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2 - 관기(官妓)

從心所欲 2021. 4. 1. 15:44

새로운 나라 조선에서 고려시대의 여악(女樂)제도를 계승하고, 조선시대 내내 성리학자들의 끊임없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생 제도가 1908년까지 유지된 것은,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생겨난 폐해 못지않게 애초 제도를 설립할 때의 효용성도 함께 존재했기 때문이다.

 

기생(妓生)은 조선의 국역체계(國役體系)의 한 부분으로, 관부(官府)에 예속된 여자 종[공노비(公奴婢)]에게 부여된 신역(身役)의 하나였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관비(官婢)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생(妓生)인데 일명 주탕(酒湯)이라고도 하고, 하나는 비자(婢子)인데 일명 수급(水汲)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평안도 풍속에 자색이 있는 관비(官婢)를 주탕(酒湯)이라 한다”고 했다. 수급(水汲)은 수급비(水汲婢)라고도 하는데 관아에 속하여 물을 긷는 일을 맡아 하던 여자 종이다. 이처럼 기생은 공노비(公奴婢) 또는 관비(官婢)가 감당하던 신역의 하나로, 노비 중에서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난 자를 뽑아 특별히 기생으로 육성했던 것이다.

기생이 백정, 무당, 광대, 승려 등과 같은 팔천(八賤)의 신분으로 취급되었던 이유이다.

《연산군일기》 연산 11년(1505년) 1월 11일의 기사에서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묻는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생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외방기(外方妓)가 딸을 낳거든, 각 고을로 하여금 나이와 이름을 갖추 적어서 장악원(掌樂院)에 이보(移報)하여 부(簿)에 올리게 하고, 어려서부터 글을 익히고 풍악을 익히며 예도(禮度)를 가르쳐서 나이 차거든 선상(選上)하여 간택(揀擇)하고, 본읍(本邑)으로 물러나 돌아간 뒤에야 형편대로 하는 것을 허가하는 것이 경(卿) 등의 뜻에는 어떠한가?"

 

외방기(外方妓)는 지방의 향기(鄕妓)를 가리키고 선상(選上)은 지방의 관노비를 중앙에 뽑아 올려 사역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그래서 『경국대전』에 따라 3년마다 지방에서 뽑아 서울로 올리는 기생을 선상기(選上妓)라고 불렀다.

연산군의 말에 자리에 있던 신하들은 한 목소리로 "상의 분부가 윤당하십니다."라고 답했다.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오르면 그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라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되어 국가의 관리를 받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조선의 기생은 모두 관기(官妓)였다. ‘관기(官妓)’라는 명칭이 서울의 경기(京妓)를 제외한 지방 관아에 속한 기생만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떻든 간에 조선의 모든 기생은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은 왜 나라에서 관기제도를 만든 것일까?

 

첫째로는, 궁중의 행사와 의식에서 악가무(樂歌舞)를 담당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를 의미하는 궁궐에는 수많은 행사와 연회가 있다. 설날이나 동짓날에 문무백관이 모여서 임금에게 배례한 후에 베풀던 잔치인 회례연(會禮宴), 임금과 왕비가 노인을 공경하고 풍습을 바로잡기 위하여 해마다 9월에 열었던 양로연(養老宴), 외국 사신을 위한 사신연(使臣宴)과 같은 공식적인 연향(燕享) 외에도 임금이나 왕비에게 주식(酒食)을 올리는 예(禮)인 진풍정(進豊呈)을 비롯하여 국왕의 기로소(耆老所)입사, 망오(望五), 오순, 왕대비의 사순, 대왕대비의 칠순, 국왕의 생모나 대왕대비의 회갑과 같은 큰 경사 외에도 왕실의 각종 소소한 행사와 연향이 있었다. 또한 임금이 신하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하여 연향을 베풀어주거나 음악을 하사하는 일도 있다. 임금의 대가(大駕)가 궁궐로 돌아올 때 노상에서 행해지는 향악정재(鄕樂呈才)인 교방가요(敎坊歌謠)가 행해졌고, 1년에 네 번씩 드리는 종묘제례(宗廟祭禮)에도 음악은 필수였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장악원 소속 악인(樂人)은 “아악(雅樂)악사 2명, 악생(樂生) 297명, 속악(俗樂) 악사 2명, 악공(樂工) 518명, 가동(歌童) 10명”으로 총 829명에 이르고, 여기에 악생과 악공의 후보생까지 합치면 981명이나 된다. 여악(女樂)은 제외한 숫자다. 그 시대에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 의식의 일부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악(女樂)은 거의 모든 잔치에 동원되지만 특히 중궁하례, 친잠례(親蠶禮)와 같이 왕비를 비롯한 내명부(內命婦)여인들을 위한 내연(內宴)에는 남자 악인은 출입하지 못하고 여악(女樂)으로만 공연되었다. 여악의 노래와 춤을 위한 반주는 맹인(盲人) 악사인 관현맹(管絃盲)이 담당하거나 여기(女妓)들이 스스로 악기를 익혀 연주하기도 하였다.

 

[<무신진찬도병(戊申進饌圖屛)> 中  악생과 악공 배치]

 

[<무신진찬도병(戊申進饌圖屛)> 中 악생과 악공 배치]

 

둘째로는 한성을 오가는 사로에서의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필요에서였다. 중국은 물론 왜국과 여진의 사신들이 머무는 곳에서는 그들을 위한 사객연(使客宴)이 베풀어지는데 이때에 악가무(樂歌舞)를 담당할 여악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지방 관아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와 잔치에도 여악이 필요했고, 또한 이들은 3년마다 서울에 올려 보내야 하는 선상기(選上妓)의 공급원이기도 했다.

 

지방 관아에서 기생은 관노비와 함께 관노청(官奴廳)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는 다시 또 관노청 아래에 교방(敎坊)을 따로 두어 기생을 관리하였다. 이 교방에는 기생의 우두머리인 행수(行首)가 있었고 또한 악공들도 소속되어 있어 동기(童妓)를 포함한 기생들의 여악을 지도하고 훈련시켰다. 지방 관아의 여악 수준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달랐겠지만 지역적 특성이 있었다.

 

호남기(湖南妓)와 영남기(嶺南妓)는 단가(短歌)를 잘 불렀고 평양기(平壤妓)는 ‘관산융마(關山戎馬)’를 잘 불렀으며, 선천기(宣川妓)는 ‘항장무(項莊舞)’에 능했다. 안동기(安東妓)는 ‘송(誦) 대학지도(大學之道), 함흥기(咸興妓)는 ’송(誦) 출사표(誦出師表)’, 의주기(義州妓)는 치마무검(馳馬舞劍), 영흥기(永興妓)는 ‘창(唱)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관동기(關東妓)는 ‘창(唱) 관동별곡(關東別曲)’, 북청기(北靑妓)는 ‘치마지기(馳馬之技)’ 제주기(濟州妓)는 ‘주마지기(走馬之技)’로 각기 유명했다.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 병풍 중 부분, 정조가 1795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원소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하고 연회를 베풀었던 일을 김홍도로 하여금 도설(圖說)을 제작하게 하여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담았는데, 이 도설에 기초하여 김득신, 최득현, 이인문, 이명규, 장한종, 허식 등에 의해 제작된 병풍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京妓)와 향기(鄕妓) 외에 방기(房妓) 또는 방직기(房直妓)라 불리는 여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명칭에 ‘기(妓)’자가 들어가 있지만 이들은 실상 여악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렇지만 국가에서 보면 이들 역시 큰 틀에서 기녀제도의 일부였다.

《세종실록》 세종18년(1436년) 12월 17일 기사에 실린 세종의 발언을 통하여 이들의 역할과 존재 이유를 알 수가 있다.

 

【함길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옛날에 변진(邊鎭)에 창기(娼妓)를 두어 군사들의 아내 없는 사람들을 접대하게 하였는데,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지금도 변진과 주군(州郡)에 또한 관기를 두어 행객을 접대하게 하는데, 더군다나 도내의 경원, 회령, 경성 등의 읍은 본국의 큰 진영으로 북쪽 변방에 있는데, 수자리 사는 군사들이 가정을 멀리 떠나서 추위와 더위를 두 번씩이나 지나므로, 일용(日用)의 잗단 일도 또한 어렵게 될 것이니, 기녀를 두어 사졸들을 접대하게 함이 거의 사의(事宜)에 합할 것이다."

하였다.】

▶변진(邊鎭) : 국경 지방의 방어를 위하여 군대가 머무를 수 있도록 쌓은 성채나 진(鎭), 보(堡) 등을 가리킴.
▶수자리 : 원문에는 ‘무(戍)’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군사진지가 있던 평안북도 천마군의 긴 골짜기를 가리키는 지명인 동시에 그곳에 근무하는 것을 뜻한다.

 

즉, 방직기(房直妓)는 변방에서 근무하던 무과 출신자 군관(軍官)에게 국가가 제공하는 관기로, 이들은 빨래와 바느질을 해주며 군관의 살림을 도왔고 잠자리를 함께 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포함되었다.

어느 나라의 어느 제도나 시행하다보면 문제점과 부작용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조선 조정도 기녀제도에 따른 부작용들이 나타나자 이를 고민했다. 《성종실록》성종 19년(1488년) 윤1월 14일 기사를 보면 그런 고민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처음 창기(娼妓)를 연변(沿邊) 여러 고을에 둔 것은 변장(邊將)과 군관(軍官)들이 고향을 떠나서 변경을 지키므로 빨래하고 바느질하는 일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내지(內地) 같은 데에는 없애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요즈음 김중우(金仲愚)도 창기로 인하여 수령(守令)을 능욕(凌辱)하여 악한 말과 꾸짖는 말이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으며, 서울 안 조사(朝士)까지도 풍속을 허물어뜨리고 어지럽히는 것이 역시 이로 말미암지 아니함이 없다."

 

하니, 승지(承旨)들이 합사(合辭)하여 아뢰기를,

 

"국가에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에 여악(女樂)을 쓰는데, 만약 내지(內地)에 창기를 두지 아니하면 서울 기녀(妓女)가 궐(闕)함이 있을 때에는 어떻게 골라 채우겠습니까? 변경 고을의 창기만으로는 그 선발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해당 조(曹)에 의논하게 하소서."

 

하자, 전교하기를,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조사(朝士) : 조정에 몸을 담고 있는 신하.
▶궐(闕) : 결원(缺員)

 

 

 

참고 및 인용 : ‘妓生案’을 통해본 조선후기 기생의 公的 삶과 신분 변화(2010, 박영민), 조선시대 妓役의 실태(정연식),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보고사),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