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16 - 기생의 지아비

從心所欲 2021. 7. 7. 15:25

인조(仁祖) 대 이후로는 서울에 악가무를 전업으로 하는 장악원 여기(女妓)를 따로 두지 않았다. 소위 경기(京妓)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물론 내의원, 혜민서의 의녀(醫女)와 공조, 상의원의 침선비(針線婢)는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그들은 장악원 소속도 아니고 연향에 보조자로 동원될 뿐 악가무가 주업도 아니다.

그래서 궁중의 연향행사가 있으면 그때마다 각 지방에서 뽑아 올린 선상기(選上妓)들이 서울로 올라왔다가 궁궐 행사를 마치면 다시 자기 소속 고을로 돌아가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런 체제는 이후 조선 말기까지 계속 유지되었고, 영조 대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도 “진연 때에, 여기 52명을 선상한다. 특별한 지시가 있으면 가감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서울에 따로 머물 곳이 없는 이들 선상기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숙소는 예조에서 제공해주지만, 연산군 때와 같이 단체로 머물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사가(私家)에서 머물러야 했다. 또한 관에서는 이들의 신변보호와 관리를 위한 담당자를 지정해 주었는데 그 명칭이 ‘지아비[기부(妓夫)]’였다. 이들 기생의 지아비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신분이 정해져 있었다. 각 전(殿)의 별감, 포도청 군관, 승정원의 사령, 의금부 나장, 왕실이나 외척의 청지기인 겸인(傔人)과 무사(武士)만 가능했다.

 

별감(別監)은 대전, 중궁전, 세자궁에 배치되어 왕과 왕비, 세자의 행렬을 호위하고 인도하는 역할과 함께 왕과 세자의 세수간(洗手間)과 무수리간[수사간(水賜間)에서 시중드는 것과 같은 잡일을 담당하였다. 성종 대에는 대전별감 46인, 중궁전별감 18인, 세자궁별감 18인 등 모두 80인이었다.

포도군관(捕盜軍官)은 조선시대의 경찰관서인 포도청에 속하여 범죄자를 잡아들이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하급 관리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좌포청(左捕廳)과 우포청(右捕廳)으로 나뉘어 두 곳의 포도청이 있었고, 각 포도청마다 70인의 군관이 있었다.

정원사령(政院使令)으로 불리는 승정원 사령은 왕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심부름을 하던 이속(吏屬)이다.

의금부(義禁府) 나장(羅將)은 원래 병조(兵曹) 소속이지만 의금부에 배속되어 죄인을 잡아들이거나, 문초할 때 매를 때리는 일을 맡아 보았으며, 귀양 가는 죄인을 압송하는 일을 담당하는 하급 서리(胥吏)이다. 조선시대 신분적으로 천대받는 7가지 구실아치를 뜻하는 칠반천역(七般賤役)의 하나였다. 의금부 나장의 정원은 시기에 따라 40명에서 80명 사이였다.

청지기는 한 집안의 잡무를 총괄하여 맡아보는 집사와 같은 직책이다. 신분은 천민이 아닌 양인(良人) 출신으로 주인의 잔심부름과, 편지 전달, 손님 안내와 함게 경우에 따라서는 재정까지도 맡아본다. 기생의 지아비에는 왕실과 외척처럼 왕과 관련된 집안뿐만 아니라 당대의 권력 있는 세도가 집안의 청지기들도 발을 들여놓았다.

무사(武士)는 중인 계층에 의해 신역(身役)으로 세습되던 군교(軍校)나 각 군영(軍營)에 속한 하급 장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생의 지아비가 될 수 있던 이들은 대개 잡역에 종사하는 중인 신분으로,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구실아치들이다. 팔반사천(八般私賤) 중의 하나인 기생을 관리하는 데는 이 정도의 신분이 적합한 것으로 판단했던 듯하다. 비록 그들의 직책이나 신분이 높지는 않지만 예나 지금이나 근무처의 위세를 등에 업고 밖에서 대놓고 행세하는 것은 이런 부류들이다. 십 수 년 전 청와대에서 청소를 담당하는 기능직 5급인가 6급의 인물에게 수억 원을 주고 무언가 청탁을 했다는 기사가 난 일이 있었다. 내부사정을 모르는 일반인에게는 그냥 근무처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힘을 가진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조선의 기생 지아비들 중에서도 특히 별감, 그 중에서도 왕의 거처인 대전(大殿)에서 근무하는 대전별감의 세도가 가장 컸다. 기록에 등장하는 별감의 호칭은 액례(掖隷)이다. 액정서(掖庭署)의 하례(下隷) 즉 종이나 하인이라는 뜻이다. 액정서(掖庭署)는 왕과 왕족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관리 등을 관장하던 환관전용 관서이다. 소속은 액정서이지만 각 전(殿)에 배속되어 근무를 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하는 일이 허드렛일이나 심부름일지라도 같이 근무하다 보면 신분의 차이를 넘어 벼슬아치들과도 같은 곳에 근무한다는 동질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들은 벼슬아치들의 비호도 받기 마련이다.

《영조실록》영조 17년(1741년) 8월 8일 기사이다.

 

【형조 좌랑 이길보(李吉輔)를 의금부에 하옥(下獄)시켰다. 처음에 액례(掖隷) 등이 창녀(娼女)를 끼고 음악(音樂)을 베풀어 모여서 술을 마시는 것을 형리(刑吏)가 붙잡자, 액례들이 여럿이서 일어나 두들겨 팼다. 형조 참의(刑曹參議) 임정(任珽)이 액례와 창녀 두 사람을 붙잡아 가두자, 승지 신사건(申思建)이 액례를 위하여 그 형리를 가두고, 임금에게 말하여 임정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형조 낭관 이길보(李吉輔)를 도태할 것을 명하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낭관은 죄가 없으니, 청컨대 잡아다 사실을 밝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액례가 교만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니, 비록 사대부(士大夫)일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신사건이 이미 승정원에 있으면서 액례를 억제하지 못하고 도리어 형관(刑官)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액례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요즘도 권력기관의 하위직 근무자들이 술 먹고 깽판 치다가 제지하는 경찰을 팼다는 기사들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나오는데 바로 그런 경우다. 그런데 이 액례들의 상관이라 할 승지의 행태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형조참의(刑曹參議)는 형조의 정3품 당상관직으로 판서, 참판에 이어 형조에서 3번째로 높은 지위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법무부 차관보쯤 되는 지위이다. 청와대 수석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심부름하는 직원들이 잘 못하고도 오히려 경찰을 두드려 팼는데, 대통령에게 자신의 사무실 직원을 체포하려 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법무부 차관보를 조사하라고 건의한 것이다.

 

사관이 사론에도 썼듯 벼슬아치들 이런 비호를 하는 지경이면 이들이 궁궐 밖에서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 영조 같은 임금이 승지의 말 한마디에 바로 형조의 정6품 관리를 하옥시킨 것도 평소 은연중에 이들을 내 식구라고 생각했다는 증거다. 그러니 그들의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지 않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일이다.

그래서 약방기생은 모두 세도가 가장 큰 대전별감(大殿別監)들의 차지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 뒤를 이어 상방기생은 형조(刑曹)의 서리나 포도군관의 차례이고, 가장 낮은 혜민서(惠民署) 침선비들은 금부나장(禁府羅長)이나 정원사령(政院使令)들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기생의 지아비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기생과 부부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명색이 관기(官妓)이지만 기생들이 관에서 지급받는 봉록은 전혀 없다. 다만 관에서 정해준 봉족(奉足) 2인에게서 각기 1년에 포(布) 12필을 받는 것으로 생계를 감당했다. 그러나 이것도 기생에 딸린 봉족들의 부담이 과중하다고 하여 효종 대에 이르러서는 6필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들이 서울에 뽑혀 올라온다고 해서 관에서 여비나 서울에서의 생활비를 따로 주는 것이 아니다. 연산군 때에는 잠시 봉록을 내려주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을 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관에서는 이들이 사적으로 기방영업을 해서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지아비제도를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지아비가 기생의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대신 기생의 기방영업권을 갖게 해준 것이다. 그토록 여악을 챙겼던 연산군이 “운평악은 그 지아비까지 개록(開錄)하였다가 급보나 지아비가 죽거든 입계(入啓)하고서 고치라."고 지시한 것만 보아도 이러한 제도는 왕까지 용인했던 제도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기생의 지아비가 된다는 것은 기생의 간판남편으로서 기생에게 영업을 할 수 있는 장소와 여건을 마련해주고 건달 등의 행패로부터 그녀들을 보호해주며 기방영업에서 생기는 이익의 얼마를 챙긴다는 의미다. 이것 또한 이권이었기 때문에 그 자격에 엄격한 제한을 둔 것이다. 지방에서는 이 역할을 기생어미라는 이름의 여인들이 담당했다. 이러한 기생과 지아비 간의 영업적 관계에서 기생과 지아비가 실제 부부관계가 될 가능성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상호 간에 영업적으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아비와 기생의 관계는 신윤복의 그림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유곽쟁웅(游廓爭雄)>,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신윤복 「혜원전신첩」中 <야금모행(夜禁冒行)>,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그림 속에 황초립(黃草笠)을 쓰고 홍철릭을 입은 인물이 그 유명한 별감(別監)이다. <유곽쟁웅(游廓爭雄)>에서는 기방에서 벌어진 손님들과의 싸움을 말리고 있고, <야금모행(夜禁冒行)에서는 밤중에 기생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려고 하는 양반에게 별감이 무언가 주의를 주는 듯한 모습이다. 모두 기생 지아비로서의 역할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지방에서 올라온 선상기 뿐만 아니라, 서울의 경기(京妓) 그리고 의녀와 침선비들이 여악에 동원되면서는 그들까지 포함하여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16세기 초엽 기녀제도 개편 양상(조광국, 규장각),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보고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