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17년인 1793년 11월에 장령(掌令) 강봉서(姜鳳瑞)가 이런 상소를 올렸다.
【"제주도는 여러 차례 흉년이 들었지만 지난해처럼 추수할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굶어 죽은 사람이 몇 천 명이나 되는지 모르는데, 올해 8월에 또 큰 바람이 연일 불어서 정의현(旌義縣)과 대정현(大靜縣)은 적지(赤地)나 다름없고 제주 좌면(左面)과 우면(右面)도 혹심한 재해를 입어 내년 봄이면 틀림없이 금년보다 배나 더 굶주림을 호소할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 이철운(李喆運)은 밤낮없이 술에 취하여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환곡을 마구 받아들이면서 매 섬[斛]마다 반드시 두서너 말의 여유 곡식을 더 받고 나누어줄 때는 곡식 1말과 7, 8되[升]에 불과한데도 그 남은 곡식은 끝내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이송한 곡식 1만 포는 전적으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큰 말로 받아들이고 끝에 가서는 작은 말로 나누어주어 매섬에서 2말씩 남은 것이 합하여 1천여 섬이나 됩니다. 그리고 해남(海南)에서 옮겨 올 곡식의 남은 숫자인 11섬은 애당초 실어오지도 않고 군교를 보내어 돈으로 환산해서 베와 명주를 샀습니다.“】
▶장령(掌令) : 감찰업무를 담당하던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4품 관직 ▶적지(赤地) : 흉년(凶年)으로 인하여 농작물을 거둘 것이 없게 된 땅 |
상소의 내용은 극심한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는 제주도 백성의 실정과 그런 백성의 고통을 외면한 채 사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제주목사를 비롯한 관리들의 비리에 대한 것이었다.
상소를 받아 본 정조는 기근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에 깜짝 놀랐다. 정조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제주도에 나라의 손이 두루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조정의 논의를 거쳐, 기근의 피해와 관리들의 비리에 대한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안핵어사(按覈御史)를 파견하였다.
▶안핵어사(按覈御史) : 지방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것을 조사하기 위하여 왕명을 받아 파견되던 어사(御史). |
이때 안핵어사(按覈御史)로 급파된 심낙수(沈樂洙)는 제주도에 도착하여 제주(濟州), 대정(大靜), 정의(旌義) 등의 세 고을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정조에게 보고했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대체로 세 고을의 굶어서 죽은 사람의 숫자가 6백여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서 얼핏 보아도 극히 놀랍습니다. 그런데 봄과 여름 사이에 섬 전체에 전염병이 크게 성하였고 거듭 흉년이 들어서 병든 사람은 굶어서 죽고 굶은 사람은 병들어 죽었는데, 조건 없이 지급하여 구제한 하루치의 양식이 장정은 5홉에 불과했으니 굶주리고 병든 사람을 일일이 온전하게 살리는 데에 방도가 없습니다.“】[《정조실록》정조 18년 3월 2일]
애초의 상소대로 몇 천 명까지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많은 백성들이 죽었고, 또 관리들의 비리혐의도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당시 제주도는 태풍과 같은 이상기후로 인하여 이미 1792년부터 수년째 계속된 흉년으로 제주도민들은 극심한 기근을 겪고 있던 상황이었다.
제주도의 옛 기후를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오진박사에 의하면, 이때가 제주도가 겪었던 3대 기근 중 하나인 임을대기근이었다. 1792년이 임자년(壬子年)이고 1795년이 을묘년(乙卯年)이라 두 해의 앞 글자를 따 ‘임을(壬乙)대기근’으로 명명된 이 4년 동안의 기근에, 제주도 인구의 거의 1/4에 가까운 사람들이 굶주려 죽었다고 한다.
안핵어사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육지에서 쌀을 보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賑恤)하게 하였다. 하지만 제주도의 흉년은 그 다음해까지 계속되면서 제주도의 식량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계속 제주도에 쌀을 보내면서 어떻게든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제주도까지 곡식을 운송하는 뱃길도 문제였다. 험한 바닷길로 인하여 배가 침몰할까봐 정조는 육지에서 곡식을 실은 배가 떠날 때마다 노심초사하며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실제로 1795년 윤2월 조정에서 주선한 5천 섬의 구휼미를 제주도로 내려보내는 과정에서, 쌀을 실은 배 12척 가운데 5척이 난파당하는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1795년까지 계속되는 흉년을 힘들게 넘긴 1796년 6월, 당시의 제주목사(濟州牧使) 유사모(柳師模)는 진휼을 마친 것에 대한 장계(狀啓)를 정조에게 올렸다. 보고서의 내용에는 제주도 내에서 자발적으로 곡식을 내어 백성을 진휼한 인물들과 내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끝부분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노기(老妓) 만덕(萬德)은 사리상 진실로 구할 것이 없는데도 재물을 가볍게 여길 줄 아니, 비천한 무리가 더욱 능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주도의 늙은 기생 만덕이 아무 보답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재산으로 쌀을 마련하여 백성의 진휼에 보태고자 한 것은, 기생이라는 비천한 신분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내용이다. 이때 제주목사의 장계에는 만덕이 쌀 60섬을 내놓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만덕은 임을대기근 동안 모두 500섬의 쌀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목사의 장계를 본 정조는,
“노기 만덕은 그가 무엇을 구하기에 이렇게 100포(包)에 가까운 백대미(白大米)를 마련하여 굶주리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인가. 면천(免賤)을 해 주든지 별도로 보상해 주든지 간에 경은 그가 원하는 대로 시행해 준 뒤에 거행 상황을 장계로 보고하라.”고 전교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5달 뒤인 정조 20년(1796년) 11월 25일의 《정조실록》에는 다시 이런 기사가 실렸다.
【제주(濟州)의 기생 만덕(萬德)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목사가 보고하였다.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바다를 건너 상경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하였다. 허락해 주고 나서 연로의 고을들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게 하였다.】
제주목사가 만덕에게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이 이를 사양하고 그 대신 금강산을 유람하게 해달라는 청을 한 것이다. 당시 제주여인은 바다를 건너 뭍에 오르는 것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이런 규례를 깨고 만덕이 뭍으로 올라와 금강산을 유람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제주목사의 장계에도 만덕을 늙은 기생[老妓]이라 했고 정조도 같은 단어를 사용했지만 실상 그때 만덕은 기생의 신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기생이라 했을까?
만덕이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려할 때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은 만덕을 위하여 손수 <만덕전(萬德傳)>이라는 글을 지어 만덕에게 주었다.
【만덕의 성은 김(金)이다. 탐라(耽羅)의 양가집 딸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어 기녀에게 의탁하여 생을 도모했다.
조금 자라자, 관부(官府)에서는 만덕의 이름을 기적(妓籍)에 올렸다.
만덕은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생으로 일했지만 스스로는 기녀라 여기지 않았다.
나이 20여 살 때 관(官)에 찾아가 전후 사정을 눈물로 호소하자, 관아에선 그녀를 불쌍히 여겨 기안(妓案)에서 이름을 지워 다시 양인(良人)이 되었다.
만덕은 비록 집에 노예로 고용되어 지냈지만 탐라의 장부를 남편으로 맞이하진 않았다.
그녀는 재화를 불리는 데 장기가 있어, 물건에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여
내다 팔기도 하고 쟁여두기도 하였다.
이에 수십 년이 흐르자 많은 재산이 쌓이고 이름도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 임금 19년인 을묘년(1795)에 탐라에 대기근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덧없이 죽었다.
임금께선 구휼선을 보내 백성을 먹이고자 하셨으나 한양에서 탐라까지 800리라
바람이 돛에 불어와 베틀의 북 같이 빠르게 가더라도 오히려 제 때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때에 만덕이 천금을 내어 쌀을 사오도록 하니, 육지의 모든 군현(郡縣)의 뱃사공들이 제 때에 도착했다.
만덕은 그 중에 1/10을 취하여 일가친척을 살렸고, 나머지는 모두 관아로 보냈다.
굶주려 부황병(浮黃病)에 걸린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는 관아 마당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관아에선 완급을 조절하여 구제하고, 나누어줄 때에도 차등을 두었다.
그러자 남녀 할 것 없이 밖으로 나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며,
“우리를 살린 사람은 만덕이다.”라고 하였다.
진휼이 끝난 뒤 탐라목사는 그 일을 조정에 알렸다.
그러자 임금께선 크게 기이하게 여겨 회답하여 이르시기를,
“만덕이 원하는 게 있거든, 쉽고 어려움을 가리지 말고 특별히 시행하라.” 하셨다.
탐라목사는 만덕을 초정하여 임금의 말씀을 전하며 “그대는 무슨 소원이 있는가?”고 물었다.
이에 만덕이 대답하기를
“특별한 소원은 없습니다.
다만 바라기는 한 번 서울에 들어가 성군께서 계신 곳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 다음엔 금강산에 들어가 일 만 이천 봉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대개 탐라의 여인은 바다를 건너 뭍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는 국법이다.
탐라목사가 다시 이러한 만덕의 바람을 임금에게 알리니,
임금께서 그 바람대로 하고 관아에선 역마를 내어주고 먹을 음식을 번갈아 주도록 명하셨다.
만덕의 돛단배는 넒은 구름바다를 건너
병진년(1796) 가을에 한양에 들어와 한두 번 상국(相國) 체제공을 만났다.
상국이 그러한 상황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는 선혜청에서 달마다 곡식을 제공하라 명하셨다.
서울에 거한지 수일 후에 임금께서는 내의원 의녀로 삼아 모든 의녀들의 우두머리[반수(班首)]가 되도록 하셨다.
만덕은 의례에 따라 중궁전의 앞문으로 들어가 문안을 올린 뒤 의녀로서 시중을 들었다.
이때 임금께서 전교를 내려
“너는 일개 아녀자로서 의기(義氣)로 천백 명을 구해냈으니, 기이하구나!” 하셨다.
그리고는 후한 상을 내리셨다.
궁궐에 머문 지 반 년만인 정사년(丁巳年, 1797) 3월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만폭동과 중향성의 기이한 명승지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러다 금불상을 만나면 큰 절을 하고 공양에 정성을 다했다.
대개 불법이 탐라국에 유입되지 않았기에, 만덕은 당시 58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사찰에 있는 불상을 본 것이다.
마침내 안문령(鴈門嶺)을 넘어 유점사를 거쳐 고성에서 내려가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통천의 총석정에 올랐다. 이로써 천하의 아름다운 경관을 다 보았다.
연후에 다시 한양으로 들어와 며칠 동안 머물렀다.
장차 탐라로 돌아가려 할 때 내원 궁궐에 나아가 복귀할 것을 알리니,
전(展)과 궁(宮)에서 한양에 처음 왔을 때처럼 상을 하사하셨다.
이때에 만덕의 소문이 도성에 자자하여 공경대부와 선비들이 한 번이라도 만덕의 얼굴을 보고자 하지 않음이 없었다.
만덕이 떠날 때 채상국에게 인사하면서 목이 메어 말하기를,
“이번 생에서 다시금 상공의 얼굴을 뵐 수 없겠습니다.” 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상국이 말하기를,
“진시황제와 한무제는 모두 해외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말해왔다네.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한라산이 곧 영주(瀛洲)산이고, 금강산을 소위 봉래산’이라고 하지. 그대는 탐라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 물을 떠서 마셨으며, 이번엔 또한 두루 금강산을 다녔으니, 삼신산 중에 두 산을 손에 쥔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천하 억조의 남자들도 능히 이루지 못한 일이라네.
그런데 지금 이별에 임하여 도리어 아녀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에 그때의 일을 기록하여 <만덕전>이라 짓고는 웃으며 그녀에게 주었다.
성상(聖上) 21년 정사년 하지(夏至) 날에 번암채상국의 나이 78세 때, 서재인 충간의담헌(忠肝義膽軒)에서 쓰다.】
만덕은 1739년, 지금의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에서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만덕의 아버지는 전라도 나주와 제주를 오가며 제주의 미역과 전복, 귤 등을 팔고, 육지의 쌀을 제주에 가지고 와서 파는 상인이었다. 만덕이 11세 되던 해에 나주에서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사망하였고, 이듬해에 어머니도 그 충격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외삼촌 집에서 살다가 퇴기 월중선(月中仙)에게 의탁하였다.
만덕이 한양에 올라와 6개월을 머문 뒤에 금강산으로 가게 된 것은 정조의 배려였다. 채제공의 글에는 만덕이 가을에 한양에 올라왔다고 했지만 이때가 음력 11월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겨울을 지내고 날이 풀린 뒤에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준 것이었다. 만덕은 한양에서는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의 부인 처소에서 지냈다고 하니, 조정에서 만덕의 선행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극진히 대우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채제공의 글에 한양의 여러 사람이 만덕을 만나고 싶어 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그만큼 만덕이 장안의 화제였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이때 만덕의 눈동자가 두 개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던 모양이다. 정약용은 직접 만덕을 만나 그녀의 눈동자가 정말 둘인지를 확인하고 이에 대한 글까지 남겼다.
『다산시문집』에 들어있는 <중동(重瞳)에 대한 변증[重瞳辨]>이 그것이다. 중동(重瞳)은 눈에 눈동자가 두 개가 있다는 말이다.
【제주(濟州)의 기녀(妓女) 만덕(萬德)이 자기의 재산을 희사하여 진휼(賑恤)을 하고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하겠다고 간청하므로, 역마(驛馬)로 불러서 한양(漢陽)에 오게 하였다. 만덕이 스스로, 자기의 눈은 중동(重瞳)이라고 하자, 공경(公卿)들이 서로 전하면서 이야기꺼리로 삼았다. 그래서 내가 그를 초치(招致)하여 묻기를,
“너의 눈이 중동(重瞳)이라는 것이 사실이냐?”
하니, 그는,
“그렇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궁실(宮室)과 누대(樓臺)와 초목(草木), 인물(人物)이 너의 눈에는 하나가 모두 둘로 보이느냐?”
하니, 그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는 중동이 아니다.”
하고, 가까이 가서 그의 동자(瞳子)를 보니 그 눈에 흑백(黑白)의 정동(睛瞳)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중동이라는 설(說)이 끝내 횡행하고 그치지를 않으니, 사람들이 허탄(虛誕)함을 좋아하여 스스로 어리석게 되는 것이 이와 같다.
대저 사람의 눈동자에 동인(童人)이 있는 것은 사람의 얼굴이 동자에 비친 때문이다. 누대(樓臺)가 동자에 비치면 작은 누대가 되고 초목(草木)이 동자에 비치면 작은 초목이 되니, 그 작은 모양이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 이 물건을 본 까닭이다. 그러니 만일 동자가 두 개인 경우라면 한 동자가 각각 작은 모양의 물건을 하나씩 비출 것이니, 둘로 보이지 않겠는가. 이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이치이다.
그리고 우순(虞舜)과 항적(項籍)의 눈도 반드시 중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눈이 과연 중동이었다면 물건을 볼 때에 희미하고 착란 되어서 물건의 수목(數目)을 분변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이는 하나의 폐인(廢人)인 것이다.】
▶동인(童人) : 눈동자에 비치는 사람의 형체 ▶우순(虞舜) :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임금인 순(舜)임금. 성이 우(虞)였다. ▶항적(項籍) :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項羽) |
정약용은 이외에도 만덕에 대한 글을 하나 더 지었다. 역시 『다산시문집』에 들어있는 <탐라(耽羅)의 기생 만덕(萬德)이 얻은 진신대부(搢紳大夫)의 증별시권(贈別詩卷)에 제(題)함>이라는 글이다. 정조는 초계문신(抄啓文臣)을 대상으로 하는 친시(親試)에 ‘만덕전’이라는 시제를 냈는데, 이때에 모은 시권(詩卷)에 붙인 글이다.
【을묘년에 탐라(耽羅)에 흉년이 들었는데, 만덕(萬德)이 의연금(義捐金)을 내어 구원하여 줬었다. 그의 소원이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하고자 함이었는데, 임금의 분부로 소원을 들어 주게 하였다.
병진년 가을에 탐라(耽羅)의 기생 만덕(萬德)이 역마(驛馬)로 서울에 불려왔고, 이듬해 봄에 만덕이 금강산(金剛山)에서 돌아와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적에 좌승상(左丞相) 채공(蔡公)이 그를 위해 소전(小傳)을 지어 매우 자세하게 서술하였으므로 나는 덧붙이지 않는다.
나는 만덕에게는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적(妓籍)에 실린 몸으로서 과부로 수절한 것이 한 가지 기특함이고, 많은 돈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 두 가지 기특함이고, 바다 섬에 살면서 산을 좋아함이 세 가지 기특함이다.
그리고 여자로서 중동(重瞳)이고 종의 신분으로서 역마(驛馬)의 부름을 받았고, 기생으로서 중[僧]을 시켜 가마를 메게 하였고, 외진 섬사람으로 내전(內殿)의 사랑과 선물을 받은 것이 네 가지 희귀함이다.
아, 보잘것없는 일개 여자로서 이러한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을 지녔으니, 이 또한 하나의 대단히 기특한 일이다.】
▶을묘년 : 1795년, 병진년 : 1796년 ▶채공(蔡公)이...소전(小傳) : 채제공(蔡濟恭)이 지은〈만덕전(萬德傳)〉 |
제주도의 연혁과 생활, 풍속, 인물 등을 조사하여 수록한 「제주도실기(濟州島實記)」라는 책에는 만덕의 외모와 행실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몸이 비대하고, 키가 크고, 말씨가 유순하고, 후덕한 분위기가 나타났으며 눈은 쌍꺼풀이며 칠순이 되도록 성상(聖上)이 잡으셨던 왼 손목을 비단으로 감싸서 살빛을 감추었고 흰머리와 얼굴빛은 희여서 부처라 불렸다.】
김만덕은 73세이던 1812년에 작고하였다. 김만덕이 사망한 지 30여 년이 지난 1840년,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에 유배된 해에 김정희는 김만덕의 양자에게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졌다.’는 뜻의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편액을 써서 주었다고 하는데 후손이 간직하다가 모충사(慕忠祠)에 기증되었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번암집(한국고전번역원), 여유당전서(한국인문고전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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