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투호아집도(投壺雅集圖)

從心所欲 2021. 3. 19. 06:35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인 투호(投壺)는 지금도 명절 때면 고궁이나 한옥마을에서 민속놀이 형태로 제공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투호는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놀이로 후대에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진나라 제후와 제나라 제후가 술을 마시는 가운데 투호를 한 것으로 『춘추좌전(春秋左傳)』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특히 당나라 때에는 손님 접대의 수단이 되기도 했으며, 주로 왕실이나 귀족층의 놀이로 발달해 왔다.

이러한 투호가 언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여러 기록을 통하여 삼국시대에 이미 투호가 시행되었고, 특히 고구려와 백제에서 크게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한동안 시행되지 않다가 예종 때 송나라에서 투호의 도구를 보내오면서 보문각 학사들에게 투호의례와 그림을 그려 투호를 권장하기 시작하였다. 투호가 왕실에서 예법을 익히는 법도인 동시에 수단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투호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의식 확산과 더불어 유교적 예법을 익히는 수단으로서, 왕실은 물론이고 양반관료 내지 사족층 사이에 크게 인기가 있었다. 투호는 왕비를 포함한 내외 명부(命婦)들의 여성 오락으로서도 자주 행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투호도(投壺圖)>, 견본수묵, 58.8 x 41.5cm,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투호가 단순한 놀이로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투호례(投壺禮)라는 이름으로 심신수양과 덕성함양이라는 교육적 목적을 가진 의식으로도 행해졌다.

 

조선은 향촌사회의 지배와 교화를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향음주례와 향사례의 보급을 위해 노력하였고, 『국조오례의』의 완성으로 향음주례와 향사례의 시행을 법제화 하였다.

향음주례(鄕飮酒禮)는 향촌의 선비와 유생들이 향교, 서원 등에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향촌의례이다. 어진 이를 존중하고 노인을 봉양하는 데 뜻을 둔 행사다.

반면 향사례(鄕射禮)는 중국에서 향대부(鄕大夫)가 3년마다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왕에게 천거할 때, 그 선택을 위해 활을 쏘던 의식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하며 예법을 좋아해 어지럽히지 않는 인재를 드러내는 행사였다.

세종은 향사례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술잔을 주고받는 것으로 절도를 삼으며, 활을 쏘고 술 마시는 자리에서는 읍하고 사양하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향사례는 친목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교지(敎旨)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향음주례와 향사례의 경우 예식 자체가 매우 번거롭고 거창하여 거행하기 힘든 단점이 있었다. 반면 투호례의 경우 그 의식이 간단하여 행하기가 쉬우면서도 효용성이 큰 것으로 여겨져 향사례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투호례가 사대부 문화로 확장되는 전기가 되었다. 율곡은 “독서하는 여가에 때때로 유예(遊藝), 즉 가야금타기, 활쏘기, 투호(投壺)같은 것을 즐기되, 각기 법도가 있으니 때가 아니면 하지 말라.”고 하여 투호가 단순한 오락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정약용도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방에 들어갔을 때 붓, 벼루, 볼만한 책과 함께 거문고 하나와 투호(投壺) 1구(口)가 있는 고아하고 깨끗한 모습은 기뻐할 만하다고 적었다.

 

조선 중기까지도 투호례는 여전히 상류층의 문화로 유희와 함께 교육적 목적을 가진 의식으로 행해졌다. 그러다 18세기 후반에 투호가 대중화되면서 투호는 오락적 성격이 강해져 쌍륙(雙六), 골패(骨牌), 투전(鬪牋) 등과 함께 도박성 향락적 여가문화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동시에 양반 사대부들의 모임에서도 시화(詩畵)와 더불어 즐기는 놀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신윤복 《혜원전신첩》中 <임하투호(林下投壺)>,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1770년대의 어느 가을날, 한양 서쪽 산자락 아래에 일곱 명의 선비들이 모였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투호(投壺)를 즐겼다. 그리고 다른 아회들처럼 참가자들이 지은 시와 더불어 이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시는 여섯 명이 각각 두 편씩 짓고 먼저 귀가했던 인물의 시 한편을 더하여 13편의 시가 예서와 전서로 쓰였다. 그림은 함께 모임에 참석했던 예원(藝園) 김두열(金斗烈, 1746 ~ ?)이 그려 두루마리 형태로 된 〈투호아집도(投壺雅集圖)〉가 만들어졌다.

 

[〈투호아집도(投壺雅集圖)>, 서울역사박물관]

 

[김두열〈투호아집도(投壺雅集圖)> 그림 부분]

 

13편의 시는 모두 투호놀이를 하는 상황을 읊은 시인데 그 가운데 자(字)가 회숙(晦叔)인 인물의 시는 그림 속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투호하고 잔에 술 따르고 시 짓는데, 온 골짜기 단풍 숲 해 질 녘 풍경이 기묘하다네.

한 폭에 본래 그대로의 참모습 옮겼으니, 서쪽 성의 정자는 가을을 맞이하였구나.“

 

 

작은 소반 위에 한 권의 서책이 있고, 그 옆에 놓인 원형의 기물에는 둥글게 말린 두루마리와 붓 한 자루가 담겨있다. 소반을 마주하고 무릎 위에 긴 두루마리를 펼친 인물이 김두열이라 한다. 김두열은 그동안 전서를 잘 쓰는 서예가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이 그림을 통하여 화가로서의 재능도 있었음이 새롭게 알려졌다.

 

7인의 인물들 사이에 유난히 작게 그려진 시동(侍童)들이 시중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반면에 시동들이 수거하고 있는 투호용 호(壺)와 그 주위에 떨어진 투호용 화살들은 유독 크게 그려졌다. 투호를 위한 모임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현재 전하는 개인이 제작한 투호 장면을 그린 회화 작품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미술사적 의미도 크다고 한다.

 

이 <투호아집도>의 발문은 김두열의 집안 삼촌인 배와(坯窩) 김상숙(金相肅, 1717 ~ 1792)이 썼다. 김상숙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원교(圓嶠) 이광사도 그의 해서(楷書)를 높이 평가하였던 인물이다. 모임에 참석했다가 먼저 자리를 뜬 회숙의 청으로 발문을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김상숙은 “늙은이가 쓸모가 없어 젊은 사람들로 배척을 당한 꼴은 그대나 나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라며 자신의 나이 많음을 한탄하였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시대 사대부 투호례의 변화양상과 그 예교적 함의(육수화, 2020, 한국교육사학회), 김두열의 투호아집도(投壺雅集圖) 연구(김용기, 2015, 동양고전연구),

한국세시풍속사전(국립민속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