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9 - 여악제도의 혁파

從心所欲 2021. 5. 16. 10:43

연산군 12년인 1506년 9월 1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朴元宗)과 이조 참판(吏曹參判)에서 갑자기 9품의 무관직인 부사용(副司勇)으로 강등된 성희안(成希顔)이 중심이 되어 반정(反正)을 일으켰다. 이들은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그가 곧 중종이다.

멀쩡한 왕을 반역을 통하여 몰아냈으니, 반역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몰아낸 왕의 온갖 실정이 부각되어야 했다. 당연히 연산군이 운용했던 여악제도가 도마 위에 올랐고 연산군의 황음(荒淫) 무도(無道)함과 나라에 끼친 폐해가 《연산군일기》의 마지막 장과 《중종실록》첫 장에 열거되었다.

 

【시녀 및 공·사천(公私賤)과 양가(良家)의 딸을 널리 뽑아 들이되, 사자(使者)를 팔도에 보내어 빠짐없이 찾아내어 그 수효가 거의 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의 급사(給使), 수종(隨從)과 방비(房婢)라고 일컫는 자도 그 수와 같았으며, 7원(院) 3각(閣)을 설치하여 거처하게 했는데, 운평(運平)·계평(繼平)·채홍(採紅)·속홍(續紅)·부화(赴和)·흡려(洽黎) 따위의 호칭이 있었으며, 따로 뽑은 자를 흥청악(興淸樂)이라 하고 악에는 세 과(科)가 있었는데, 굄을 거치지 못한 자는 지과(地科)라 하고 굄을 거친 자는 천과(天科)라 하며, 굄을 받았으되 흡족하지 못한 자는 ‘반천과(半天科)라 하고, 그중에서 가장 굄을 받은 자는 작호를 썼는데, 숙화(淑華)·여원(麗媛)·한아(閑娥) 따위의 이름이 있으며, 그 기세와 굄이 전 숙원이나 장소용과 더불어 등등한 자도 또한 많았다.】[《연산군일기》 연산 12년 9월 2일]

 

같은 날인 중종 1년 9월 2일의 《중종실록》에는 더 길고도 장황한 기사가 실려 있다. 9월 3일, 박원종 등은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사항을 중종에게 건의하는데 여기에 여악에 대한 조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폐주(廢主)를 강봉(降封)하여 군(君)으로 삼는 것을 노산군(魯山君)의 예와 같이 하고, 폐주의 후궁으로 봉작(封爵)된 자는 따로 둘 것이며, 여러 원(院)의 가흥청(假興淸), 운평(運平) 등은 아울러 석방하소서. 오직 취홍원(聚紅院)의 흥청만은 뇌영원(蕾英院)으로 옮겨 내었다가, 총애를 받은 자를 분별한 뒤 석방하되, 내탕(內帑)의 보물로서 일찍이 흥청에게 주었던 것을 추심하여 반납하게 한 뒤에 내치소서.“】

 

여기서 ‘폐주(廢主)’란 연산군이고, ‘노산군(魯山君)의 예’란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위하여 상왕(上王)으로 삼았다가 다시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강원도 영월(寧越)로 내쫓았던 일을 가리킨다. 연산군은 9월 2일 폐위된 직후 강화 교동현(喬桐縣)에 안치(安置)되었다.

 

여악을 해산하되, 취홍원(聚紅院)에 머물고 있던 흥청들은 따로 모아 조사해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않은 자들만 골라내어 연산군으로부터 사사로이 받은 재물을 모두 내어놓게 한 뒤에 석방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취홍원은 창덕궁 명정전과 창덕궁 선정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흥청의 대표적 거처였고, 뇌영원은 예종의 둘째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을 징발하여 만든 가흥청의 거처였다. 중종은 신하들의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여기(女妓)들은 모두 원래 속해있던 관아로 돌려보내졌다. 그 가운데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밝혀진 23명의 흥청들은 장(杖) 1백대를 친 뒤 모두 먼 변경 고을에 배속시켰는데, 기녀의 일은 하지 못하게 하고 포(布)를 바치는 것으로 신역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는 비록 폐위되었지만 왕이 가까이 했던 기녀를 일반 사대부들이 가까이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연산군이 총애하였던 후궁들인 숙용(淑容) 장녹수(張綠水), 숙용(淑容) 전전비(田田非), 숙원(淑媛) 김귀비(金貴非) 등은 이미 반정 다음 날인 9월 2일에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 때의 여악에 관련한 일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궁중의 외연(外宴)에는 여악 대신 남악(男樂)을 써야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남정(男丁)을 구하기도 어렵고 관복 마련도 쉽지 않다는 이유로 미뤄지다가, 중종 5년인 1510년에 이르러서 정대업(定大業), 보태평(保太平) 등의 춤을 악공이 익혀 추도록 하는 방안이 거론되었다. 이때에는 서울의 경기(京妓) 숫자가 70명으로 대폭 줄어, 정대업 공연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 정도만 남겨둔 상태였는데, 궐원(厥員)이 생기는 때를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잠시 거론되었지만 실행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이후 중종 때 새롭게 조정에 진출한 사림파들이 여악 혁파를 끈질기게 주장하여, 서울을 제외한 외방(外方)에는 여기를 모두 없애고 남악만을 두는 안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여악 폐지를 주장했던 사림파들이 기묘사화로 축출되면서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지금 시각에서는 누가 음악을 담당하는가를 두고 왕을 비롯한 온 조정이 나서서 논란을 벌인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예기(禮記)』에 ‘예(禮)로써 세상의 질서를 구현하고 악(樂)으로써 세상의 조화로움을 꾀한다’고 했고, 조선은 이런 예악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대표적 음악이 궁중음악이었다. 따라서 궁중음악은 의례를 행할 때 수반되는 행위로, 단순한 음악이 아닌, 예 또는 의례의 일부였다.

그런 관점에서 남성들이 주축이 되는 왕실의 의례에서 여성이, 그것도 기예를 전문으로 하는 기녀가 참여한다는 것이 과연 ‘의례 수행의 담당자’로서 적합한가 하는 논란이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따라서 여악에 대한 논란은 조선 초기부터 계속 있어 왔었다. 여악과 남악에 대한 논란과 더불어 기생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된다는 논란도 줄기차게 제기되었었다.

 

세종 때에 김종서(金宗瑞)가 여악의 폐지를 주장한 내용을 보면 여악 폐지를 주장하는 유교적 사고의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예악(禮樂)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악(樂)을 살펴 정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며, 공자께서도 또한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예악은 중국과도 견줄 만한 것이므로, 옛날에 사신 육옹(陸顒), 단목지(端木智), 주탁(周倬) 등이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예악이 갖추어져 있음을 보고 또한 모두 아름다움을 칭찬하였으나, 다만 여악(女樂)이 섞여 있는 것을 혐의쩍게 여겼습니다. 소신(小臣)의 생각으로는 아악이 비록 바르다고 하더라도 여악을 폐하지 않으면 불가하지 않을까 합니다. 금번 창성(昌盛) 등이 비록 아무런 취할 만한 것도 없는 위인들이오나, 그래도 연회할 때에 역시 말하기를, ‘이와 같은 예연(禮宴)에 어찌 창우(倡優)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한단 말인가.’ 하였으니, 오직 식자(識者)만이 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라면 현우(賢愚)를 물론하고 모두가 여악을 천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말씀하실 때에 반드시 음란한 소리[鄭聲]를 추방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는 곧 성인(聖人)이 행한 징험을 보인 것으로서, 여악을 아악과 섞을 수 없음은 너무나 명백한 일입니다. 소신이 아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정치는 지난 옛날이나 앞으로 오는 세상에 없으리라 봅니다. 예악의 성함이 이와 같은데도 오로지 여악만은 고치지 아니하고 누습(陋習)을 그대로 따른다면 아마도 뒷날에도 능히 이를 혁파하지 못하고 장차 말하기를, ‘옛날 성대(盛代)에도 오히려 혁파하지 못한 것을 어찌 오늘에 이르러 갑자기 혁파하랴. ’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다만 오늘날의 누(累)가 될 뿐 아니라 또 후세에도 보일만한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성(大聖)의 자품으로서 여악의 불가함을 아시면서도, 혹은 군신(君臣)이 같이 연회하는 자리에서 연주하게 하시고, 혹은 사신을 위로하는 연석에서도 쓰시는 것은 대단히 불가한 일입니다. 비옵건대, 크게 용단을 내리시어 오랫동안 쌓인 비루한 풍습을 개혁하여 유신(維新)의 미를 이룩하소서."】[《세종실록》 세종 12년 7월 28일]

▶창성(昌盛) : 중국 명나라의 사신으로 여러 차례 조선을 방문 했다. 세종이 그를 두고 “탐욕하고 완악(頑惡)하며 염치가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행실이 좋지 않았다.
▶창우(倡優) : 가무를 위주로 하는 전문 연희자
▶음란한 소리[鄭聲] : 정성(鄭聲)은 본래는 춘추전국시대 정(鄭)나라의 음악을 가리킨다. 공자(孔子)가 정(鄭)나라의 음악이 아악(雅樂)과 달리 음탕하고 외설스럽다고 비판하면서 이후로는 음란한 악곡이나 노래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세종은 김종서의 건의를 가상히 여기면서도 "여악을 쓴 것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랜데 이를 갑자기 혁파해 버리고 악공(樂工)으로 하여금 등가(登歌)하게 한다면 아마도 음률에 맞지 않아 서로 어긋남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벼이 고칠 수 없다."고 답했다.

김종서는 이에 또 "여악의 누습이 그대로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긋남이 있을지라도 연습하여 완숙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에 같은 자리에 있던 우부대언(右副代言) 남지(南智)가 나서서,

"여악의 폐단은 외방에서 더욱 심합니다. 수령의 하루 사이의 정사에서도 한편으로는 부녀자들로서 절의를 잃은 자를 다스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관기(官妓)로서 사객(使客)을 거절한 자를 다스리고 하니, 어찌 정사를 본다면서 이와 같이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또 사림(士林)들 사이의 시기와 혐의가 흔히 이것 때문에 일어나고 있사오며, 남녀의 분별도 이것 때문에 어지럽게 되고, 치화(治化)도 이것 때문에 잘되지 않고 있사오니, 결코 작은 실책(失策)이 아닙니다. 또 큰 고을에는 그 수효가 1백 명에 이르고 있어 놀고먹는 폐단도 적지 아니하오니, 마땅히 관기(官妓)를 혁파하여 성치(盛治)의 실책(失策)을 제거하소서." 하며 아예 기녀(妓女)제도 자체를 없애자는 건의를 올렸다.

▶우부대언(右副代言) : 조선 초기 승정원에 소속된 정3품 관직. 이 당시 김종서는 좌부대언(左副代言)이었다. 부대언(副代言)은 뒤에 부승지로 바뀌었다.

 

김종서가 여악이 예악(禮樂)으로서 적당하지 않다는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했다면, 남지는 기녀들로 인하여 발생하는 현실적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두 사람이 제기한 이슈들은 이후에도 여악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반복해서 제기되었다. 때로는 관기 차출로 인하여 관노(官奴)의 숫자가 부족하여지는 문제, 기녀와 얽힌 관리 또는 사대부들의 도덕적 타락 등도 여악 폐지를 주장하는 논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종서와 남지의 여악 폐지 주장은 또 다른 부대언(副代言)인 윤수(尹粹)의 한마디에 의해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옛말에 이르기를, ‘기생이란 군사로서 아내가 없는 자들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사온데, 우리나라가 동남으로는 바다에 임하고, 북쪽으로 야인(野人)들과 연접하고 있어 방어(防禦)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사오니, 여악을 어찌 갑자기 혁파하오리까."】

 

윤수가 국경을 지키는 극변(極邊)에 근무하는 무관들의 편의를 위하여 제공되는 방직기(房直妓)의 필요성을 들어 여악폐지를 반대한 것이다. 궁중 여악의 문제가 변방 방직기의 문제로 귀결되는 논리가 의아하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여악제도를 기녀제도와 같은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조선 내내 여악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음에도 끝내 여악이 조선말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논리가 최후의 보루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내연(內宴)과 외연(外宴)에 모두 여악(女樂)을 썼다. 내연(內宴)은 대비나 왕비 중심의 내명부(內命婦)를 위해서 내전(內殿)에서 베푸는 잔치이고, 외연(外宴)은 왕을 비롯하여 왕세자와 문무백관 등이 참석하는 외회례연(外會禮宴)과 외진연(外進宴), 외국 사신을 위한 사객연(使客宴)을 가리킨다.

장악원에 8세에서 15세 사이의 남자 아이로 여악을 대신하여 춤추는 역할을 담당하던 무동(舞童)을 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춤을 배워 활용할 수 있는 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오래 유지될 수가 없었다. 무동이 성인이 되는 순간 더 이상의 효용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기해기사계첩(己亥耆社契帖)」中 <기사사연도(耆社私宴圖)> 부분, 1719년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내린 연회를 그린 그림의 일부로 무동들이 처용무를 추고 있다.]

 

조선시대에 여악이 일시에 중지된 시기가 있기는 했었다. 선조 때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7년간 전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이 죽어나가는 마당에 기악(妓樂)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녀와 악공도 모두 흩어져버렸다. 이때에 여악이 중지된 일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직 왜란이 끝나지 않은 1598년 2월에 사헌부에서 김류(金瑬)라는 종9품관직의 관리가 공무로 충주(忠州)에 내려갔다가 자신의 아버지 김여물(金汝岉)이 전사한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기생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면서 술을 마셨다며 관리의 명부(名簿)에서 삭제시켜야 한다는 탄핵이 올라왔다.

 

이 말을 들은 선조는 기가 막힌 듯

"이런 때에 외방에도 기악(妓樂)이 있는가?"라고 묻고는 이런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전에 듣건대 외방 수령들이 풍악을 베풀고 잔치를 열고 있는데 혹 봉사자(奉使者)도 그렇게 한다고 하니, 그들의 심술(心術)이 극히 해괴하고도 경악스럽다. 대간이 논하기 전에는 한 사람도 금하기를 청하는 자가 없어 항상 혼자서 탄식이 절실하였다. 이런 때에 나라 안에 어찌 기악을 둘 수 있겠는가. 육진(六鎭)·만포(滿浦)를 제외하고는 모두 혁파하고 통렬히 금지하되 어기는 자에게는 윤상(倫常)을 패란시킨 율(律)로 논할 것을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선조실록》 선조 31년 2월 18일]

 

김류(金瑬)의 일은 몇 년 뒤 무고(誣告)로 밝혀졌지만, 결국 이 일로 인하여 서북 변방지역 외에는 기악을 모두 금하는 조처가 내려졌다. 서북 변방지역을 제외한 이유는 그 지역의 방직기(房直妓)를 없앨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선조는 죽을 때까지 궁중에서 여악을 베풀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8년 뒤인 선조 39년에 선조 등극 40주년을 축하하는 축하연을 열기 위해 장악원에서 여악을 복구시키자고 요청했지만 선조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선조의 이러한 명령과 솔선수범에도 불구하고 왜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방에서는 기녀들의 악가무(樂歌舞)가 행해졌고, 서울에서는 장악원 악공들이 사적인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들이 일어났다.

선조 35년인 1602년의 《선조실록》 기사에 선조가 영의정, 우의정과 나눈 대화의 일부다.

 

【“장악원(掌樂院)을 신설한 것은 종묘·사직의 향사(享祀)의 음악을 위해서였는데 요즘 경중(京中) 사람들은 연음(宴飮)을 마음대로 하므로 적은 숫자의 악공(樂工)을 곳곳에 배정하여 보내고 있으며, 외방에서도 기악(妓樂)을 복구 시켰다고 합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감히 이 같은 일을 한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중에서는 요즈음도 연악(宴樂)을 하는가?"

하자, 영경이 아뢰기를,

"연악을 하는 자가 즐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후로 경중은 사헌부로 하여금 엄금토록 하고, 외방은 감사가 적발하여 아뢰게 하라."】

 

선조 때에 중지되었던 여악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위한 진풍정(進豊呈)을 계기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인조정란 직후, ‘태평 성세가 아닌 때에 광해군이 여악(女樂)을 다시 설치하여 황란(荒亂)이 극에 이르게 되었다‘는 비난과 함께 여악은 다시 혁파되었다.

아울러 왕이 궁 밖으로 나갔다 돌아올 때 공연되던 교방가요(敎坊歌謠)에 사용되는 무구(舞具)인 침향산(沈香山)을 네거리에서 불태우는 퍼포먼스도 거행하였다.

 

[『악학궤범』에 실린 침향산을 옮겨 그린 그림. 나무판자로 산 모양을 만든 뒤, 앞면과 뒷면에 피나무로 산봉우리를 조각하여 붙이고 사찰과 탑, 부처와 승려, 고라니와 사슴 등의 잡상을 설치하여 채색하였다. 침향산을 배경으로 학무와 연화대를 공연하였다.]

 

하지만 인조는 서울에 거주하는 기녀인 경기(京妓)를 없앴을 뿐, 실제 여악을 폐지하지는 않았다. 바로 다음 해인 인조 2년 10월 14일의 《인조실록》기사에는 시독관 이윤우(李潤雨)가 인조에게 "각 고을의 창기(娼妓)가 서울에 올라온 것은 오로지 풍정(豐呈)의 큰 예식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풍정이 이미 끝났는데도 파하여 보내는 일이 없으니, 신은 질탕하게 마시고 놀며 나태하게 될 조짐이 이로 인해 생겨나 막기 어렵게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라고 아뢰는 대목이 나온다. 풍정에 선발되어 올라온 기녀가 130명이었는데 풍정이 끝난 후 50명만 돌려보내고, 80명은 이듬해 봄에 또 다른 잔치가 있다는 이유로 붙잡아 둔 것을 지적하는 발언이었다.

 

인조 이후로 공식적으로는 서울에 기녀가 없어졌다. 궁중의 여악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지방에서 올라온 선상기(選上妓)들이 담당했다. 물론 약방기생으로 불리던 혜민서와 내의원 의녀(醫女)와 공조 상의원의 침선비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장악원에 소속된 경기(京妓)는 모두 해체되었다. 이런 체제는 조선말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상기 중에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참조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妓役의 실태(정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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