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 ‘기생’은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런 설명을 보면서 ‘기생’에 대해 떠올리는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유녀나 작부 또는 호스티스와 같은 이미지가 떠오를 수도 있고 음식상이 차려진 술자리에서 춤추는 모습이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은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퇴락해가던 시기의 기생의 모습에 더 가깝다.
기생은 매춘부나 창녀처럼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직업이 아니다. 그들은 선발되어 교육받고 훈련되어 탄생한 연예인이자 예술인이었다. 기생(妓生)이라는 한자어는 조선시대 문헌에서 처음 등장한다고 하는데 그 연원을 따지자면 여악(女樂)이다. 여악(女樂)은 한성(漢城)과 지방의 국가기관에서 신역(身役)으로 악기 연주, 노래, 춤을 하는 여자 음악인 또는 그들이 하는 공연을 가리킨다. 여악은 국가적 의식 또는 경축행사에서 행해진 궁중무용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국가 행사를 담당하는 일원인 만큼 국가에서 그들을 관리했고 국가기관에서 그들을 교육시켰다.
고려시대에 여악들은 교방(敎坊)이라는 궁중 음악기관에서 교육을 받았었는데,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이 교방이 관습도감(慣習都監)에 흡수되었다. 관습도감은 궁중행사에서 연주할 음악과 춤 그리고 노래 등을 연습시키는 것을 관장하던 기관이다. 관습도감은 이후 악학도감(樂學都監)을 거쳐 성종 때에 예조(禮曹)에 소속된 장악원(掌樂院)에 통합되었다. 장악원은 400년 이상 존속되다가 대한제국 때에 교방사(敎坊司)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 전기에 이들 여악에 대한 교육은 여름과 겨울을 빼고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과 8월에서 10월까지의 3개월을 합쳐 6개월 동안 시행되었다. 악기로서는 사현비파(四絃琵琶)라 불리는 당비파를 필수로 하고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鄕琵琶), 장구, 아쟁, 해금, 피리, 대금, 소금 등에서 하나를 골라 전공으로 삼게 하였다. 한 악기에 능숙해지면 다른 악기를 하나씩 더 배우게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악기 한 가지만 연마하게 하였다. 노래와 무용도 필수였다.
각 전공에 따라 장악원(掌樂院)의 악사들이 선생으로 배치되었으며, 교육이 끝난 뒤에는 제조(提調)가 직접 그 기예 정도를 시험하여 서투른 사람은 벌을 주고, 더 심하게 못하는 사람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원래 하던 일을 하도록 했다. 가르치는 일을 태만히 한 선생도 벌을 받았다.
중앙관아에 소속되어 궁중 행사에서 가무(歌舞)를 하던 서울의 기녀를 경기(京妓)라고 하였다. 중국사신과 왜국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지방관아(地方官衙)에 두었던 향기(鄕妓)에 대칭되는 호칭이다. 조선 전기에 경기의 정원은 125명이었으나 세종 29년에 그 수를 100명으로 줄였다. 그러다 성종 때에 완성된 『경국대전』에서는 “여기(女妓) 150인, 연화대(蓮花臺) 10인, 여의(女醫) 70인을 3년마다 여러 읍의 연소한 비자(婢子)에서 뽑아 올린다”라고 하여, 세종 때보다는 규모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연화대와 의녀는 기생의 의미가 아니다.
연화대(蓮花臺)는 당악(唐樂)에 맞춰 추는 정재(呈才)이다. 당악(唐樂)은 중국 음악을 뜻하고 정재(呈才)는 궁중에서 추는 춤을 말한다. 봉래(蓬萊)에서 내려온 두 동녀(童女)가 연꽃 술로 태어났다가 군왕의 덕화(德化)에 감격하여 가무로써 그 은혜에 보답한다는 내용이다. 이 춤의 하이라이트는 연꽃 속에서 동녀(童女)가 나오는 대목으로 학(鶴)이 꽃을 쪼면 꽃송이가 벌어지게 하는 등의 연출이 있었던 기록이 남아있다. 연화대무(蓮花臺舞)를 위한 인원을 따로 지정한 것은 춤에 필요한 어린 계집아이를 따로 지정한 것으로 보인다. 연화대 춤은 원래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궁중에서 계속 공연되었다.
의녀(醫女)는 태종 때에 제생원(濟生院)에서 왕족의 재물을 관리하던 관청의 비녀(婢女)나 지방의 큰 도로변에 위치한 군(郡)과 현(縣)의 여비(女婢) 중에 영리한 동녀(童女)를 뽑아 교육하여 부인들의 질병을 진료하도록 한데서 시작되었다. 제생원(濟生院)에서는 이들에게 침구술과 약이법(藥餌法) 등을 가르쳐서 교육을 마친 뒤에는 지방으로 되돌려 보내어 부인들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제생원은 세조 때에 혜민서(惠民署)에 통합되었다.
혜민서 외에 궁중에서 왕과 왕실의 의약(醫藥)을 맡아 보던 관청인 내의원(內醫院)에도 의녀(醫女)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의녀(醫女)를 둔 까닭은 반드시 의술을 정하게 배워서 궁중과 사족(士族)의 집에서 약을 맡아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글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런 의녀가 약방기생(藥房妓生)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중기에 의녀의 본 취지가 훼손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조선시대 서울뿐 아니라 외방(外方)에도 여기(女妓)를 두었었다. 외방이란 한성(漢城)이외의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사신과 왜국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사신들이 경유하는 고을에 두는 여기는 향기(鄕妓)라고 했다. 큰 고을에서는 여기의 수가 100여명까지 되는 곳도 있었다. 서울의 장악원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경기(京妓)는 거개가 외방 여기 중 재예가 뛰어나 뽑혀온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조선 제일의 악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당연히 이들의 실력은 조선 제일이었다. 서울의 경기들은 악공(樂工)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국영 객관(客館)인 태평관(太平館) 근처에 거주하며 장악원에서 악가무를 익혔다. 나라에서는 그들이 장악원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동안, 봉족(奉足)을 세워 그들의 생활을 돕도록 했다.
▶봉족(奉足) : 평민이나 천민이 나라의 역사(役事)에 불려가는 경우, 역사(役事)에 나가지 않는 한두 사람을 보내어 그 집안일을 직접 돕게 하거나 재물(財物)을 내게 한 일. |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기생(妓生)이란 말은 때로 기녀(妓女)라는 호칭보다 천하게 들리기도 한다.
'생(生)'이라는 말은 고대 중국의 역철학(易哲學)에서 ‘드러나다' 또는 '드러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유학을 공부하여 그 배운 도를 드러내는 유생(儒生), 책을 공부하여 그 뜻을 드러내는 서생(書生) 등으로 쓰였다. 여기서 생(生)이란 단어는 학문이나 기술을 익히는 무리인 생도(生徒)를 뜻한다. 따라서, 기생(妓生)이란 말 역시 기(妓)를 익히는 무리라는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장악원에서 아악을 연주하던 연주자들을 악생(樂生)이라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비록 지금의 한자 ‘기(妓)’는 기생이나 창녀의 뜻으로 훈독(訓讀)되지만 아울러 '말이나 행동이 곱고 우아한 여자’라는 뜻도 있다. 원래는 ‘악가무(樂歌舞)'를 포함한 예술적 기능을 아우르는 의미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생에 대하여 쌓여진 부정적
이미지때문에 창녀라는 뜻까지 담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 및 인용 : 국악정보(2010, 국립국악원),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보고사),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중세사사전(2007, 한국사사전편찬회),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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