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13 - 매창

從心所欲 2021. 6. 15. 14:27

황진이의 명성이 워낙 독보적인 탓에 조선에서 사실 황진이에 견줄만한 다른 기생은 없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논개(論介)가 있지만, 논개는 살아생전의 기생으로서가 아니라 의롭게 죽은 행위로써 이름을 얻은 것이기 때문에 그 명성의 의미는 다른 차원이다. 논개는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로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이다.

 

비록 황진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조선시대에 나름의 명성을 얻었던 기생으로는 전북 부안(扶安)의 기생인 매창(梅窓)이 있었다. 황진이보다 약 50년 뒤에 태어난 기생으로, 당대에는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명기(名妓)의 쌍벽을 이룬다는 말을 들었었다.

생몰연도가 알려지지 않은 황진이와는 달리 매창의 문집인 「매창집」 발문에는 그녀의 출생정보와 함께 1573년에 태어났다는 출생기록이 들어있다.

 

그녀는 선조 6년인 1573년에 부안현(扶安縣)의 아전인 이양종(李陽從)의 딸로 태어났다.

아전의 딸임에도 매창이 기생으로 살아간 것으로 미루어, 매창의 어머니는 부안현에 소속된 관비(官婢)이거나 그와 비슷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창의 본명은 향금(香今)이고, 자는 천향(天香)이다.

관기(官妓)들은 모두 관기 명부인 기안(妓案)이나 관노비안(官奴婢案)에 이름을 올리게 되어 있는데, 명부에 올려진 그녀의 이름은 계생(癸生)이었다. 명부를 관리하는 호방(戶房)에서 자신들의 편의를 따라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다 하여 계생(癸生)으로 지은 것이다. 그 후에 계생(桂生), 계랑(癸娘), 계랑(桂娘) 등으로도 불렸지만, 그런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스스로 ‘매창(梅窓)’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매창집」에 적혀있다.

 

매창은 시로써 명성을 얻었다. 채용신이 그린 <팔도미인관기 초상(八道美人官妓 肖像)>에는 청주(淸州)미인으로 매창이 소개되었지만, 실제 매창의 용모는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들어있는 <조관기행(漕官紀行)>에는 허균이 매창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선조 34년인 1601년 7월 23일의 일이다.

 

【부안(扶安)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옥여(李玉汝) : 이귀(李貴, 1557 ~ 1633). 이조참판, 대사헌,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옥여는 이귀의 자.

 

허균은 당시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과 조세를 서울로 실어 나르는 일을 맡아보는 벼슬인 전운 판관(轉運判官)에 제수되었었다. 그래서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하여 보령을 거쳐 영광 법성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허균이 쓴 원문에서는 매창의 외모를 ‘불양(不揚)’이라고 했다. ‘드러나지 않다’거나 ‘칭찬할만하지 않다’로 해석될 수 있으니 생김새가 시원치 않다는 번역이 허균의 느낌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허균이 보기에 끌릴만한 미색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작 허균이 매창에 끌린 것은 그녀의 재주와 정감이었고 두 사람이 종일토록 즐긴 것은 서로 시를 읊고 화답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얼핏 무심히 지나갈 수도 있는 이 대목은 매창이 시문에 뛰어났음을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전(傳)채용신 「팔도미인도」中 <청주미인 매창(淸州美人梅窓)>, OCI미술관]

 

흔히 조선의 기생들은 사대부들을 접대하기 위해 ‘예절에 해당하는 행의(行儀)는 물론 시, 서화(書畵)를 배웠다’는 관례적 문구에 현혹되어 조선의 기생들은 모두 사대부와 시 정도는 언제든 서로 주고받을 정도의 실력을 지녔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쉽다. 기생은 시서화가 주업이 아니고 가무가 주업이다. 같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아도 실력의 차이가 나기 마련인데, 뒤늦게 틈틈이 글을 배운 기생이 평생 공부만 한 선비, 그 중에서도 과거시험을 통하여 나라에서 그 재주를 인정받은 사대부들과 시를 틀 실력을 갖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9세기의 실학자였던 이규경(李圭景)은 옛 글을 인용하여 조선시대에 시에 능한 기생을 꼽았는데 황진이와 매창을 포함해서 불과 10명을 넘지 못했다. 그러면서 “창기로서 시에 능하다는 것은 대단히 뛰어난 일이기 때문에 대략 언급하는바”라고 적었다.

 

허균이 누구인가! 당대에 글로는 자신이 제일이라 속으로 자부하던 인물이다. 그런 허균과 매창이 종일토록 시를 화답했다고 했다. 물론 이 말을 확대 해석해서 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허균은 기생인데도 시를 읊을 줄 아는 매창이 기특해서 같이 맞상대해줬을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다 못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도 그 수준이 너무 차이나면 같이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그런데 둘이 마주 앉아 시를 그렇게 오랫동안 주고받았다는 것은 매창의 실력이 웬만큼은 되었다는 얘기다. 다른 기생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재주였던 것이다. 허균은 자신의 시에서 매창을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예인"이라고 칭했다.

 

허균의 글에서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한 것은 나중에라도 자신이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적었듯이 매창은 이귀의 정인(情人)이라고 했다. 이귀는 1599년에 부안과 이웃한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일이 있어 이때 매창과 인연을 맺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매창의 진짜 정인은 따로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다.

 

유희경은 천민 출신이나 한시를 잘 지어 당시의 사대부들과 폭넓은 교유를 했던 인물이다.

유희경이 40대 후반에 호남지방을 유람하던 중 부안을 지나는 길에 매창을 만났다. 매창과 유희경 모두 명성이 전국에 널리 퍼져있었던 터라 서로 상대방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때 유희경은 <계랑에게[贈癸娘]>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曾聞南國癸娘名 남쪽 나라 계랑의 이름을 일찍이 들었는데

詩韻歌詞東洛城 시와 노래 솜씨가 서울까지 울렸어라

今日上看眞面目 오늘에서야 그녀의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선계에서 내려온 듯하여라.】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매력에 끌렸던 모양인 지, 28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바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때가 매창의 나이 20세 즈음이었으니 유희경과의 연분이 이귀보다도 훨씬 앞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하는 시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끝이 났다. 유희경이 의병을 모아 싸우려는 결심으로 부안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후 15년간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매창의 시조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는 이때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부안군 매창공원 내의 매창 시비, 부안군청 사진]

 

옛 시조 작품을 정리하여 편찬한 가집인 「가곡원류(歌曲源流)」에는 이 시에 “유희경의 애인이었는데 촌은이 서울로 돌아간 뒤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 노래를 짓고 절개를 지켰다.”라는 주를 덧붙였다. 그러나 이후에 매창이 이귀의 정인이 된 것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절개의 의미가 모호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매창이 죽을 때까지 유희경을 사모했던 사실은 그녀가 남긴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平生不學食東家 평생 여기 저기 떠도는 생활 배우지 않고

只愛梅窓月影斜 오로지 매창에 빗긴 달만 사랑했네

時人未識幽閑意 사람들은 유한한 뜻을 모르고

指點行雲枉自多 뜬구름이라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네】

 

<근심스런 생각[愁思]>이라는 이 시는 일찍이 어떤 과객(過客)이 매창의 명성을 듣고 시를 지어 유혹하자, 매창이 그 시에 차운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기생의 몸으로 어쩔 수 없이 여러 남자를 상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마음만은 늘 유희경을 사모했던 증거로 해석되고 있다.

유희경과 매창은 헤어진 지 15년 만에 다시 잠깐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이내 다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610년 매창은 38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매창집」은 매창의 한시집이다. 이 「매창집」의 발문에 “평생 시 읊기를 잘하고 지은 바 시 수백 수가 인구에 회자되었다.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1668년 10월에 이배(吏輩)들이 전송(傳誦)하는 것을 얻어 모아 각체 58수를 판 짠다.”고 하였다. 이처럼 「매창집」은 매창의 사후 60여년 후에 부안현의 아전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던 매창의 한시 58수를 모아, 변산의 개암사(開巖寺)에서 목판에 새겨 간행되었다.

일개 기생의 시를 60여년이 지나도록 고을의 아전들이 외우고 있고, 또 그것을 모아 시집을 발간할 만큼 매창의 시재(詩材)가 뛰어났고 또한 사랑받았다는 증거이다.

 

매창의 죽음을 알게 된 허균은 <계랑(桂娘)의 죽음을 슬퍼하다[哀桂娘]>는 글을 지어 애도하였다.

 

【계생(桂生)은 부안(扶安)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妙句堪擒錦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

淸歌解駐雲 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

偸桃來下界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

竊藥去人群 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

燈暗芙蓉帳 부용의 장막에 등불은 어둑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에 향내는 남았구나

明年小桃發 명년이라 복사꽃 방긋방긋 피어날 제

誰過薜濤墳 설도의 무덤을 어느 뉘 찾을는지

凄絶班姬扇 처절한 반첩여의 부채라

悲涼卓女琴 비량한 탁문군의 거문고로세.

飄花空積恨 나는 꽃은 속절없이 한을 쌓고

衰蕙只傷心 시든 난초 다만 마음 상할 뿐

蓬島雲無迹 봉래섬에 구름은 자취가 없고

滄溟月已沈 한바다에 달은 하마 잠기었구나.

他年蘇小宅 다른 해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殘柳不成陰 낡은 버들 그늘을 이루지 못하네】 [『성소부부고』 제2권 병한잡술(病閑雜述)]

▶선약(仙藥)을 …… 떠나다니 : 예(羿)가 서왕모에게서 불사약(不死藥)을 얻어다 놓고 미처 먹지 못하고 집에 둔 것을 그의 처 항아(姮娥)가 훔쳐 먹고 신선이 되어 달로 달아나 월정(月精)이 되었다고 한다.
▶설도(薛濤) : 음률(音律)과 시사(詩詞)에 능하였던 당(唐)나라 중기의 명기(名妓). 여기서는 계생(桂生)을 이에 비유한 것.
▶처절한 …… 부채 : 반첩여(班婕妤)는 한 성제(漢成帝) 때의 궁녀로 한때 황제의 사랑을 받다가 황제가 다른 여인을 총애하자, 자신의 신세를 소용없는 가을 부채[秋扇]에 빗댄 원가행(怨歌行)이라는 시를 지었다.
▶비량(悲涼)한 …… 거문고 : 탁문군(卓文君)은 한(漢) 나라 촉군(蜀郡) 임공(臨邛)의 부자 탁왕손(卓王孫)의 딸이다. 과부로 있을 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거문고 소리에 반해서 그의 아내가 되었는데 후에 사마상여가 무릉(茂陵)의 여자를 첩으로 삼자 백두음(白頭吟)을 지어 자기의 신세를 슬퍼하였다.
▶소소(蘇小) : 남제(南齊) 때 전당(錢塘)의 명기(名妓). 전하여 기생의 범칭으로 쓰인다.

 

[부안군 매창공원 내의 매창 묘, 부안군 문화관광 사진]

 

 

참고 및 인용 : 성소부부고(허균,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여성시사(조연숙, 2011.국학자료원), 인물한국사(2013, 신병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