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

從心所欲 2021. 5. 29. 15:59

【지난여름에 윤세신(尹世臣)이 나에게 말하기를, “명천(明川)의 남쪽에 칠보산이 있는데, 기이하고 뛰어나며 웅장하고 수려하여, 풍악산(楓嶽山)에 버금갑니다. 그곳에 가보려고 합니다”라고 했다. 내가 그를 말려 말하기를, “잠시 내 일이 한가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나랏일에 얽매여 바쁘고 분주하여 겨를이 없었다. 지금에야 나는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가게 되어, 마침내 가서 보기로 결심했다.】

 

[임형수의 시문집 「금호유고(錦湖遺稿)」中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 시작 부분]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1514 ~ 1547)가 쓴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의 서두이다.

1542년 3월에 이루어진 임형수의 칠보산 유람길에는 미리 약조가 되었던 명천현감(明川縣監), 회령군수(會寧郡守), 경성(境城)향교 교수(敎授) 3인이 동행했다. 출발하는 날은 마침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고 비까지 내려 가느냐마느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임형수가 주도하여 개심사까지 가서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아침 일찍 말을 타고 산에 올라 금강봉 아래에서 말을 내린 뒤 산을 유람하기 시작했는데, 산의 여러 기이한 물상들에 이름이 없는 것을 알고는 한탄하며 이렇게 적었다.

 

【금강산의 바위 하나, 지리산의 봉우리 하나에는 그 이름이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어찌 유독 이 산에서는 기이한 봉우리, 걸출한 바위에 이름이 없는가?

아아! 하늘이 장차 이 산을 숨겨서 바다 구석에 감추어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아마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험하고 멀어서 볼 수 없는 것인가? 본 사람은 있는데, 감히 바위와 산봉우리에 이름을 짓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이름이 있는데 알지 못하는 것인가?

이곳에 와서 유람했던 사람에 대해 물으니 곧 산승(山僧)이 기억하고 본 바의 사람은 단지 이항(李沆) 한 사람뿐이었다. 만약 이공(公)이 그곳으로 귀양을 가지 않았더라면, 이 산은 끝내 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니, 바위와 산봉우리가 이름이 없는 것이 마땅하다. 이공이 또한 이곳에서 죽어서 자기가 본 것을 남에게 전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도 또한 마땅하다.

나는 경악(經幄)에서 임금을 모시던 신하로서, 변두리 구석진 곳에 기탁해 살다가 이곳에 와서 유람을 하니 실로 커다란 행운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긴 곳이 하루아침에 나로 인하여 온 나라에 승경이 알려진다면, 사람 가운데 산을 좋아하는 자가 장차 지리산에 대해 평범한 느낌이 들고 풍악산을 실컷 구경한 뒤에는 즐겁게 칠보산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산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남이 또한 크지 아니한가? 바위와 산봉우리 가운데 이름이 없는 것을 내가 어찌 명명하지 않으랴?】

▶이항(李沆) : 중종 때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의 젊은 선비들을 많이 죽이고, 권세를 부린 까닭에 김극픽(金克愊), 심정(沈貞)과 함께 3간(三奸) 또는 3흉(三兇)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인물이다. 중종 26년에 청탁뇌물을 받은 죄로 함경도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28년인 1533년에 사약을 받았다.
▶경악(經幄) : 왕에게 유학의 경서(經書)나 역사서를 강론하는 일이나 그를 행하는 자리. 경연(經筵). 임형수는 회령판관에 임명되기 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었다.

 

[작자미상 <칠보산도(七寶山圖)>, 지본담채, 61.5 x 298cm, 국립중앙박물관 ㅣ 이 그림의 작가를 평안북도 단천(端川)에 살았던 조선 말기의 화가 우상하(禹尙夏)로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이에 임형수는 눈앞 동쪽에 보이는 봉우리를 만사봉(萬寺峯)이라 이름 짓고, 큰 골짜기를 자하(紫霞洞), 커다란 대(臺)를 봉천(奉天臺), 그 앞의 바위를 부용암(芙蓉巖), 사암(寺巖) 북쪽에 있는 바위를 종각암(鍾閣巖) 등등으로 이름을 붙여갔다.

동행했던 경성(境城) 교수(敎授) 노연령(魯延齡)은 칠보산의 기경을 이렇게 칭찬했다. 대춘(大春)은 노연령의 자이다.

 

【대춘(大春)이 말하기를, “처음에 이 산에 대해 들었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보통의 산들과 조금 다른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닷가에 이러한 모습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내가 산을 본 것이 많은데, 풍악산과 백중을 다툴 만하고, 지리산 등 여러 산은 풍모가 이보다 아래이다. 하물며 기이하게 이상한 모습은 자못 풍악산도 미치지 못할 바이다”라고 했다.】

 

칠보산의 뛰어난 경치에 취한 임형수와 일행은 그곳에서 풍류를 벌였다.

 

【가기(歌妓)가 노래를 부르고 피리 부는 자가 맞추어 노래하니, 소리가 바위와 골짜기에 메아리치고 위로는 하늘에까지 울려 퍼졌다. 문득 신선이 되어 봉래산에 오른 듯 하고, 신선세계에 올라 왕교(王喬)에게 읍(揖)하고 그와 더불어 노니는 듯했다. 머물고 싶으나 속세와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세상일과의 관계가 있어서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산중까지 기녀와 악공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칠보산이 속해 있는 명천현의 현감이 동행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풍류를 벌이고도 미진했는지 임형수는 칠보산에서 선뜻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만약 이 고개를 내려가면 곧 이 산과 떨어지게 되므로 주저하며 차마 가지를 못했다. 눈 위에 앉아 술잔을 꺼내어 바람을 쐬며 노래를 읊조렸다. 마침내 <하산가(下山歌)> 삼결(三闋)을 지어서 고소(姑蘇)에게 노래 부르도록 하여 산신령을 즐겁게 해드리고, 술을 들어 올렸다.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실컷 취한 뒤에 돌아왔다. 또 그곳을 하마대(下馬臺)라고 이름을 붙였다.】

▶고소(姑蘇) : 가기(歌妓)의 이름으로 보인다.

 

그리고 글의 끝에 처음 자신에게 칠보산에 가겠다는 말을 한 윤세신에 대한 소식도 적었다.

 

【아아! 산의 이름을 물은 것은 실로 윤생(尹生)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산을 유람하는 날에 윤생은 세상을 떠났으니 매우 마음이 아프다.】

 

[작자미상 <칠보산도(七寶山圖)> 오른쪽 부분]

 

[작자미상 <칠보산도(七寶山圖)> 중앙 부분]

 

[작자미상 <칠보산도(七寶山圖)> 왼쪽 부분]

 

 

참고 및 인용 : 한국고전번역원, 금호(錦湖) 임형수의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 (2016, 윤호진 남명학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