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10 - 기생 첩

從心所欲 2021. 5. 25. 11:14

허조(許稠, 1369 ~ 1439)는 태종과 세종을 도와 조선 초기의 예악제도(禮樂制度)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강직한 발언으로 좌천되기도 하고 귀양도 갔다. 죽은 뒤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고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묘정(廟庭)에 배향된다는 것은 임금이 생전에 총애하던 신하나 공로가 있는 신하의 신위(神位)를 임금의 사당에 함께 모셔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조선 중기에 성현(成俔)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인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허조(許稠)에 대한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허문경공은 조심스럽고 엄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엄격하고 법이 있었다. 자제의 교육은 모두 「소학(小學)」의 예를 써서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許公)은 평생에 음양의 일을 모른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만약 내가 음양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후(詡, 큰 아들)와 눌(訥, 둘째 아들)이 어디서 났으리요.” 하였다.

이때 주읍(州邑)의 창기를 없애려는 의논이 있어 정부 대신에게 물었더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으며,

사람들은 허공 역시 이를 찬성할 줄 알았다.

공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누가 이러한 방책(方策)을 만들었는가. 남녀 관계는 사람의 본능으로서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주읍 창기는 모두 공가(公家)의 물건이니, 취하여도 무방하나 만약 이 금법(禁法)을 엄하게 하면 사신으로 나가는 나이 젊은 조정 선비들은 모두 비의(非義)로 사가(私家)의 여자를 빼앗게 될 터이니, 많은 영웅 준걸이 허물에 빠질 것이다. 내 생각으로 없애는 것은 마땅치 않은 줄로 안다.” 하였다.

마침내 공의 뜻을 좇아 전과 다름없이 그냥 두고 고치지 않았다.】

 

모든 대신들이 외방의 기녀를 없애는 안에 동의했지만, 평소 남녀 간의 음양의 일을 모른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품행이 방정했던 허조는 오히려 이를 반대했다. 기녀제도를 폐지했을 때에 발생하는 또 다른 폐단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세종 20년인 1438년,

왕위에 오른 지 이미 20년이 된 세종과 그 해에 좌부승지로 임명된 허후(許詡)라는 신하가 이런 대화를 나눴다.

 

【경연에 나아가니 승지 허후(許詡)가 시강(侍講)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듣자오니 대군(大君)이 창기(倡妓)를 축첩한 분이 있다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내가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모든 일은 반드시 나에게 아뢴 연후에 행하고 내가 모르는 일은 부디 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지난번에 임영 대군(臨瀛大君)이 아뢰기를, ‘악공(樂工) 이생(李生)의 딸인 작은 기녀(妓女)를

첩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하기에, 내가 그 정직하게 진달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서 이를 허락한 바 있다."

하매, 허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아들을 옳은 방향으로 가르쳐 불의에 빠져들지 않게 한다.’ 하였사온데, 마음대로 불의를 감행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는 것은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여러 대군에게 경계하시어 반드시 고한 연후에 행동하게 하신 것은 이와 같은 불의의 일이 있을까 염려하심인데, 반드시 고한 연후에 행하라고 이르셨다면 불의의 말을 어찌 감히 입 밖에 내겠습니까. 이는 곧 금하지 않고도 자연 금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대군이 창기를 간통하려고 감히 성상의 총명을 모독하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심히 음일(淫佚)한 것입니다. 지금 비록 엄중히 꾸짖더라도 오히려 능히 막지 못할 것이 염려되실 터인데, 하물며 그 뜻을 좇아 허락하신단 말씀입니까. 지금 만약 금하지 않으신다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심이 있을 것이요, 또 이번에 금하지 않으신다면 나이 젊은 여러 대군들이 장차 성상께서 이미 허락하셨다 이르고, 이 바람을 따라 잇따르게 되면 그 세를 장차 막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창기라고 하지만 시집가지 않은 소녀인데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이 역시 후사(後嗣)를 넓히는 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뒷날 막는 것은 내 처분 여하에 있다."

하니, 허후가 대답하기를,

"진정 후사를 넓히시려고 하신다면 다시 양가(良家)의 처녀를 택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하필이면 창기로 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종친들의 기첩(妓妾)을 다 쫓아내란 말인가."

하니, 이는 당시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와 함녕군(諴寧君) 이인(李䄄)이 모두 기첩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임금이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에 허후가 대답하기를,

"다 내쫓는다고 해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대저 기첩을 둔다는 것은 거의가 다 호협(豪俠)하고 방자한 자가 하는

짓이어서, 조금이라도 지조가 있는 자는 이를 비루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나이 이미 많아서 다시 가르칠 수 없는 자라도 오히려 불가한 것인데, 하물며 대군들은 나이 젊으시고 바야흐로 학문에 힘쓰실 시절이라 더욱 불의와

향락을 가까이 하여 그 마음과 의지를 어지럽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여러 아들 중에서 임영대군은 본래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를 허락한 것이다. 이미 허락해 놓고 다시 이를 내쫓도록 함은 내 차마 못하겠다."

하니, 허후가 대답하여 아뢰기를,

"본래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에 대한 방비와 금지를 더욱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사오며, 또 이미 그 불가함을 아셨으면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잘라야 할 것이니, 비록 이미 허락하셨더라도 어찌 차마 못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이를 허락해 놓고 즉시 버리라고 명한다는 것은 내 진정 차마 하지 못하겠다. 내 앞으로 생각해 보겠노라."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20년 4월 23일]

▶임영대군(臨瀛大君) :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 : 태종의 넷째 아들이자 서자 가운데는 장자(長子)
▶함녕군(諴寧君) 이인(李䄄) : 태종의 서자 가운데 둘째.

 

좌부승지(左副承旨)는 승정원의 정삼품 벼슬이다. 지금 대통령비서실, 즉 청와대의 수석비서관 정도의 위치와 지위다. 왕의 업무를 수발하는 자리에 갓 임명된 신하가 세종을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그것도 거론하기 민망한 왕의 적자인 대군의 축첩에 대한 문제로 왕을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허후의 집요한 공세에 밀려 세종은 한발 뒤로 물러서고 만다.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신하도 아름답고, 자신의 치부를 찌르는 신하의 말을 왕의 권위로 억누르지 않고 끝까지 소통하는 세종 역시 우리가 아는 훌륭한 왕의 모습이다. 어디로 봐서 조선이 폐쇄적 왕권국가인가! 허후는 기녀제도의 폐지를 반대했던 허조(許稠)의 큰아들이다.

 

경녕군과 함녕군은 모두 세종의 이복동생들이다. 아들인 임영대군은 당시 나이가 19세였다.

기사에서 거론된 것만도 왕실에서 3명이나 기생을 첩으로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종친들의 기첩(妓妾)을 다 쫓아내란 말인가."라는 세종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이를 커다란 문제로 여기지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허후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므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겠다는 답변을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달 뒤, 이번에는 사헌부에서 기녀를 첩으로 삼는 일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대명률(大明律)》에 이르기를, ‘관리로서 창가(倡家)에서 자는 자는 장 60대에 처하고, 관리의 자손으로서 창가에 자는 자도 죄가 같다.’고 하였사온데, 본국의 대소 관리가 기생으로 첩을 삼아서 음란하고 더럽고 절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부부가 반목하고 부자 형제가 괴리(乖離)하여, 대대로 향화(香火)의 신의와 금석(金石)의 교제를 닦아 오던 터이라도 서로 시기하고 몰래 중상하는 경우도 있사오며, 또 탐오(貪汚)하여 장물을 범하는 자들은 대개가 여기에서 기인하옵니다. 그 밖에 의리를 저버리고 도덕을 상하게 하는 것은 일일이 들기가 어렵사옵니다. 비옵건대, 지금부터 기생을 첩으로 삼는 자를 일체 모두 금지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위로는 대신으로부터 아래로는 선비와 서민에 이르기까지, 기생첩으로 집안일을 관리하게 하여 적처(嫡妻)와 다름이 없는 자가 꽤 많이 있었으므로, 혹은 이로 인하여 장물죄를 범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 구타하여 상해(傷害)를 입히기도 하여, 서로가 원수가 되어서 선비의 풍속이 불미하였던 까닭으로 이러한 청이 있었던 것이었다.】[《세종실록》 세종 20년 11월 23일]

 

‘장물을 범하는 자’ 또는 ‘장물죄’로 번역된 기사의 원문은 ‘범장(犯贓)’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하는 것’을 뜻하며, 국가의 재산인 기녀를 사적으로 취하여 첩으로 삼는 것이 불법한 행위임을 지적하고 있다. 사헌부는 기녀를 첩으로 삼으면서 일어나는 폐해를 나열하며 기녀를 첩으로 삼는 것을 금지해달라는 청을 올렸으나 세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사를 통하여 이미 조선 초부터 양반 사대부들이 기녀를 첩으로 삼는 일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공자가 말씀하신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라[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라[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실천조목들은 미색(美色) 앞에서는 별 쓸모가 없었던가 보다.

그러나 기녀를 첩으로 삼고 또 그에 따라 생기는 폐단들은 사실 기녀제도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국가의 재산인 기녀를 사적으로 취하는 것은 행위 자체가 불법이고 그런 불법행위 끝에 기녀가 첩이 되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첩으로 삼은 자가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해 생기는 수신제가의 문제다. 기녀를 데려다 첩으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면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는 이 사안을 우리의 위대한 세종대왕께서 거부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무신년 <진찬병풍회(進饌屛風繪)> 中 포구락(抛毬樂)을 추는 장면]

 

어쨌거나 기생을 첩으로 삼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관대하거나 또는 모호한 태도는 결국 조선시대 내내 양반들이 기생을 첩으로 삼는 짓을 반복하도록 조장한 측면이 있다. 이후로도 기생을 첩으로 삼은 것 때문에 처벌을 받은 사례는 거의 없는 듯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불법이 발견되는 경우에는 처벌이 행해지기도 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행 호군(行護軍) 김세적(金世勣)이 이산 군수(理山郡守)가 되었다가 체임되어 올 때에 영변(寧邊) 기생 승두추(勝杜秋)를 서울 기생 경천금(輕千金)의 봉족(奉足)으로 삼으려 청하고 인하여 데리고 온 죄는, 장(杖) 80대를 속(贖)바치게 하고 고신(告身) 3등을 뺏어야 하며,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성귀달(成貴達)은 앞서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를 맡았을 때에 김세적의 요청으로 여기(女妓) 승두추를 서울 기생 경천금의 봉족으로 삼도록 들어준 죄는 태(笞) 50대에 현 직임은 해임하고 별도로 서용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김세적은 명하여 장(杖) 60대만 속(贖)바치게 하였다.】 [《성종실록》성종 11년 4월 27일]

▶봉족(奉足) : 공역(公役)에 복무하는 자를 돕기 위해 금품 또는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 직접 군역을 지지 않는 장정 2인이 정병(正兵)으로 선발된 인원의 비용을 조달하는 경우가 대표적인데, 지방에서 서울로 뽑혀 올라오는 선상기(選上妓)에도 이러한 봉족이 배당되었다.
▶속(贖)바치게 하다 : 형을 집행하지 않고 속전(贖錢)으로 대신하다.
▶고신(告身) :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

 

지방에서 서울로 뽑혀 올라오는 선상기(選上妓)들에게는 소속관아에서 봉족을 배정해주고 그 봉족들은 서울에 같이 올라와서 선상기가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그 살림을 도왔다. 대개의 경우 기생의 봉족으로는 그 가족이나 친척을 배정하는 것이 관례였고 이들 봉족들은 그 기간 동안 원래의 역(役)이 면제된다. 이산군수 김세적은 이러한 제도에 편법을 동원하여 자신이 가까이 하던 기생인 경천금을, 선상기로 선발된 승두추라는 기생의 봉족으로 배정해달라고 평안감사인 성귀달에게 청탁을 해서 서울로 데려왔던 것이다. 성귀달은 부당한 청탁을 들어준 죄로 한성부 좌윤의 자리에서 해임되고, 청탁을 한 김세적은 정4품(正四品) 벼슬인 호군(護軍)의 직첩을 빼앗기고 곤장 60대를 맞는 것은 그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는 것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 사례에서도 보듯, 기생을 첩으로 삼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모두 그 과정에서 저지른 불법으로 인하여 처벌받았을 뿐이다. 이로 미루어 기생을 첩으로 삼는 일은 사회적으로 묵인되던 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관행적으로 행해지던 일이 영조 때에 이르러서 딱 한번 크게 문제가 되기는 했었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기생을 데리고 살던 사람들을 잡아들여 크게 처분(處分)을 가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더욱 격뇌(激惱)하여 잇달아 엄지(嚴旨)를 내려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으로서 진신(搢紳)이라고 명칭하는 자들을 대령(待令)하도록 명하고, 여러 시종(侍從)들을 금부(禁府)에 내려 자수(自首)하게 하였는데, 자수한 10여 인은 가두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미처 자수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가쇄(枷鎖)를 씌워 남간옥(南間獄)에 가둔 다음 기고(旗鼓)·전배(前排) 및 형구(刑具)를 갖추어 혹은 군법에 의거하여 조리돌림을 하였으며, 혹은 곤장을 때려 형벌을 가하고 모두 연해(沿海)와 절도(絶島)에 충군(充軍)시켰다.】[《영조실록》 영조 45년(1769년) 4월 20일]

▶진신(搢紳) : 벼슬아치.
▶가쇄(枷鎖) : 죄인의 목에 칼을 씌우고, 발에 쇠사슬을 채우는 것.
▶충군(充軍) : 죄를 범한 자를 군역(軍役)에 복무하도록 한 형벌.

 

그러나 이 당시에도 기생을 첩으로 둔 조정의 관원들이 많아, 문제가 크게 비화될 조짐이 보이면서 기생 축첩 문제는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참조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妓役의 실태(정연식), 16세기 초엽 기녀제도 개편 양상(조광국, 규장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