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4 - 약방기생

從心所欲 2021. 4. 9. 16:43

의녀들이 궁중 연회에 의장여령으로 참석하게 된 20여년 후인 1502년 《연산군일기》에는 이런 기사가 올라있다.

 

【서울 안의 각사(各司)에서 공적으로 차린 연회에는 혹은 본사(本司) 혹은 경저(京邸)에서 의녀(醫女)와 여기(女妓)를 불러오게 하니, 이 일로 인하여 각사의 노비들이 피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이와 같은 법을 범한 관리들은 사헌부로 하여금 엄중히 금지시키고 공의에 논할 것 없이 파출(罷黜)시키소서.】 (《연산군일기》연산 8년 1월 28일 기사)

▶파출(罷黜) : 관직에서 파면(罷免)하는 동시에 관등(官等)을 낮춤.

 

이 기사를 통하여 궁중에서의 신역을 담당하기 위해 차출된 여악과 의녀들이 궁궐 행사가 아닌 관청과 지위 있는 자들의 사사로운 행사에 불려 다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의녀들은 본업과는 상관없이 기녀와 같은 역할을 위해 사사로운 자리에 불려가고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시대라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공부하는 의녀들을 잔치자리에 동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는 직업보다는 신분이 더 중시되던 사회였다. 의녀나 기녀나 모두 관비(官婢)가운데 차출되어 여전히 천인과 다름없는 신분이었기에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존중도 없었던 것이다. (하기는 최근에도 병원장인가 이사장인가의 생일이라며 간호사들을 동원하여 재롱잔치를 벌인 병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국가의 입장에서는 사대부들이 의녀를 기녀 취급하든 말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의 재산인 기녀나 의녀를 사사롭게 불러다 쓰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관물(官物)을 유용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이때는 연산군도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 황음(荒淫)에 빠진 연산군은 전혀 다른 명령을 내린다.

 

【전교하기를,

"진연(進宴) 때에는, 의녀(醫女) 80인을 정하게 가려서 예의를 익히고, 재주 있는 여기(女妓)를 옷을 깨끗이 입혀서 어전(御前)의 섬돌 위에 앉히라." 하였다.】 [《연산군일기》연산 10년 6월 13일]

 

왕이 나서서 의녀들을 기녀 취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사대부들이 의녀에 대해 가졌던 인식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지만, 왕이 이러한 조처를 내렸다는 것은 의녀들을 기녀의 일군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을 더욱 부채질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연산군이 물러나고 중종이 즉위한 후에도 의녀를 의기(醫妓)라는 이름으로 조관들의 사적인 연회에 동원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중종 5년인 1510년에 이르러 중종은 이런 명령을 내렸다.

 

【전교하기를,

"금후로 대소 인원의 연회에, 의녀(醫女) 및 창기(娼妓)를 조치하는 자를 통금하고, 헌부(憲府)로 하여금 그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는데, 헌부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단하고, 의녀·창기도 모두 중하게 논단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리하라.’ 하였다.】 [《중종실록》중종 5년 2월 1일 기사]

 

여기서 말하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은 임금의  교지(敎旨)나 세자(世子)의 영지(令旨)를 위반한 자를 다스리는 율(律)로써, 위반한 사람은 장 1백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법률이 아니라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에 규정된 조항이었다.

중종이 내린 전교에 의하여 관리들의 ‘연회에 의녀 및 창기를 금하는 절목‘을 마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관행은 중지되지 않았다.

 

【조관(朝官)들이 의녀(醫女), 기녀를 불러 방종하게 술을 못 마시게 하는 금(禁)형을 거듭 밝히도록 하였다.】[《중종실록》중종 11년(1516년) 11월 14일 기사]

 

【의녀(醫女)를 둔 까닭은 반드시 의술을 정하게 배워서 궁중과 사족(士族)의 집에서 약을 맡아보게 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 사대부의 연회(宴會)에서 여악을 쓰지 않으므로 일체 의녀를 쓰니 의술을 배울 여가가 없습니다.】[《중종실록》중종 12년 8월 25일 기사]

 

[일제강점기에 동궁의 성정각 부속건물로 이전되어 설치된 내의원, 문화유산채널사진]

 

[동궐도 속 원래 내의원이 있던 궐내각사 구역]

 

[궐내각사 지역에서의 내의원 위치]

 

조선시대 의녀로 가장 유명했던 의녀는 드라마로 유명세를 탄 ‘대장금(大長今)’이다. 장금은 중종 때의 의녀였다. 신분이 천했던 만큼 장금의 생졸년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장금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중종 10년인 1515년부터이다.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인종(仁宗)을 낳고 산후증으로 7일 만에 사망하자 약을 잘못 올려 왕후가 죽었다며 장금에게 죄를 주라는 청에 대하여, 중종은 “사람의 사생이 어찌 의약(醫藥)에 관계되겠는가?”라며 오히려 장금을 옹호하였다. 아울러 인종(仁宗)이 무사하게 태어나게 한 공으로 상을 내려야 하지만 왕후가 죽은 일로 인하여 상을 내리지 못했는데 어떻게 형장(刑杖)을 가할 수 있느냐며 벌금을 내는 것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장금은 의술이 뛰어난 의녀(醫女)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역할은 주로 남자 의원이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왕후 등 내명부 왕실 여인들을 진맥하고 병세를 살펴 바깥에 있는 의원에게 전달하고 또 의원이 처방한 진료를 시행하여 그 변화를 다시 의원에게 알려주는 역할이었다. 장금이 독자적으로 의술을 펼친 것은 아니었지만 정확한 증세를 파악하여 전달하는 것과 의원의 처방에 따라 치료를 진행하는 것 또한 의술에 밝지 않고는 해낼 수 없는 역할인데 장금은 이를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그리하여 9년 뒤에는 장금의 호칭이 《중종실록》에 대장금(大長今)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나중에는 중종이 자신의 몸을 대장금에 맡길 정도로 중종의 신뢰를 얻게 되는데, 중종이 승하하는 중종 39년인 1544년까지도 그의 이름이 실록에 오르내린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기록만으로도 30년간을 의녀로 근무했던 것이다.

 

신라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역대 기녀들을 다룬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라는 책이 있다. 학자였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했던 이능화가 저술하여 1927년 간행된 책인데, 이능화는 의녀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의녀는 내의원에 소속되어서 기업(妓業)을 겸행(兼行)했기 때문에 약방(藥房)기생이라 칭했으며, 침선비(針線婢)는 어느 때에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하나 선발한 다음 궁사(宮司)에 이름을 올린 후 침선비라고 이름하였다. 침비(針婢)는 상의사(尙衣司)의 소속이나 기업(妓業)도 하였다. 그 때문에 세속에서 상방(尙房)기생이라 불렀는데, 기녀 가운데는 약방기생과 상방기생이 일류였다.】

 

이능화가 약방기생과 상방기생을 기녀가운데 일류라고 한 근거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탓인지 조정의 계속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대부들이 의녀를 잔치에 불러내는 일은 끝내 근절되지 않았다. 선조 38년인 1605년 4월 10일자 《조선왕조실록》기사이다.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 정창연(鄭昌衍)·송언신(宋言愼)이 아뢰었다.

"의녀(醫女)를 일찍이 해조의 공사(公事)에 의하여 가당한 사람을 초계(抄啓)하여 서울 안에서 징집한 것은 의술을 가르쳐 장차 국가에서 쓰기 위한 것인데, 기강이 해이해짐으로 인하여 사치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여염의 크고 작은 술잔치에 의녀를 불러 모으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상사(上司)에서 그들을 붙잡아 보내는 것을 평시 기생의 규례처럼 끝없이 하였는데, 엄중한 경우에는 차사(差使)가 바로 그 집으로 가서 양처럼 몰아내고, 가벼운 경우에는 본서(本署)에 오도록 하여 죄인처럼 감독하여 내보냅니다.

나이 젊은 기생은 일정한 수가 있는데 이름을 써놓고서 붙잡아 가는 것은 날이 갈수록 많아져 정하여 보내는 첩지가 걸핏하면 권축(卷軸)이 됩니다. 해당 관원이 열심히 명령을 수행하는데도 여기저기서 모욕당하는 것을 면치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의녀의 얼굴을 대하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항상 놀라고 탄식하였지만 또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가르치지 못한 연유를 날마다 개록(開錄)하여 월말에 예조에 자세히 보고하고 예조로 하여금 혹 법사(法司)에 보고하거나 혹 입계하여 추고 치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차사(差使) : 죄인을 잡으러 보내는 하인(下人)
▶첩지가 ~ 권축(卷軸) : 기생을 보내라는 첩지가 쇄도하여 두루마리를 이룰 정도로 많다는 뜻.
▶개록(開錄) : 문서(文書)의 말미(末尾)에 의견 또는 용건을 열기(列記)하는 것.

 

 

참조 :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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