 멱 감고 무우(舞雩)에 올라가 글을 읊조리다 돌아오면 성인도 온당하다 할 것이다.

▶증점(曾點)을...무우(舞雩)에 올라가 : 증점(曾點)은 공자의 제자로 증자(曾子)의 아버지다. 공자(孔子)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관직에 등용되면 어떻게 할지를 묻자 증점은 “봄날에 입을 옷이 이미 만들어졌으니 어른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을 데리고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대 아래서 바람을 쐬면서, 시를 읊조리다가 돌아오고 싶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자도 탄식하며 “나도 증점과 함께 하고 싶구나.”라고 하였다는 「논어」 선진(先進)편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한 것. 기수(沂水)는 노(魯)나라에 있는 강 이름이고 무(舞雩)는 기우제를 지내는 높은 언덕 또는 돈대(墩臺)를 가리킨다.

 

마음은 이미 집을 떠나 이름 있는 명승지를 찾아 맑게 유람할 것을 정하였다. 어버이에게 이 계획을 사뢴 지 오래 되어 겨우 허락을 얻었다. 어렵게 받은 허락이라 마음이 후련하기가 마치 새장에 갇혀 있던 새가 새장을 나와 끝없는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분이고, 좋은 말이 굴레와 안장을 벗은 채 천리를 달리는 기분이다.】

 

14세 여자아이의 믿을 수 없는 문장력에 놀랐겠지만, 사실 이 글은 당시에 쓰여진 것은 아니다. 여행은 14세 때 했지만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펴낸 것은 그로부터 20년 후인 34세 때였고, 발문도 그때쯤 썼을 것이니 김금원의 필력이 한층 단련된 후의 글이다.

전하는 글들에 의하면 김금원은 몰락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기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도 기생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데, 기생이 되기 전에 세상 유람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때는 춘삼월 내 나이 14살, 머리를 동자처럼 땋고 수레에 앉았다. 제천 의림지를 찾았는데 애교 띤 꽃들은 웃음을 터뜨리려 하고 꽃다운 풀들은 안개 같았다.】

 

금원은 남장을 하고 떠났다고 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부녀로서 절에 올라가는 자, 사족 부녀로서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꼭 이 조항 때문보다는 이목을 피하고 여행의 편의를 위해서 남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수레를 타고 간 것을 비롯하여 이후의 글에 나타난 정황들을 보면 금원은 말 그대로 혼자 간 것은 아니고 부모가 집안의 종 두엇쯤을 딸려 보냈었던 듯하다.

금원은 제천 의림지와 단양의 선암계곡, 영춘의 천연굴, 청풍의 옥순봉을 차례로 둘러봤다. 특히 단양8경의 하나인 옥순봉을 구경하고는 그 감동을 시로 읊었다.

 

詩家風月暫無閒 시인들은 풍월 읊느라 잠시의 틈도 없고

造物猜人送出山 조물주는 인간을 시기해서 산 밖으로 쫓아냈네.

山鳥不知山外事 산새는 산 밖의 일을 알지 못하고

謂言春色在林間 봄빛은 숲 속에 있다고 지저귀네.

 

금원은 충청도를 거쳐 금강산,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중에 느낀 감회를 틈틈이 이렇게 시로 남겼다. 그리고 여행의 끝에 한양에 이르러서는 정릉 입구에서 왕십리를 바라보며 또 이렇게 시를 읊었다.

 

春雨春風未暫閒 봄비 봄바람 잠시도 그치지 않는데

居然春事水聲間 어느덧 봄날의 일이 물소리 사이에 있네

擧日何論非我土 눈 들어 내 고향 아니라고 어찌 논하겠는가

萍遊到處是鄕關 부평초처럼 떠돌다 이르는 곳이 모두 고향이라네

 

이 시가 14세 때에 지은 그대로인지 아니면 나중에 손을 본 것인지 까지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 구절의 ‘떠돌다 이르는 곳이 모두 고향’이라는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금원은 이 유람에서 돌아온 뒤 이내 원주 지역의 영기(營妓)가 되었다. 이때 `금앵(錦鶯)`이라는 기명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금원의 기생 시절 행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금원은 25세에서 27세 사이의 시기에 김덕희(金德喜)라는 인물의 소실이 되었다. 흔히 김덕희(金德喜)는 시랑(侍郞)이자 규당(奎堂)학사로 소개되는데, 생소하여 무슨 직위와 직책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규장각에 소속된 관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다. 김덕희는 1845년에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제수되었고, 당시 29세이던 금원은 김덕희와 의주까지 동행하여 그곳에서 2년을 살았다. 김덕희는 1847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서울로 돌아왔고, 이후 금원은 김덕희가 용산 한강변에 지은 삼호정(三湖亭)에서 비슷한 처지의 여인들과 함께 어울려 시를 지으며 교유하였다. 이때 금원과 함께한 여인들은 함경도관찰사와 한성부판윤을 지낸 김이양의 소실인 김운초(金雲楚)를 비롯하여, 박죽서(朴竹西), 김경춘(金瓊春), 김경산(金瓊山) 등이었는데 이들 역시 모두 소실(小室)들이었다. 김경춘(金瓊春)은 금원의 동생이기도 했다. 삼호정은 지금의 용산구 산천동에서 마포구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있던 정자로 전한다.

 

금원은 이들에 대하여 “운초는 재주가 뛰어나고 시로 크게 알려졌으며 자주 나를 방문하여 혹은 며칠씩 머무르기도 했으며, 경산은 아는 것이 많고 박식하였으며 음영(吟詠)에 뛰어났다. 그리고 죽서는 재기가 영민하고 지혜로워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는데 문(文)은 한유와 소동파를 사모하였고 시 또한 기이하고 고아하였다. 경춘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단아하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며 시사(詩詞) 역시 여러 사람에 뒤지지 않았다.”고 썼다.

 

또한 “다섯 사람이 서로 마음을 잘 알아서 더욱 친하고, 또 경치 좋고 한가한 곳을 차지하여 화조운연(花鳥雲煙)과 풍우일월(風雨日月)이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고 즐겁지 않은 때가 없었다. 혹 더불어 거문고를 뜯고 음악을 들으며 청흥(淸興)을 풀어내다가 웃고 얘기하는 사이에 천기(天機)가 움직이고 그것이 발해져서 시가 되니 맑은 것, 우아한 것, 건장한 것, 담박하고 광대한 것, 슬퍼 한탄하는 것이 있어서 비록 누가 더 나은지 알 수는 없지만 성정을 도야하고 그대로 그려내어 한가하게 자적하는데 있어서는 한가지였다.”고 자신들의 모임을 설명했다.

 

이들은 자기들뿐만 아니라 해옹(海翁) 홍한주(洪翰周), 자하(紫霞) 신위(申緯), 운고(雲皐) 서유영(徐有英) 등과 같은 남성 문인들과도 교유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집에서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던 대부분의 여성들과는 달리 이들은 파격적일만큼 마음껏 바깥세상을 누린 셈이다.

 

금원은 삼호정에서 보내던 시절인 34세 때인 1850년 봄에 자신의 시문집을 만들려는 생각에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라는 발문을 썼다. 시집의 편집은 그 이듬해에 이루어졌는데 전 해에 쓴 발문이 그녀의 시집 명칭이 되었다.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는 금원 자신이 일생 동안 유람하고 거처한 순서에 따라 일대기적으로 문(文)과 시로 서술한 산문형태의 글이다. 여기서 호(湖)는 오늘날의 충청남북도를 가리키는 호서(湖西)지방을 뜻하고, 동(東)은 금강산과 관동팔경, 서(西)는 관서지방인 평양과 의주, 락(洛)은 중국의 옛 수도인 낙양(洛陽)을 뜻하는 것으로 한양(漢陽)을 가리킨다.

 

[호동서락기, 오마이뉴스 사진]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의 내용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첫째부분에서는 14세 때 남장을 하고 금호사군과 금강산, 관동팔경을 거쳐 서울에 돌아오기까지의 유람 행적과 감회를 서술하였다. 둘째부분에서는 김덕희를 따라 경험한 의주에서의 생활과 정경을 기록하였고, 마지막 부분은 삼호정에서의 시사활동에 대한 기록이다.

 

다섯 여성들의 모임이었던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는 1850년경부터 조금 시들해졌을 듯싶다. 그 해에 동인 중의 하나였던 박죽서가 죽었기 때문이다. 박죽서가 지었던 시들은 그 다음 해에「죽서시집(竹西詩集)」으로 발간되었다. 금원이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 썼던 자신들의 모임에 대한 이야기들은 지나간 즐거웠던 세월에 대한 회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금원은 이런 글을 덧붙였다.

 

【슬프다. 천하 강산의 큼이여! 한 모퉁이 좁은 나라는 큰 볼거리가 되기에 부족하구나. 고금 세월의 장구함이여! 백년의 덧없는 인생은 유쾌하게 즐기기에는 부족하구나. 비록 그러하나 한 끝을 들어 그것으로 미루어보면 천하가 모두 이 강산 같고, 백년으로 보면 고금이 모두 이 같은 시대다. 그렇다면 강산의 크고 작음과 일월의 멀고 가까움을 또 어찌 족히 논하겠는가. 그러나 지난 일과 거쳐 온 곳이 눈 깜짝하는 순간의 꿈일 뿐이니 문장으로 써서 전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날 금원이 있었음을 알겠는가.】

 

금원은 40세 즈음에 죽은 것으로 전한다.

 

 

참고 및 인용 : 한국고전여성시사(조연숙, 2011, 국학자료원), 여성, 오래전 여행을 꿈꾸다 (김경미, 2019, 나의 시간), 문화원형백과 유산기(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국어국문학자료사전(이응백 외, 1998, 한국사전연구사), 서울지명사전(2009, 서울역사편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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