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7 - 관리숙창률

從心所欲 2021. 4. 27. 07:56

조선시대 초기부터도 관리를 포함한 양반 사대부들이 기생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거나 첩으로 삼는 일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한 풍기문란의 문제도 일찍부터 제기되었었다.

세종 때에 평안감사 윤곤(尹坤)은 왕의 명령을 받아 사행하는 사신들이 지방 관아의 기생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하라는 아래와 같은 건의서를 올렸다.

 

【"우리 동방이 해외의 한 작은 나라로서, 중국과 견주는 것은 특히 예의가 존재하기 때문 이온데, 요즘 대소 사신이 명령을 받들고 외방에 나가면, 혹은 관기(官妓)와 사랑에 빠져 직무를 전폐하고 욕심껏 즐기어 못할 짓 없이 다하며, 만약 기생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그 수령이 아무리 어질어도 취모멱자(吹毛覓疵)하여 일부러 죄망에 몰아넣고, 명사들끼리나, 한 고을 안에서 서로 좋게 지낸다는 자들도 혹은 기생 하나를 놓고 서로 다투어, 드디어 틈이 벌어져 종신토록 친목하지 않는 일도 있으며, 수령이 법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는 이상, 만약 간음하는 일을 보면, 반드시 의법 처단해야 되는데, 관기(官妓)에 있어서는 매양 귀객이 오면 강제로 간음하게 하며, 잘 듣지 않는 자에겐 도리어 중한 죄를 더하고, 혹은 모자와 자매가 서로 뒤를 이어 기생이 되어, 한 사람이 다 간음하는 예가 있사오니, 이는 강상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게 하며, 예를 문란하게 하고 의를 훼손하여, 문명의 정치에 누를 끼치는 일인데도, 오래 전부터 행하여 왔다 해서, 조금도 해괴하게 여기지 않으며.....(중략)......그 대소 사행(使行)이나 귀객(貴客)들이 서로 간음하는 것은 일절 금단하며, 만약 어기는 자 있으면, 주객(主客)을 다 죄를 내리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세종실록》 세종 1년 4월 14일]

▶취모멱자(吹毛覓疵) : ‘털을 입으로 불어가며 털 속에 있는 작은 흉터를 찾아낸다’는 뜻으로, 남의 약점을 악착같이 찾아내려는 야박하고 가혹한 행동

 

이에 세종은 예조에 명하여, 대신들과 상의하여 그 결과를 올리게 하였다.

 

【대소 사신이 관기(官妓)를 간음함을 금하였더니, 이때에 의정부와 육조가 평안감사  윤곤의 장계와 함께 의논하여 모두 말하기를,

"행한 지 이미 오래였으니, 반드시 금할 것이 아니다."

하되, 오직 박은이,

"곤의 청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고, 변계량은 옛것에 좇아 뭇사람의 마음에 맞게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해온 것이 비록 오래다 하나, 그것이 어찌 아름다운 풍속이며, 더구나 남편 있는 기생이랴. 곤의 청함을 따르라."

고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1년 6월 18일]

 

세종은 평안감사 윤곤의 건의를 받아들였지만, 조정의 많은 대신들은 오랜 관례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양반과 기생에 얽힌 관습은 뿌리가 깊어 사회 전반에서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는 증거다.

태종 때에 기생과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관리가 파직되는 일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흔히 떠도는 말처럼 관리들이 기생과 관계를 맺거나 첩으로 삼는 것이 불법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경상도(慶尙道) 영해 부사(寧海府使) 김사천(金四川)과 안동 판관(安東判官)  김상녕(金尙寧)이 파면되었으니, 사천 등이 본관(本官)의 창기(倡妓)와 관계하였기 때문에, 관찰사가 논핵하여 파면시킨 것이다.】[《태종실록》 태종 9년 7월 5일]

 

기사에서 주목할 것은 관리들이 처벌받은 이유가 ‘본관(本官)의 창기(倡妓)와 관계하였기 때문’이라는 부분이다. ‘본관(本官)의 창기(倡妓)’는 자신이 책임을 맡고 있는 관아에 소속된 기녀라는 의미다.

 

조선시대에 조선의 법전에 없는 조항들은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따랐다. 그런데 이 『대명률(大明律)』에 ‘관리숙창률(官吏宿娼律)’이라 하여 관리가 기녀와 육체적 관계를 가졌을 때 벌하는 조항이 있었다. 이 조항에 의하면 ’창기와 잠자리를 한 관리는 장 60에 처한다[凡官吏宿娼者 杖六十]‘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관리는 모든 관리가 아니라 기녀가 속해 있는 관청의 관리를 가리킨다. 즉, 고을 수령은 그 고을 관아에 속해있는 기녀와 잠자리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는 특별히 기생을 관리 감독하는 관청의 기강 해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만든 조항으로 보인다. 위 기사의 두 관리가 비록 장(杖)은 맞지 않았지만 파직된 것은 이 율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은 80년 뒤 성종 시대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사천령(蛇川令) 연동(燕同)이 상언(上言)하여 그 어미의 기역(妓役)을 면제하기를 청하니,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지금 종친(宗親)의 수가 2백여 인에 이르는데, 혹은 창기(娼妓)를 데리고 살거나 혹은 사천(私賤)을 간통하여 첩(妾)으로 삼는 이가 많다. 그러나 그 아들 때문에 그 어미의 역(役)을 모두 없앨 수 없으며, 또한 어미는 천역(賤役)에 종사하는데 그 아들은 편안하게 벼슬에 있으니, 내가 종친들로 하여금 기첩(妓妾)을 두지 말도록 하려고 한다. 종친 2품 이상에게 유시(諭示)하라." 하였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등이 와서 아뢰기를,

"종친으로서 기첩을 두는 자는, 관리(官吏)가 창가(娼家)에서 자는 율(律)로써 금단(禁斷)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승정원에 하문(下問)하기를,

"조관(朝官)이 창가에서 자는 자는 본률(本律)로 단정하는가?"

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만일 장악원(掌樂院)의 관원이 관리하는 창아(娼兒)를 간통하면 본률(本律)로 죄를 주고, 기타 조관은 이 율을 적용하지 아니합니다."

하자, 정(婷) 등에게 전교하기를,

"종친이 어찌 반드시 창류(娼流)로써 첩을 삼는가? 내가 마땅히 짐작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8년 5월 14일]

 

이 기사 내용에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는 여러 정황들이 담겨있다. 사천(蛇川)의 수령인 연동(燕同)이란 인물이 기생으로 있는 자신의 어머니의 기역(妓役)을 면제해달라고 하고 있다. 어머니가 기생의 신분인데 그 아들이 수령직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런데 이러한 요청에 성종이 바로 꺼대든 말이 종친(宗親)이었다. 이로 미루어 연동(燕同)은 어떤 종친이 기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미는 천역(賤役)에 종사하는데 그 아들은 편안하게 벼슬에 있다”는 것도 그런 신분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지속적이지는 않았더라도 때때로 서얼허통을 통하여 서얼에게도 음직(蔭職)으로 관직을 내려주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연동(燕同)은 완산 이씨(完山李氏)라는 기록은 있는데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완산이씨는 전주이씨의 다른 명칭으로, 파(派)에 따라 전주이씨 대신에 완산이씨를 고수한다고 한다. 백제시대에 전주의 지명이 완산이었다.

 

이때에 이미 종친들이 기녀를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종은 종친들이 기녀 첩을 두는 것은 금지하려 하면서도 그런 일로 종친을 벌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듯 보인다. 월산대군이 건의한 ‘관리(官吏)가 창가(娼家)에서 자는 율(律)’은 바로 ‘관리숙창률(官吏宿娼律)’이다. 문제가 된 것은 종친이 기생을 첩으로 삼는 일인데, 성종은 종친 대신에 조정의 대신들이 그런 조항에 해당하는지부터 물었다. 그리고 승정원은 서울의 기생들이 소속되어 있는 관아인 장악원의 관리가 기생과 관계를 맺는 것은 이 율에 따라 죄가 되지만, 조정의 다른 관리들은 이 율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이로써 관리가 기녀와 육체적 관계가 금지된 것은 기생이 소속된 관청의 관리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조항임을 알 수 있다. 이에 성종은 안심한 듯 “종친들이 왜 하필 기생들을 첩으로 삼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며 자신의 이복형인 월산대군을 달랬다.

 

그러나 이런 기록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전 시대에 걸쳐 지방 수령이 자신이 재임하고 있는 관청소속 기녀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 더 나아가 첩으로 삼는 일은 흔하게 행해졌다. 또한 세종 때에 금지된 봉명(奉命) 사신들이 지방 관기들의 수청을 받는 일도 변함없이 행해졌다. 나라에서는 이를 알면서도 이를 문제 삼아 따로 죄를 주는 일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묵인 방조하였다. 다만 관리가 다른 죄로 적발되어 처벌받게 되는 경우에는 기생 유용을 한 것도 죄목에 추가되기는 했다. 그런 만큼 관리와 기생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널리 퍼져있던 풍토였다.

 

[「화성원행의궤도(華城園幸儀軌圖)」中 헌선도(獻仙桃)와 몽금척(夢金尺) : 헌선도는 고려 때 들어온 당악정재(唐樂呈才)로 왕모(王母)가 선계(仙界)에서 내려와 선도(仙桃)를 주는 내용. 몽금척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당악정재(唐樂呈才)로 신령이 꿈에 태조에게 금자[金尺]를 내려주며 그것으로 국가를 정제하라고 하였다는 내용]

 

국가에서 양반 사대부들과 기생의 관계에 더 엄격한 대처를 할 수 없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기녀제도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던 측면도 있다. 지방 각 고을의 기녀는 관아에서 관리하였다. 그리고 그 관아의 최고위자는 수령이다. 관기들은 기본적으로 수령의 어떠한 명령이라도 따라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생각하면, 비록 기생이 수청을 거절할 수는 있었다고는 하지만 노비 신분인 기생이 자신의 생사권을 쥐고 있는 고을 수령의 청이나 명령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춘향전에 성춘향이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는 것은 그래서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다.

 

기녀들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각종 행사에서 여악을 담당하고 외국 사신과 왕이 내려 보내는 봉명(奉命)사신들을 접대하는 임무지만, 그런 일들이 매일 있는 것은 아니다. 수령을 모시는 아전들의 입장에서는 평소 한가한 기녀들에게 수령의 수발을 맡기는 것이 인력의 효율적 활용과 자신들의 수고를 덜만한 적합한 인물의 선정이라는 측면에서도 적격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수령이 기녀를 곁에 두기 즐거워하는 인물이라면 산전수전 겪은 노련한 아전들이 이런 일에 소홀할 리가 없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기생이 수령의 수발을 든다고 해서 꼭 수청을 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글을 쓸 때 옆에서 먹을 간다든지 하는 수령의 편의를 돕는 잔심부름을 담당하고 때로는 말벗도 되었다. 조선시대 수령의 임기는 60개월이다. 수령들이 모두 임기를 다 채우고 가는 것은 아니더라도 남녀가 가까이에 오래 있다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고을 수령과 소속 관기의 육체적 관계는 명목상으로는 불법이지만 실상에서는 별 제약 없이 널리 행해지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불법은 기녀를 사적으로 취하는 일이었다. 수령들이 기녀와 육체관계를 맺더라도 대부분의 경우는 수령이 이임하면서 그 관계가 끝나게 되지만, 개중에는 욕심을 부려 서울로 데려가 첩을 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조선시대 관아에서는 관노비 명단인 ‘관노비안(官奴婢案)’을 작성하여 소속 노비를 관리 감독하였다. 기생 역시 관노비이므로 이 관노비안에 이름이 등재되었는데, 고을에 따라서는 비(婢)와 기생(妓生)을 구분하여 따로 명부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관노비안에 올라있는 기녀를 데려다 첩으로 삼는 것은 국가의 재산을 빼돌리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기녀가 관노비안에서 이름이 빠져 면천(免賤)할 수 있는 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가장 일반적 방법으로 나이가 들어 기역(妓役)이 면제되는 것이다.

《경국대전》에 “서울의 경기(京妓)가 50세가 되면 악적에서 빼고 공역을 면제한다.”는 규정이 있어, 공식적으로는 50세가 되면 기생의 역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다른 사람을 대신 노비로 들여보내고 면천을 받는 대립(代立)이고, 세 번째는 국가에서 정한 물품을 바치고 면제받는 대속(代贖)이다. 조선시대에 비(婢)가 대립으로 면천하려면 노(奴) 1명과 비(婢) 1명을 대신 세워야 했고, 대속(代贖)하려면 정해진 화약(火藥)이나 연환(鉛丸) 같은 군기(軍器) 물품을 수백 근(斤)씩 받쳐야 했다. 비(婢)에 속하는 기녀도 당연히 이러한 규정이 적용되었겠지만, 그러나 전하는 관노비안에 이런 방법을 통하여 면천된 사례가 거의 없는 것을 보면 그 부담이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을 수령은 물론 양반 사대부들은 이러한 기녀의 신분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기녀를 데려다 첩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런 행위들은 모두 명백한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널리 행해졌다.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하서(下書)하기를,

"국가에서 경외(京外)의 창기소(娼妓所)를 둔 것은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향(宴享)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듣건대 우후(虞候)·수령(守令) 및 대소 봉사자(大小奉使者)가 사사로이 데려와서 자기 소유로 삼아 주·부(州府)의 인물이 이 때문에 조폐(凋弊)하게 된다 하니, 경(卿)은 엄하게 검핵(檢覈)하도록 하라."하고,

또 사헌부(司憲府)에 명하여 규거(糾擧)하게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7년 10월 27일]

▶우후(虞候) : 각 도 절도사의 막료 무관.
▶조폐(凋弊) : 시들고 해짐.
▶규거(糾擧) : 죄(罪)를 규탄(糾彈)하여 들어 냄

 

 

 

참고 및 인용 :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妓生案’을 통해본 조선후기 기생의 公的 삶과 신분변화(박영민, 대동문화연구 제71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