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6 - 흥청망청

從心所欲 2021. 4. 21. 11:06

여악 가운데서도 연산군이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인 것이 흥청(興淸)이다. 지금 ‘흥청망청(興淸亡淸)’ 이라는 말은 재물을 함부로 낭비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모두가 아는 대로 이 말은 연산군이 흥청에 재물을 낭비하여 결국 망조에 이르게 되었음을 가리키는 데서 비롯되었다.

 

흥청은 운평 가운데서 외모와 재기로 선발한 최정예 여악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연산군의 여인집단이기도 했다. 연산군은 흥청을 직접 심사하여 선발하였는데 그 기준이 까다로워 정원 300명을 정해놓고도 몇 달이 지나도록 그 인원수를 채우지 못하였다.

 

【전교하기를,

"광희·운평은 거의 수를 채우게 되었거늘, 흥청(興淸)은 어찌하여 수를 채우지 못하는가?  흥청의 원액(元額) 및 현재 간택된 수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매, 장악원(掌樂院)이 아뢰기를,

"흥청의 원액(元額) 3백안에서, 실흥청(實興淸)이 45, 가흥청(假興淸)이 48이고, 채우지 못한 수가 2백 7입니다."

하니, 어서를 내리기를,

"우리나라가 비록 작으나, 어찌 알맞은 사람이 없으랴! 모름지기 정선(精選)을 다하여 맡긴 뜻에 맞게 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 11년 4월 4일]

 

기사에 언급된 실흥청(實興淸)은 정식 흥청을 의미하고, 가흥청(假興淸)은 어린 기생과 양민 처녀들로 아직 정식 흥청으로 인정받지 못한 예비 흥청을 가리킨다. 흥청에 선발된 여악들은 대궐 내에 거주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연산군은 흥청을 또 세 등급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한 흥청은 천과흥청(天科興淸), 잠자리를 같이 하지 못한 흥청은 지과흥청(地科興淸), 잠자리를 같이 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던 여악은 반천과흥청(半天科興淸)이라 하였다.

연산군은 천과흥청에게 후궁에 준하는 대우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교하기를,

"천과흥청악(天科興淸樂)에게 공궤하고 받드는 모든 일은 후궁(後宮)에게 하듯이 할 것이며, 사람들이 본가에 출입하는 것도 금지하라. 이것을 어기는 자는 기시(棄市)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 11년 11월 3일]

▶기시(棄市) : 옛날 중국 형벌(刑罰)의 하나로 죄인의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던 일.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신역(身役)을 담당하는 사람의 생계를 돕게 하는 봉족(奉足) 또는 보인(保人)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는 원래 군사로 선발되어 군역(軍役)을 담당하게 된 사람의 집안 생계와 군역을 치르는데 드는 비용 등을 보조하기 위한 제도였지만, 여악들에게도 적용되었었다. 시기와 직역에 따라 변동은 있었지만 통상 2인의 보인을 배정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연산군은 특별히 여악에 대한 보인을 대폭 늘리게 했다.

 

전교하기를,

"흥청악(興淸樂) 1인이 급보(給保) 6인을 거느리고, 운평악(運平樂) 1인이 급보 3인을 거느리게 하되, 두 건(件)을 성적(成籍)하여 정원(政院) 및 장악원(掌樂院)에 두고, 운평악은 그 지아비까지 개록(開錄)하였다가 급보나 지아비가 죽거든 입계(入啓)하고서 고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연산 11년 5월 26일] 

▶급보(給保) : 국역(國役) 이행자에게 그 의무 이행 기간의 비용 마련을 위해 일정한 수의 보인(保人)을 배정해준 제도.

 

조선시대 군역(軍役)을 담당하는 군사에 달린 보인 1인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은 1년에 포(布) 2필이고, 수군(水軍)과 훈련도감 병사의 보인들은 3필이었다. 그러나 여악과 악공․ 악생에 딸린 보인들은 1년에 포(布) 12필을 감당해야만 했다. 이는 군사들과 여악․악공들의 입역(入役) 기간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군사들은 교대로 근무하기 때문에 입번(入番)하는 기간을 고려하여 포를 지급했지만, 여악과 악공은 1년 12달 입역하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여악과 악공들에 딸린 보인들의 부담이 과중하다고 하여 효종 대에 이르러 6필로 줄기는 했어도, 인조 초반까지도 12필의 부담은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흥청악의 보인이 6명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1년에 받는 포(布)가 72필이나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군사들이 2 ~ 3필 받았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특혜와 배려다. 또한 연산군은 흥청의 보인들이 그 책임을 태만하지 못하게 각도의 수령으로 하여금 이를 관리 감독하도록 지시했으며, 실제로 수령들이 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조사하기 위하여 어사까지 파견하였다.

 

【전교하기를,

"흥청(興淸)·운평(運平)에게 봉족(奉足)을 정해 주는 일은 이미 법이 있는데도, 수령(守令)들이 만홀(慢忽)히 여겨 봉행하지 아니하니, 각도에 어사(御史) 40여 명을 보내어 사정(私情)을 두지 말고 형신(刑訊)하여 잡아오게 하라. 마땅히 장흔(杖痕)을 살필 것이니, 만약 사정을 둔 자가 있으면 반좌(反坐)시킬 것이다. 일 없이 모여앉아 지껄이는 자도 진소(陳訴)하도록 하고, 사정으로 덮어주고 고발하지 않다가 뒤에 발각된 자도 모두 치죄하도록 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 12년 5월 28일]

▶형신(刑訊) : 형구로 고문하여 자백시킴.

▶반좌(反坐) : 원래는 ‘사람을 무고(誣告)하는 경우 무고를 입은 사람에게 과(科)한 죄만큼 과죄(科罪)하는 것’을 뜻하나 본문에서는 가죄(加罪)한다는 의미로 보임.

 

실제로도 연산군은 여악에 대한 보인을 정해주지 않거나 정해진 보인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수십 명의 수령들을 찾아내어 징계하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국역(國役)에 동원된 인원들은 보인을 통한 보조를 받을 뿐 국가에서 따로 봉록(俸祿)을 지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산군은 이에 대해서도 특례를 만들었다.

 

【전교하기를,

“... 또 흥청·운평의 재기(才技)를 등제(等第)하되, 9품부터 5품까지로 등급을 나누어 품마다 각각 정품(正品) 5, 종품(從品) 5를 갖추고, 여러 차례 통(通)을 받은 자를 각품에 나누어 두어 쌀과 면포로 정종(正從)을 분간하여 봉록(俸祿)을 주며, 광희악으로서 여러 차례 통을 받은 자는 전에 승전(承傳)한 대로 그 재기에 따라 정·종을 분간하여 봉록을 더 주라...”】 

[《연산군일기》연산 11년 2월 13일]

 

[「화성원행의궤도(華城園幸儀軌圖)」中 조선 초기에 창작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하나인 향발(響鈸)과 학무(鶴舞)]

 

[「화성원행의궤도(華城園幸儀軌圖)」中 고려 때부터 전해 내려온 무고(舞鼓)와 아박(牙拍) : 무고는 북을 가운데 놓고 추는 군무이고, 아박은 상아(象牙)로 만든 작은 박(拍)을 들고 추는 춤]

 

[「화성원행의궤도(華城園幸儀軌圖)」中 세종 때 지은 아악인 하황흔(荷皇恩)과 고려 때 춤을 전승한 포구락(抛毬樂)]

 

이외에도 연산군은 흥청에게 매월 품질이 좋은 베인 정포(正布)와 흰 모시인 백저포(白紵布), 명주 등을 내려줬으며 수시로 재물을 하사하였다. 천과흥청 2명에게는 노비 5명, 그리고 다른 흥청 20명에게는 노비 2명씩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또한 여악들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는데도 국고를 물 쓰듯 하였다.

 

【명하여 이계산(李季山)의 진주(眞珠)를 받아들이고 관가의 면포로 값을 곱쳐서 주게 하였다. 그때 큰 장사치가 흥청(興淸)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고 모든 진기하고 보배로운 물건을 하루도 빠짐없이 바쳐서 이익을 만 배로 거두니, 국고가 다하였다.】 [《연산군일기》연산 11년 6월 9일]

 

【전교하기를,

"소로(少老)가 들인 진주 3천 2백 개와 몽민(夢民)이 들인 진주 4천 8백 개를 호조에 영하여 값을 주게 하라." 하였다.

큰 장사치들이 흥청에게 뇌물을 후히 주어 주옥(珠玉)을 납품하고 값을 백배나 받아내므로 부고(府庫)가 텅 비었다.】 [《연산군일기》연산 11년 8월 12일]

 

이에 후대의 사관은 “이때 나인들이 국고[국름(國廩)]로 먹고 입는 자가 1천 명이나 되어, 군자창(軍資倉)·풍저창(豐儲倉)·광흥창(廣興倉) 등의 창고가 모두 텅 비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악에 대한 재물의 낭비보다 국가적으로 더 큰 폐해는 흥창들이 연산군의 총애를 이용하여 사익을 채운 것과 여기에 그 일족까지도 가담하여 국가 체계를 문란케 한 일이다.

연산군은 흥청의 뒷바라지와 생업을 돌보도록 흥청의 부모 형제를 지방에서 상경시켜 그들에게 전토와 집을 주고 그들이 맡고 있던 관역(官役)을 면제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연산군은 흥청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 좋은 집을 구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다.

 

【흥청이 스스로 좋은 집을 차지하고서 아뢰면 왕이 곧 호조(戶曹)에 명하여 시가를 쳐서 강제로 사들여서 내려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성안의 좋은 집들은 모조리 흥청의 차지가 되고, 흥청의 집 하인도 연줄을 타서 간사한 짓을 하되, 비록 못 쓰게 된 집일지라도 시가로 평가했다 하고서 장차 들어가 살고자 그 주인을 쫓아내고 재물을 빼앗는데, 사람들이 겨루지 못하고 후히 뇌물을 주어야 그만두었다.】 [《연산군일기》연산 11년 8월 20일]

 

흥청의 위세가 이에 이르자 그 위세를 이용하려는 무리들도 생겨났다. 연산군도 그런 소식을 듣고 단속을 지시했다.

 

【전교하기를

"어제 몽민(夢民)이 와서 고하기를 ‘한 사나이가 제 집에 와서 흥청(興淸)이란 두 글자를 쓴 목패(木牌)를 문에 못 박으며, 이는 전교를 받은 것인데 묘시(卯時)에 비접(避接)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니, 이는 반드시 그 집을 빼앗으려는 자가 이런 꾀를 내었으리라. 그 사나이 및 삼절린(三切隣)을 잡아다가 추국(推鞫)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8월 15일]

▶몽민(夢民) : 어리석은 백성

 

【전교하기를,

"무뢰(無賴)한 무리가 흥청악의 족친(族親)이라고 꾸며대고 무역(貿易)·회환(回換)을 하는 등의 일은, 제게만 이롭게 하고 함부로 날뛰어 기탄(忌憚)이 없으므로 마땅히 엄중히 징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나치게 조사하다가는 억울하게 걸리는 자가 많을까 두려우니, 추국(推鞫)을 정지하고 전자에 내린 승전(承傳) 및 서장(書狀)도 아울러 거행하지 말아, 남을 속이는 간사한 행동을 막으라."

하였다.

 

이때에 시정(市井)의 사람이 숙원(淑媛)의 일가라 칭탁하고 숙원을 통해 청탁을 받아, 각도에 유지(諭旨)를 받들고 다니면서 혹은 위차(委差) 혹은 별좌(別坐)라 일컫고는 시장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사서 짐바리에 싣고 무리를 지어 각 고을에 가서 수령(守令)을 시켜 백성들에게 분배하게 했다. 그리하여 몇 갑절의 이익을 취하다가, 혹 욕심에 차지 않으면 수령을 욕보이므로 수령은 부득이 백성에게 침탈하여 그 값을 걷어 치렀다. 사람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더니 마침 어명이 내리자 모두 기뻐하였는데, 얼마 안가서 전과 같이 되었다.】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10월 17일]

▶위차(委差) : 내수사의 일을 맡아보는 관리.

 

위 기사에 등장하는 ‘숙원(淑媛)’은 장녹수(張綠水)를 가리킨다. 연산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여인으로 《연산군일기》에는 그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장녹수는 제안대군(齊安大君)의 가비(家婢)였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大君)의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寵愛)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얼굴은 중인(中人)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하여 상사(賞賜)가 거만(鉅萬)이었다. 부고(府庫)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그 집으로 보내었고, 금은주옥(金銀珠玉)을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전답·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으니, 김효손은 그 형부이므로 현달한 관직에 이를 수 있었다.】

[《연산군일기》 연산 8년 11월 25일]

▶제안대군(齊安大君) : 예종의 둘째 아들(1466 ~ 1525). 예종이 죽었을 때, 왕위계승 1순위였으나 세조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반대하여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음악을 즐겼다. 연산군이 네 차례나 음률(音律)을 아는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그에게 내렸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렇듯 장녹수와 흥창에 대한 연산군의 총애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전국에서 활개를 펴면서 국가 기강은 무너지고 백성들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런 상황이 결국 연산군을 물러나게 하는 중종반정을 불러일으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참고 및 인용 :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16세기 초엽 기녀제도 개편 양상(조광국, 규장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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