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3 - 의녀(醫女)

從心所欲 2021. 4. 5. 05:42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기생들 외에도 혜민서(惠民署)와 내의원(內醫院) 소속 의녀(醫女)인 약방기생(藥房妓生)과 상의원(尙衣院) 소속 침선비(針線婢)인 상방기생(尙房妓生) 또는 공조기생(工曹妓生)이 있었다는 것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기생의 역을 같이 담당했던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 세종 5년(1423년) 12월 27일 기사를 보면 그들의 선발기준부터 여악과는 다르다.

 

【예조에서 계(啓)하기를,

"제생원(濟生院)의 의녀(醫女)들은 반드시 먼저 글을 읽게 하여, 글자를 안 연후에 의방(醫方)을 읽어 익히도록 하고 있으니, 지방에서 선발하여 올려 보내려고 하는 의녀도 또한 지금 거주하고 있는 그 고을의 관원으로 하여금 먼저 《천자(千字)》, 《효경(孝經)》, 《정속편(正俗篇)》 등의 서책을 가르쳐서 문자를 대강 해득하게 한 뒤에 올려 보내도록 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서울로 뽑혀 올라와서 하는 일도 여악들과는 달랐다. 《세종실록》 세종 16년(1434년) 7월 25일 기사이다. 

 

【"제생원 의녀(醫女)들은 날마다 관사(官司)에 출근하여 의서를 읽고 익히며, 병을 보고 침구(針灸)를 하되, 맑고 비 오는 날을 가리지 아니하오니, 임무의 괴로움이 갑절이나 무겁습니다. 여기(女妓)의 예에 의하여 1년에 두 번씩 쌀을 하사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의녀의 역할과 신분에 대해서는 《성종실록》성종 9년(1478년) 2월 16일 기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예조(禮曹)에서 의녀권과조(醫女勸課條)를 아뢰기를,

"1. 예문관원(藝文館員) 및 명망 있는 문신(文臣) 2인이 교수(敎授)를 겸해서 번갈아 교회(敎誨)한다.

 

1. 의녀가 읽을 서책은 《인재직지맥(仁齋直指脈)》·《동인침혈침구경(銅人鍼穴鍼灸經)》· 《가감십삼방(加減十三方)》·《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의 부인문 《산서(産書)》로 한다.

 

1. 의녀를 3등으로 나누되, 첫째 내의(內醫)라 하여 2인을 두고 달마다 급료(給料)하며, 둘째 간병의(看病醫)라 하여 20인을 두고 전달에 강(講)한 점수[획(畫)]가 많은 자 4인에게 급료하며, 셋째 초학의(初學醫)라 한다.

 

1. 제조(提調)가 매월 상순에 강서(講書)하고 중순에 진맥(胗脈), 명약(命藥)하고 하순에 점혈(點穴)하게 하며, 연말에 의사(醫司)의 제조(提調)가 방서(方書), 진맥, 명약, 점혈을 강하여 1년 동안 강에서 받은 점수[획(畫)]를 통산하여 올리고 내린다. 그 중에서 불통(不通)이 많은 자는 봉족(奉足)을 빼앗되, 첫해는 1명을 빼앗고 다음해는 2명을 빼앗고 3년째는 본역(本役)으로 돌려보낸다.

 

1. 초학의는 간병(看病)에 배정하지 말고, 학업에 전념하게 한다.

 

1. 나이가 만 40세가 되면서 한 방면도 통하지 못하고 다른 기술도 없는 자는 본역으로 돌려보낸다.

 

1. 매년 각사(各司)의 계집종[婢] 1명을 간택해서 수를 채운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교회(敎誨) : 가르치고 지도함

▶방서(方書) : 한의학 처방을 다룬 책

▶불통(不通) : 과거를 볼 때에 성적을 매기는 등급의 하나로서,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등급에서 가장 낮은 점수. 여기서는 과락(科落)의 의미.

▶봉족(奉足) : 평민이나 천민이 국역(國役)을 위해 뽑혀 나갔을 때, 동원될 수도 있었던 나머지 후보자들 가운데 한두 명으로 하여금 동원된 사람의 집안일을 도와주게 하던 일.

▶각사(各司) : 경각사(京各司)의 준말로, 서울에 있는 관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이처럼 부녀자들을 진료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의술에 전념해야 했던 의녀들에게 새로운 역할이 주어진다. 성종 때 예조(禮曺)에서 이런 건의를 올렸다.

 

 

【예조에서 친잠(親蠶)할 때 마땅히 행하여야 할 절목(節目)을 아뢰기를,

"《두씨통전(杜氏通典)》의 황후(皇后) 친잠의(親蠶儀)에, ‘출궁(出宮)하고 환궁(還宮)할 때와 단(壇)에 오르내릴 때에 모두 음악(音樂)을 연주한다.’ 하였는데, 《송사(宋史)》의 친잠의에는 음악을 연주함이 없으며, 본조(本朝)의 《오례의(五禮儀)》에는, ‘모든 왕비(王妃)의 수하의(受賀儀) 와 회명부의(會命婦儀)에 있어서, 자리[座]에 오르고 내릴 때에 모두 음악을 연주한다.’ 하였습니다. 지금의 친잠도 또한 성례(盛禮)이니, 출궁하고 환궁할 때와 단에 오르내릴 때에 모두 음악을 연주함이 어떻겠습니까?“】 [《성종실록》성종 8년 윤2월 25일 기사]

▶친잠(親蠶) : 조선시대 백성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이를 널리 장려하기 위하여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던 일련의 국가의례

▶수하의(受賀儀) : 조하를 받는 의식.

▶회명부의(會命婦儀) : 내명부와 외명부를 회례(會禮)하는 의식.

 

그러면서 함께 건의한 사항들 중에 “의장봉지(儀仗奉持)와 각 차비(差備)는 내시부(內侍府)로서 부족하니, 청컨대 모두 여기(女妓)로써 충당해 정하고, 부족하면 의녀(醫女)로써 충당해 임명하되, 임시로 여기의 의복을 입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는 대목도 같이 들어있었다.

▶의장봉지(儀仗奉持) : 의장을 받드는 사람.

▶차비(差備) : 궁중의식에서 임시로 임무를 맡은 사람.

▶내시부(內侍府) : 『경국대전』에는 궐내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수직, 청소 등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궐내의 모든 잡무를 담당하던 관서.

 

성종은 예조의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였고, 의녀들이 궁중의 행사에 동원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로 추정된다. 하지만 위 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의녀들은 여악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장차비(儀仗差備)의 역할만 했다. 의장(儀仗)이란 왕과 왕비 등의 행사에서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격식을 갖추어 세우는 창이나 칼 같은 병장기와 깃발을 가리킨다.

아래 그림을 보면 연회장 곳곳에 여악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깃발이나 병기를 들고 서있는 의장여령(儀仗女伶)들을 볼 수 있다. 의녀들이 이런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무신진찬도병(戊申進饌圖屛)> 中 부분]

 

복장은 화관을 쓰고 녹색 저고리에 남색(藍色) 치마를 입고 그 위에 앞치마처럼 생긴 홍초(紅綃) 치마를 덧입었다. 춤을 추는 여악들은 이 위에 노란 색의 정재무(呈才舞)복을 입은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왜국엽서 속의 관기와 악공들. 관기들은 궁중무용을 뜻하는 정재무(呈才舞) 복장을 하고 있다.]

 

종종 이들 의녀들과 침선비들이 악가무(樂歌舞)를 익혀 궁중 연회에서 직접 공연까지 한 것으로 기술하는 글들이 있는데 실제 그랬을는지는 의문이다. 각기 본업이 있는 그들이 언제 악가무를 익힐 시간이 있으며, 연회에 일시 동원되어 단시간 교육 끝에 궁중 공연을 할 만큼의 실력을 갖춘다는 것은 혹 몇몇의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지는 몰라도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서울의 경기나 지방의 선상기 모두 어렸을 때부터 오랜 시간을 거쳐 훈련된 여악들이다. 그런 여악들조차도 장악원의 지도를 받으며 연습하여 공연을 한다. 조그만 실수도 용납되지 않을 궁중 행사에 숙련자와 비숙련자가 함께 공연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지금 어떤 아이돌 그룹에 결원이 생겼다고 해서 전혀 기초도 없는 생초보를 데려다 몇 달 연습시켜 함께 활동하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참고 및 인용 :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보고사),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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