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11 - 솜방망이 처벌

從心所欲 2021. 6. 2. 09:08

지금도 일반 서민의 삶을 ‘ㅈ’도 모르는 판사들이 세상 물정이나 민심과 동떨어진 어이없는 판결을 싸놓는 통에 법을 우습게 아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듯이, 조선시대의 축첩(蓄妾)에 대한 원칙 없고 물렁한 징계는 사대부들의 몰염치를 부추겼다.

 

황음무도함을 이유로 모든 백성의 아버지라는 왕까지 몰아내놓고도,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염치도 없이 국가의 재산인 관기들을 취하여 첩으로 삼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이중성을 보였다. 물론 이런 행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기는 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재위 8년인 1513년에 변경을 지키는 장수(將帥)들인 변장(邊將)들이 축첩(蓄妾)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1539년에 사헌부는 다시 또 중종에게 이런 건의를 올린다.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가 축첩(蓄妾)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법으로 정하여졌는데, 근래 이를 소홀히 여겨 금법(禁法)이 있음을 무시하고, 으레 첩을 거느리고 비복(婢僕)도 많이 데리고 가므로 마치 아실(衙室)과 같습니다. 이래서 많은 폐단이 군민(軍民)에게 미치니 각별히 신명(申明)하여 일체 엄금함으로써 군졸의 폐를 없애게 하소서.”】 [《중종실록》 중종 34년 7월 12일]

▶병사(兵使)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종2품 서반 관직.
▶수사(水使) :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정3품 서반 관직.

 

왕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변방은 함경도와 평안도이다. 이곳 조선 최북단에 근무하는 무관들에게 배정되는 방직기(房直妓)는, 그 이름인 방직(房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무관이 거주하는 처소에 배정된 당번이다. 무관이 외지에서 거주하는데 따른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하여 식사를 포함한 제반 집안일을 맡아 돕는 역할이다. 조금 근대적 표현으로 하자면 식모(食母)의 역할이다. 그런 방직기가 무관과 잠자리를 하는 것은 방직기의 의무는 아니었지만 관례적으로 행하여지고 또 묵인되던 일이었다. 그러나 무관의 방직기에 대한 권리는 그곳에 근무할 때까지다. 제대할 때 지급받은 관물 반납하듯이, 변방 근무가 끝나게 되면 배정되었던 방직기 역시 반납되어야 하고, 그래야 후임 무관에게 다시 배정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전임 무관이 이 방직기를 첩으로 삼아 빼돌리면, 당연히 후임 무관에게 배정될 방직기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는 국경지방에 근무하는 무관들의 근무조건과 사기와 연결되는 문제였다. 이는 조정의 입장에서는 국방과 직결된 중대한 사안이기도 했지만, 무관들도 뒤에 올 자신들의 후임들을 생각했다면 인간적으로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행위들은 만연되어 있었다.

 

이미 이보다 앞선 중종 21년인 1526년에도 조정에는 이런 보고가 있었다.

"양계(兩界)의 인물(人物)이 점점 줄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조관(朝官)과 수령·첨사·만호 등이 첩으로 삼을 뿐만이 아니라 노비라고 칭탁하여 은밀히 데리고 오므로 인물이 날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양계(兩界) : 평안도와 함경도

 

관리들이 첩으로 삼아 데려오는 까닭에 평안도와 함경도의 방직기 숫자가 날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리들은 방직기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까지 데려왔다. 그러면서 또 이 지역의 노비 숫자가 줄어드는 문제도 나타났다. 그래서 당시의 형조판서는 관리들이 첩으로 데려온 방직기와 그 사이에서 낳은 자손들까지 모두 원래의 곳으로 돌려보내자는 쇄환법(刷還法)의 조속한 시행을 건의하였다.

 

【"팔도(八道) 가운데 양계에서 데리고 온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군관(軍官)의 경우에도 모두 데리고 와서 은밀히

종량(從良)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종량되면 온 집안사람이 모두 관역(官役)을 면할 수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나와서

종량되면 수십 명이 한가롭게 됩니다. 더구나 사민(徙民) 10명이 토박이 한 사람만 못하니, 쇄환법(刷還法)을 늦추면

양계의 관속(官屬)이 날로 잔폐될 것입니다. 따라서 조관(朝官)이나 재상(宰相)들의 첩이 된 사람이라도 빠짐없이

쇄환시켜야 합니다."】 [《중종실록》중종 21년 12월 19일]

▶종량(從良) : 한쪽은 양인(良人)이고 다른 한쪽은 천인(賤人)인 부모 사이에서 자식을 낳을 경우, 부모 가운데 높은 쪽 신분인 양인 신분을 주는 것.
▶사민(徙民) :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북방(北方)으로 옮겨 살게 한 형벌. 세종 때 북방 개척의 한 정책으로 이 법을 실시했는데, 주로 남쪽 지방의 백성을 함경도 오진(五鎭)으로 이주시켜 정주(定住)하게 했다.
▶관속(官屬) : 지방 관청(官廳)의 아전(衙前)과 하인(下人)

 

형조판서는 기생첩뿐만 아니라 종량법(從良法)을 이용하여 방직기의 자녀들이 천민에서 양민으로 신분이 바뀌는 문제를 거론했다. 흔히 양반이 집안의 계집종이나 기생 같은 천민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으면 무조건 천민 신분이 되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어림짐작과는 다른 내용이다.

 

[<기축년의 궁중잔치> 또는 <순조어극30년진찬도(純祖御極30年進饌圖)> 병풍 中 부분 ㅣ 기축년 : 1829년]

 

조선시대 신분이 다른 부모에게서 난 자식의 신분은 때에 따라서 달라졌다.

고려시대에는 양인과 노비의 혼인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도 혹 양인과 노비 사이에 자식을 낳게 되면 부모의 신분 중 낮은 쪽을 따르도록 되어 있었기에 바로 천민 신분이 되었다. 조선에서도 초기에는 이 제도를 유지했다. 그러자, 시간이 지날수록 천민의 수는 날로 증가하는 반면에 양인의 수는 점차 감소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군역을 담당하는 계층인 양인의 수가 감소한다는 것은 건국 초기 조선으로서는 심각한 국방문제였다.

이에 조선은 태종 14년인 1414년부터 노비종부법 (奴婢從父法)을 실시하여, 양인의 비처첩(婢妻妾) 소생들이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 뒤 세종 때에는 종부법 실시에 따른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자 이에 대한 논란을 거듭한 끝에, 세종 14년인 1432년에는 다시 종모법(從母法)으로 환원하였다. 세조 때는 동서반유품관(東西班流品官), 문무과 출신 등과 양인 가운데 40세 이상으로 자손이 없는 자의 천첩소생은 종모법에 적용받지 않는 예외규정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성종 때에는 이 내용을 『경국대전』에 법제화하였다.

 

이 제도는 이후에도 양역인구 감소가 문제될 때마다 종량(從良)과 환천(還賤)을 거듭하다가 영조 7년에 종모법(從母法)으로 확정되었다. 중종 때에는 종모법의 예외규정에 따라 관리와 기첩(妓妾)사이에 낳은 자녀의 종량이 가능한 때였다.

중종 때에 이렇듯 방직기를 쇄환하고, 병사와 수사가 첩을 거느리는 것을 엄단하라는 조치가 내려졌음에도 방직기를 포함한 기녀들을 첩으로 삼는 일은 끝내 근절되지 않았다.

불과 15년 뒤인 1553년, 명종 8년에 사헌부에서 명종에게 이런 계(啓)를 올렸다.

 

【“경상우도 수사 원적(元績), 부산포 첨사 신종(申鍾), 나주 목사 노경린(盧慶麟), 평산 부사 조숭조(趙崇祖), 금제 군수 김명언(金明彦), 사도시 첨정 이전(李戩), 진주 판관 강문보(姜文輔)가 양계(兩界)의 관비(官婢)를 맞아들여 첩(妾)을 삼아 데리고 사는 솔축(率畜)한 죄가 지금 모두 드러났으니 조광원(曺光遠)의 예에 의하면 먼저 파직한 다음에 추고하게 하소서.”】[《명종실록》명종 8년 5월 14일]

▶솔축(率畜) : 첩을 들여 데리고 사는 것.

 

기사에 등장하는 조광원(曺光遠)은 전에 평안감사로 있다가 돌아오면서 성천(成川)의 기녀를 서울 집으로 데리고 와서 살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열흘 전 전라도 관찰사 자리에서 파직된 인물이다. 사헌부의 계(啓)를 받은 명종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모두가 파직된 것이다.

지금 모든 공무원들은 한번 파직되면 실상 공무원의 경력은 끝이다. 그래서 관리들을 파직시킨 이러한 조정의 조치는 꽤나 엄중한 것처럼 보인다. 허나 조선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위에 파직된 원적(元績)은 그로부터 6달 뒤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정3품에서 종2품으로 오히려 승진까지 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신종(申鍾)은 2년 뒤 명종의 특명에 의하여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고, 노경린(盧慶麟)은 명종 12년에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된 뒤, 사간원 정언에 이어 병조좌랑의 자리에 올랐다. 이전(李戩)은 만포첨사를 거쳐 나중에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조광원(曺光遠) 역시 이후 경상도 도순찰사, 경상도 관찰사, 형조판서, 의정부 좌참찬, 호조판서, 우찬성, 좌찬성을 거쳐 중추부(中樞府)의 종일품(從一品) 관직인 판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파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있으나마나한 이러한 솜방망이 처벌을 두려워할 관리나 공무원이 예나 지금이나 있는가?

 

 

참조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옛 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기생 13 - 매창  (0) 2021.06.15
조선의 기생 12 - 황진이  (0) 2021.06.09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  (0) 2021.05.29
조선의 기생 10 - 기생 첩  (0) 2021.05.25
조선의 기생 9 - 여악제도의 혁파  (0) 2021.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