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8 - 공물(公物)

從心所欲 2021. 5. 4. 11:33

연산군의 여악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특별한 관심과 행각을 후대는 흔히 그의 황음무도(荒淫無道)함에만 초점을 맞추어 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금 색다른 해석도 있다. 사대부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확실히 하기 위한 행위로 보는 시각이다. 그렇다고 연산군의 방종과 음란함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두 요인이 합쳐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꽤 흥미가 있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폐모사건에 대한 보복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왕을 능멸한다는 ‘능상(菱狀)’에 대한 분노로 신하 전체를 대상으로 학살과 다름없는 짓을 자행한 갑자사화 즈음에 연산군의 여악 챙기기가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여악 또는 기생은 국가의 소유물이었다. 그래서 기생이나 여기(女妓)를 가리켜 공물(公物)이라는 표현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사람을 물건 취급한다는 것은 요즘 관점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랬다. 애초에 기생은 관의 노비(奴婢) 가운데 선발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노비들은 그 수를 나타낼 때도 ‘인(人)’자 대신에 ‘구(口)’자를 썼다. 즉, 노비 5인(人)이나 5명(名)이 아니라 5구(口)라고 했다.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그런 노비

가운데 뽑힌 기생도 여전히 노비나 다름없는 신분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연산군은 기생들이 국가의 재산임을 계속 강조했다.

 

【전교하기를,

"여기(女妓)는 공물(公物)임에도 여기의 지아비들이 숨기고 드러내놓지 않으므로 이미 합번(合番)하게 하였거늘,

법이 세워진 지 얼마 안 되어 예조(禮曹)가 분번(分番)하여 음악을 익히기를 아뢰었음은 매우 옳지 않으니, 국문하라.

또 승정원은 어찌하여 적간(摘奸)하지 않았는가? 아울러 국문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 10년 6월 24일]

▶합번(合番) : 근무하는 차례가 다른 패(牌) 둘 이상이 한꺼번에 번(番)을 드는 일.

 

【전지(傳旨)하기를,

"기생이란 것은 국가의 공물인데, 종친 또는 조사(朝士)들이 차지하여 자기 것으로 하고, 공가(公家)의 연회에도 또한

더러 나오지 않으니, 기생을 두어 음악을 익히게 하는 뜻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때때로 적간(摘奸)하여 근만(勤慢)을

고찰하도록 하는데, 그 지아비가 혹 이로 인하여 원망과 분심을 품고 비방하는 말을 조작하는 자가 있고, 창기도 또한

노고를 꺼려 신소(申訴)하는 자가 있다. 이런 풍습이 번지는 것을 버려둘 수 없으니, 효유하여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 10년 9월 1일]

▶조사(朝士) : 조정에 몸을 담고 있는 신하. 조신(朝臣).
▶적간(摘奸) : 난잡(亂雜)한 죄상이 있는지를 살피어 조사함.
▶신소(申訴) : 고하여 하소연하다.

 

뿐만 아니라 연산군은 기녀는 신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왕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전교하기를,

"전일에 여기(女妓)는 군사(軍士)를 위하여 설립한 것이라고 말한 자가 있었으나, 참으로 온당하지 못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뽑힌 기(妓)는 조연(雕輦)을 따르며, 부르는 노래는 동방(洞房)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임금을 위하여 말함이다. 어찌하여 군사를 위하여 베풀었다 하랴. 기(妓)란 관가(官家)의 것이니, 아랫사람이 마음대로

차지할 수 없다. 앞으로는 비록 첩(妾)을 삼았을지라도 주악(奏樂)할 때에는 반드시 오게 하고 숨기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 11년 1월 1일]

▶조연(雕輦) : 천자가 타는 수레
▶동방(洞房) : 집안 깊은 곳에 있는 방. 잠자는 방.

 

연산군의 이러한 발언이 사대부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궁중 여악은 왕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일찍부터 확고했던 것 같다.

 

【성준(成俊)이 또 아뢰기를,

"조종부터 모화관(慕華館)에서 사대(査對)할 때와 훈련원(訓鍊院)에서 도시(都試)할 때에는 반드시 술과 풍악을 하사(下賜)하였으니, 사신을 위로하고 노성(老成)한 신하들을 우대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악(女樂)은 하사하지 않고 다만 남악(男樂)만 하사하는데, 우리나라는 보통 여악만 쓰고 남악은 기뻐하지 않은 까닭으로 무릇 향당(鄕黨)에서 잔치를 베풀 때에는 반드시 기녀(妓女)를 불러서 손님을 즐겁게 합니다.

지금 비록 술을 내려주더라도 쓸쓸하게 즐거움이 없으므로, 마셔도 취하게 되지 않는다면 위로하는 의의가 아니니 조종 때의 고사를 따르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대체로 조관(朝官)들이 기녀에 대하여 그들을 담담하게 보지 않으니, 한자리에 섞여 있게 할 수 없소. 또 항상 왕래하는 기녀로써 친구를 위하여 사사로이 서로 불러들이는 것은 오히려 괜찮다고 하겠으나, 집 밖에서는 비록 남악이라도 또한 취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오. 경(卿)의 아뢴 바와 같다면 사대나 도시 때에는 모두 여악을 하사하고, 내가 친히 거둥하는 전시(殿試) 때에는 쓰지 말라는 것이오?"】  [《연산군일기》연산 8년(1502년) 10월 28일]

▶모화관(慕華館) : 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
▶사대(査對) : 중국에 보내는 표(表)와 자문(咨文)을 살피어 틀림이 없는가를 확인하던 일.
▶도시(都試) : 병조(兵曹)·훈련원(訓鍊院)의 당상관(堂上官)이 해마다 봄과 가을에 무재(武才)를 시험하여 뽑던 과시(科試).
▶남악(男樂) : 외빈(外賓)만 모여 있는 진연(進宴)에 무동(舞童)에게 시키던 정재(呈才).
▶전시(殿試) : 조선시대 문과, 무과의 과거시험 마지막 단계로, 왕이 직접 참석하여 복시에서 선발된 문과 33인, 무과 28인 합격자들의 등급을 결정하는 시험.

 

신하들에게 여악을 내려달라고 청한 성준(成俊)은 당시 좌의정으로 나이가 67세였다. 그런 노대신의 청을 연산군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면박을 주었다. 연산군은 신하들이 기녀들을 사적인 자리에 부르는 것은 상관없지만, 여악은

내려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만큼 연산군은 여악이 왕을 위한 행사라는 인식이 강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연산군은 기녀와 음행에 빠지는 가운데도, 여악의 공연 수준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잔치를 파한 뒤 승지 이계맹(李繼孟)에게 전교하기를,

"기생들이 북치는 것이 음절에 맞지 않으므로 물어본즉, 북치기는 연습을 하는 자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평시에

어찌 북치기는 연습을 많이 시키지 않았는가?"

하였다. 계맹이 아뢰기를,

"해당 관원을 국문하고, 또 다수가 북치기를 연습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그리 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연산 10년 5월 26일]

 

【전교하기를,

"기녀들이 주악(奏樂) 때에 지나치게 음률을 몰라서 잡되게 연주하여 절도가 없음은 매우 옳지 못하니, 해관(該官)에게 일러서 그러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 10년 7월 15일]

 

뿐만 아니라 노래 부를 때에 항상 수심에 찬 얼굴을 하고 노래도 화한 음성이 없다 하여 기녀를 변방으로 쫓아 보내기도 하고, 진연(進宴) 때에 마음 써 노래 부르지 않았다고 국문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기녀들의 옷차림에도 엄격하였다.

 

【장악원 제조 임숭재(任崇載)가, 풍악을 연주한 기녀 중 곱게 단장하지 않은 자 9인을 적어 아뢰니, 전교하기를,

"잔치가 파한 뒤 금부에 가두라."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 10년 5월 26일]

 

【의장(衣粧)이 깨끗하지 못한 여기(女妓)의 추안(推案)에 판하(判下)하기를,

"장(杖) 80으로 결단하라. 가난할지라도 어전에서 그래서는 안 되리니, 그 지아비도 아울러 국문하여 죄주라.“】

[《연산군일기》연산 10년 6월 1일]

▶추안(推案) :추국 문안(推鞫文案). 왕명에 의하여 죄인을 신문하고 왕에게 보이기 위하여 그 문답 등 경과 사항을 기록한 문서.
▶판하(判下) : 신하가 상주(上奏)한 안건에 대하여 임금이 검토하여 그 가부를 재가(裁可)하는 것

 

【전교하기를,

"예조 및 장악원으로 하여금 기녀의 복장을 점검하여 문부에 기록하되, 아무 기녀의 지아비 아무가 아무 색 옷을 장만하였었다고 하여, 뒤에 만약 더럽거든 처벌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연산 10년 7월 7일]

 

[화성원행의궤도 中 여악의 복장 부분: 단의(丹衣), 홍라상(紅羅裳), 화관(花冠), 붉은 비단 속옷 바지인 홍초말군(紅綃袜裙), 오채한삼(五彩汗衫), 황초삼(黃綃衫), 긴 치마 위에 겹쳐 입는 앞치마인 홍초상(紅綃裳), 수를 놓은 띠인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 등. 신발은 통상 녹색의 가죽신인 초록혜(草綠鞋)를 신었다.]

 

[화성원행의궤도 中 채화도(綵花圖) : 채화도는 연향에 사용되는 각종 꽃 장식을 그린 그림이다. 머리에 꽂는 각종 잠화(簪花), 큰 화병에 꽂는 준화(樽花), 상 위에 올려놓는 상화(床花)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꽃 장식은 모두 조화(造花)로서 천이나 밀납, 종이 등의 재료로 만들어졌다]

 

여악에 대한 연산군의 이러한 관심은 그동안 단순히 연산군의 음행(淫行)을 부각시키는 관점에서만 조명되었지만,

분명 왕을 위한 여악은 그에 걸맞은 나름의 격조를 갖추어야 한다는 연산군의 의식과 의지에서 비롯된 측면도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국가의 공물인 기녀를 양반 사대부들이 마음대로 사유화하여 기녀들이 담당해야 할 기역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 대하여 상당한 불만이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승지 이계맹(李繼孟)이 아뢰기를, "연향(宴享)할 날이 가까워졌으니, 전일의 하교대로 기생·악공들을 검열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주서 윤귀수(尹龜壽), 내관 김새(金璽)에게 명하여 함께 장악원에 가서 점검하게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관기(官妓)는 길가의 버들이나 담 밑의 꽃 같아서 사람마다 꺾을 수 있는 것이나, 집에 데려다 첩을 삼을 수는 없다.

가령 민가에 음률(音律)을 아는 비자(婢子)가 있더라도 나라에서 연향 때 쓰려고 한다면 숨기지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 공공 물건이겠느냐. 이 뒤로는 어느 기생은 누구에게 시집가고, 어느 기생은 서울 어느 방(坊)에 살며, 어느 기생은

외방 어느 곳에 사는지, 본원(本院) 장부에 기록하여 두고, 만일 숨기고 내놓지 않는 자가 있으면 장부를 상고하여

죄주게 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연산 10년 5월 5일]

 

【전교하기를,

"전일 사비(私婢)로서 음률 아는 자를 녹계(錄啓)하도록 명하였으나, 제조(提調) 등이 비호하느라 즉시 아뢰지 아니하니, 이는 불가한 일이다. 대저 온 나라 안에 왕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는 것인데, 어찌 내 노비라고 하여 국가의 명령을 좇지 않는 것인가. 외방 기생으로 자색이 있고 음률 아는 자를 조관(朝官)들이 다른 일로 핑계하고 자기 것으로 삼기 때문에 음률을 아는 자가 적으니, 더욱 불가한 일이다. 승지 강혼(姜渾)을 시켜 전지(傳旨)를 지어 중외(中外)에 통유(通諭)하여 찾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그 전지에 이르기를,

"아랫사람으로서 위를 받드는 것은 신자(臣子)의 직분이니, 남의 신하가 되어 자기의 사유(私有)라고 하여 군상(君上)을 받들지 않는 것도 이미 잘못이거늘, 하물며 공물(公物)을 차지하여 사유(私有)로 함이겠는가. 지난번 장악원에 하유(下諭)하여 도성 안 사천(私賤) 중에 음률을 잘 알아 어전(御前) 정재(呈才)에 충당할 만 한 자를 찾아서 아뢰도록 하였는데,

어찌 그런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받들어 시행하지 못하겠는가. 이는 반드시 그 주인 된 자가 봉상(奉上)하기를

싫어하고 관리된 자가 그 청촉을 들어주어 그런 것이리라.

또 듣건대 외방 창기(倡妓) 중에 재주와 용모가 다소 그럴 듯한 자는, 조관들이 혹은 공신(功臣)의 노비로 핑계하고, 구사(丘史) 노비 및 봉족(奉足)으로 핑계하며, 혹은 경주인(京主人)·경방자(京房子)·경비(京婢)로 뽑아 올린 여기(女妓)·악공(樂工) 등의 봉족으로서 관비(官婢)로 가칭(假稱)하여 첩으로 차지하니, 이로써 나이 젊고 장래가 있는 자는 거개 사가(私家)로 돌아가고,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용모가 추한 말기(末妓)로서 선발에 충당될 만한 자가 없다.

 

영악(伶樂)의 조잔함이 실로 이 때문이니, 자못 아랫사람으로서 위를 받드는 뜻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중외에 효유하여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혹시라도 새 법을 꺼려 원망하는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스스로 대벽(大辟)의

율을 받게 되리라."하였다.】 [《연산군일기》연산 10년(1504년) 10월 13일]

▶영악(伶樂) : 악공(樂工)이 연주하는 음악. 여기서는 여악(女樂)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벽(大辟) : 사형

 

 

 

참고 및 인용 :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16세기 초엽 기녀제도 개편 양상(조광국, 규장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