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여악제도는 연산군 대에 이르러 대전환을 맞는다. 연산군은 궁중의 악제를 개편하여 여악을 둘로 나누어 각기
흥청(興淸)과 운평(運平)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면서 "소위 흥청(興淸)이란 사예(邪穢)를 깨끗이 씻으라는 뜻이요(所謂興淸 乃蕩滌邪穢之意也), 운평(運平)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모든 악공(樂工)과 악생은 모두 광희(廣熙)라고 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모든 여기(女妓)를 운평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연산군이 여악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갑자사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연산군 10년인 1504년이었다.
【전교하기를,
"기녀는 곧 어전에서 정재(呈才)하는 사람이니, 모름지기 젊고 모습이나 얼굴이 좋은 자를 가려서 문적(文籍)에 두어야 하며, 음률을 알더라도 얼굴이 못났으면 뽑아서는 안 되리라. 외방에 반드시 얼굴이 아름다운 자가 있을 터이거늘, 수령(守令)이 식년 선상(式年選上)때에 자색(姿色)이 있는 자는 숨기어 보내지 않고 못생기고 늙고 재주 없는 자만을 올려 보내니, 위를 위하는 뜻이 아주 없다. 대저 계절의 물건이 맛있으면 위에 바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이니, 위를 위하는 일은 본디 이러하여야 한다. 대저 선비가 비록 재주가 많더라도 심술이 착하지 않으면 등용하기에 족하지 못한 것이니, 이름은 기녀일지라도 재주와 용모가 없으면 또한 무엇에 쓰랴. 외방으로 하여금 식년을 기다리지 말고 별례(別例)로 선상하게 하되 숨기는 자가 있거든 그 수령을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로 논죄하고, 예조(禮曹)·장악원(掌樂院)의 관원으로서 사사로이 청탁을 받아들여서 바치거나 물리는 자도 아울러 죄를 다스리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 10년(1504년) 7월 15일]
▶식년선상(式年選上) : 식년(式年)은 정해진 해라는 뜻이고, 선상(選上)은 뽑아 올린다는 뜻이다. 지방에서 여기(女妓), 의녀(醫女), 연화대(蓮花臺)로서 연소(年少)한 비(婢)를 선발하여 3년마다 대궐로 올려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 : 임금이나 세자가 조서로 내린 명령을 손괴시키는 죄를 처벌하던 중국 명나라의《대명률(大明律)》 법규.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이라고도 한다. |
【전교하기를,
"전일 사비(私婢)로서 음률 아는 자를 녹계(錄啓)하도록 명하였으나, 제조(提調) 등이 비호하느라 즉시 아뢰지 아니하니, 이는 불가한 일이다. 대저 온 나라 안에 왕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는 것인데, 어찌 내 노비라고 하여 국가의 명령을 좇지 않는 것인가. 외방 기생으로 자색이 있고 음률 아는 자를 조관(朝官)들이 다른 일로 핑계하고 자기 것으로 삼기 때문에 음률을 아는 자가 적으니, 더욱 불가한 일이다. 승지 강혼(姜渾)을 시켜 전지(傳旨)를 지어 중외(中外)에 통유(通諭)하여 찾아내도록 하라."하였다.
그 전지에 이르기를,
"아랫사람으로서 위를 받드는 것은 신자(臣子)의 직분이니, 남의 신하가 되어 자기의 사유(私有)라고 하여 군상(君上)을 받들지 않는 것도 이미 잘못이거늘, 하물며 공물(公物)을 차지하여 사유(私有)로 함이겠는가. 지난번 장악원에 하유(下諭)하여 도성 안 사천(私賤) 중에 음률을 잘 알아 어전(御前) 정재(呈才)에 충당할 만한 자를 찾아서 아뢰도록 하였는데, 어찌 그런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받들어 시행하지 못하겠는가. 이는 반드시 그 주인 된 자가 봉상(奉上)하기를 싫어하고 관리된 자가 그 청촉을 들어주어 그런 것이리라.
또 듣건대 외방 창기(倡妓) 중에 재주와 용모가 다소 그럴 듯한 자는, 조관들이 혹은 공신(功臣)의 노비로 핑계하고, 구사(丘史) 노비 및 봉족(奉足)으로 핑계하며, 혹은 경주인(京主人)·경방자(京房子)·경비(京婢)·뽑아 올린 여기(女妓)·악공(樂工) 등의 봉족으로서 관비(官婢)로 가칭(假稱)하여 첩으로 차지하니, 이로써 나이 젊고 장래가 있는 자는 거개 사가(私家)로 돌아가고,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용모가 추한 말기(末妓)로서 선발에 충당될 만한 자가 없다. 영악(伶樂)의 조잔함이 실로 이 때문이니, 자못 아랫사람으로서 위를 받드는 뜻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중외에 효유하여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혹시라도 새 법을 꺼려 원망하는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스스로 대벽(大辟)의 율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 10년 10월 13일 기사]
▶녹계(錄啓) : 적어서 보고하다. ▶조관(朝官) : 조정(朝廷)에 출사(出仕)하여 정무(政務)를 담당하는 관원(官員). ▶구사(丘史) : 임금이 종친(宗親)이나 공신(功臣)에게 내려 주던 관노비(官奴婢) ▶대벽(大辟) : 사형 |
이런 연산군의 명령에 장악원 제조(提調)를 맡고 있던 이계동(李季仝)과 임숭재(任崇載)는 왕에게 이렇게 건의를 올렸다.
【"나이 젊고 영리하며 자색 있고 음률을 해득하는 기녀들을 이미 간택하였는데, 그중에 지아비와 자식이 있는 자는 간택하지 말라 하시니, 이와 같이 하면 간택될 자의 수가 적을 것입니다. 기녀들은 비록 지아비가 있다 할지라도 본래 완전한 지아비가 아니고 비록 자식이 있다 할지라도 나이가 모두 한두 살이며, 기녀들은 그 자녀를 보통 사람과 같이 애양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오직 나이가 15세 이상 25세 이하의 재주와 자색이 있는 자만 뽑는다면 많은 수를 얻기가 쉽지 않으나, 만약 연령을 제한하지 아니하면 많이 얻을 것입니다."】[《연산군일기》 연산 10년 12월 8일]
연산군은 처음에는 흥청 300명, 운평 700명으로 정원을 정하였다가 다시 운평의 정원을 1,000명으로 늘렸다. 흥청(興淸)은 운평(運平) 중에서 선발한, 말하자면 최정예 여악으로, 재기(才氣)와 함께 외모가 뛰어난 여악들이 선발되었다.
그리하여 각 고을에 인원을 배정하여 뽑아 올리게 했는데 운평과 광희는 거의 인원수가 채워졌지만 흥청의 경우는 이듬해 4월까지도 정해진 인원수의 1/3밖에 채우지 못하였다. 또한 뽑아 올린 운평들의 자질에도 문제가 발견되자 또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전교하기를,
"팔도에서 광희악으로 재주가 있는 자를 바삐 간택하라. 또 금번에 온 운평은 그 수는 많으나 재주 있는 자가 적으니, 빠짐없이 다시 가리고, 비록 운평이 아니라도 각 고을의 나이 젊고 자색이 있는 관비(官婢)는 아울러 간택하여, 모두 단오(端午)까지 올려 보내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4월 16일]
그러나 왕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지방 관기의 재원이 고갈되어 더 이상의 충원이 어려워지자, 연산군은 전국에 채홍준사(採紅駿使)라는 이름으로 중앙의 벼슬아치들을 파견하였다.
채(採)는 선택하다, 홍(紅)은 여자(女子), 준(駿)은 좋은 말[준마(駿馬)]을 뜻한다. 연산군은 미녀와 함께 좋은 말을 선발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연산군은 장악원의 제조였던 이계동을 전라도에, 임숭재를 경상도와 충청도에 각각 보낸 것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 채홍준사를 파견하였다. 채홍사 가운데 실적이 우수한자에게는 벼슬은 물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는 상을 주었다. 이런 채홍사 가운데 그 실적이 가장 뛰어났던 자는 조선시대 간신의 대명사로 불리며, 갑자사화의 불씨를 제공했던 임사홍(任士洪)이었다. 그는 자그마치 3천여 명의 운평을 차출하였으며, 그 공로로 포상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연산군은 기존에 기생이 없던 고을까지도 기생을 새로 뽑아두어 운평 선발에 필요한 자원을 미리 준비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각도(各道)의 운평(運平)이 없는 각 고을에서는 고을마다 새로 설치하고, 운평의 수 및 나이·부모·동기[同生]를 상세히 갖추어서 개록(開錄)하여, 수령(守令)이 감사(監司)에게 신보(申報)하고, 감사가 마감(磨勘)하여 계문(啓聞)하여, 계하(啓下)하거든, 장악원(掌樂院)은 명부를 3벌 만들어 하나는 대내(大內)에 들이고 하나는 승정원(承政院)에 두고 하나는 본원(本院)에 두어서, 뒤에 상고할 적에 증빙(證憑)으로 하라. 죽은 자가 있거든, 본관(本官)의 수령이 친히 검시(檢屍)하여 감사에게 신보하고, 감사가 계문하여 삭안(削案)하라. 도망하는 자가 있거든, 삼절린(三切隣)은 정상을 알았건 몰랐건 물론하고 모두 장형(杖刑)에 처하여 전가 사변(全家徙邊)하고, 색리(色吏)는 엄중히 죄주고, 수령 및 감사도 아울러 결죄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9월 16일]
▶전가 사변(全家徙邊) : 조선시대 죄인을 그의 전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한 형벌. ▶삼절린(三切隣) :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이 일어난 곳에서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이웃의 세 집, 혹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 ▶색리(色吏) : 일정한 일을 맡았거나 또는 책임을 맡은 아전 |
이렇게 하여 연산군 말기에 이르면 전국 각지에서 차출된 여인이 무려 1만여 명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다. 그들이 다 한성으로 불러올려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수천 명이 한성에 올라왔고, 그들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여 종로에서 노숙하다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는 자들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1505년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뇌영원(蕾英院)을 비롯하여 진향원(趁香院), 취홍원(聚紅院), 함방원(含芳院), 사방원(含芳院), 취춘원(翠春院)과 청환각(淸歡閣), 회사각(會絲閣), 채하각(彩霞閣) 등의 이름으로 소위 7원 3각의 처소가 마련되었다.
기생들과 악사들의 수용 및 관리 운용에 소요되는 물품과 비용은 각 도에 할당하여 징수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호화고(護花庫)라는 특별재정기구를 설치하였으며, 이 와중에 고려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왔던 사찰인 종로의 원각사(圓覺寺)는 연방원(聯芳院)으로 이름이 바뀐 장악원 건물로 용도가 변경되고 나중에는 운평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16세기 초엽 기녀제도 개편 양상(조광국, 규장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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