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18 - 성(性)풍속

從心所欲 2021. 7. 23. 16:57

유학(儒學)의 나라 조선은 ‘남녀(男女)’하면 ‘유별(有別)’이란 단어부터 떠오를 정도라, 남녀 간의 관계가 매우 엄격한 만큼 성관계도 매우 절제되었을 것이라는 선입감을 갖게 된다. 물론 지배계층인 양반들 사이에서는 그런 모양새를 갖추려 노력했고 또 갖춘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양반들은 신분이 다른 계층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잣대를 적용했다. 양반 부녀자들은 수절이니 정절이니 하는 가치관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아래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가치관을 따르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다. 기생이나 노비의 정절은 지킬 만한 가치도 없고 대상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조와 인조 때 각기 부방(赴防)을 했던 부자(父子)가 있었다. 부방(赴防)이란 무과(武科)에 급제한 무관(武官)들이 아직 벼슬에 오르기 전, 서북 변경의 국경지대에 파견되어 약 1년간 방위임무를 담당했던 것을 가리킨다. 성종 때부터 실시되었다.

아버지 박계숙(朴繼淑, 1569 ~ 1646)은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605년부터 함경도 회령에서 약 1년을 부방하였고, 아들 박취문(朴就文, 1617 ~ 1690)은 그로부터 약 40년 뒤인 1644년 무과에 급제하자마자 곧바로 아버지가 근무했던 회령에서 역시 1년여를 부방하였다. 박계숙의 무과 급제년도와 부방의 시기가 차이를 보인 것은 그 사이에 임진과 정유의 양 왜란이 있었던 까닭으로 보인다.

 

이들 부자는 자신들이 부방을 위하여 출발한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의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을 남겼다. 아버지가 먼저 기록한 형식을 아들이 따른 것인데, 두 개의 일기가 합쳐져 「부북일기(赴北日記)」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부북(赴北)은 ‘북행(北行)’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북쪽지방에서 부방(赴防)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도 있을 듯싶다.

부자는 자신들이 서북 변경까지 오가는 길과 또 근무처에서 겪은 일들을 간략하면서도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록하였는데, 당시의 성(性) 풍속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의 「부북일기(赴北日記)」에서 아들 박취문의 일기를 중심으로 여성편력에 관련된 내용들을 간추려 보았다.

 

박취문의 집은 울산(蔚山)이었다. 그의 일기는 인조 22년인 1644년 12월 9일에 경상좌도 병사(兵使)와 울산 부사(府使)에게 길 떠나는 인사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시 박취문의 나이는 28세였다.

12월 10일 길을 떠나, 첫 날은 처가에서 잤는데 그 이튿날의 일기다.

 

[​12월 11일]
길을 떠나 칠촌숙인 좌수(座首) 이득훈(李得塤)댁에 도착해서 칠촌숙인 좌수 이득곤(李得坤)댁에 함께 갔다. 농소(農所)에 여러 친척들이 모여 있었다. 팔촌 형 이명(李蓂), 이래(李萊), 이규(李葵) 삼형제와 여러 연소배들이 모여서 전별연을 열어 주었다. 용당(龍塘)에 사는 선달 박이명(朴而㫥), 신경(新庚) 사는 선달 박이돈(朴而暾)이 다 도착하여 하루 종일 전별연을 하고 머물러 잤다.
​밤에 우연찮게 좌수(座首) 댁의 계집종 통진(通眞)을 품었다.

 

집 떠난 지 불과 하루 만에 자신의 칠촌아저씨 댁 계집종을 건드렸다. 그런데 별 일도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적었다. 지금 같으면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은 시대적 환경에 따른 차이를 감안하여 논외로 치더라도, 자신의 일기에 적을 만큼 그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그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선조 38년인 1605년 10월 17일 길을 떠난 박취문의 아버지 박계숙의 일기다.

 

[12월 8일]
아침에 당장(唐將)이 떠나가고 난 뒤 현감(縣監)에게 기별을 보냈다. 현감 김충민(金忠敏)이 즉시 들어오라 청하여 함께 술 3잔을 마셨다. 어제 도착 할 짐 꾸러미가 오늘도 도착하지 않았다. 이 현에서 쇄마(刷馬) 역시 되지 않아 할 수 없이 머물렀다.
저녁에 관아에 들어가 함께 밥을 먹고 동행한 몇 사람이 홍안(紅顔)을 각자 끼고 나그네의 회포를 풀었다. 같은 도(道) 사람의 후함이 이와 같다. 내 짝이 된 여인은 은씨(銀氏)이고 나이는 18세였는데, 아름답기가 서시(西施)를 능가하였다. 그러나 초심을 돌과 같이 지켜 끝내 가까이 하지 않았다.
▶쇄마(刷馬) : 조선시대 지방에 배치하여 관용(官用)으로 쓰던 말(馬). 쇄마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을 바꾸거나 빌릴 수 없었다는 의미.
▶홍안(紅顔) : ‘젊은 기생’이라는 의미로 보임.
▶서시(西施) : 춘추시대 월나라 미인

 

당시 37세였던 박계숙은 중국 고대 4대 미인의 하나로 꼽히는 서시보다 아름다워 보이는 젊은 기생을 보고도 음심을 자제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보름이 조금 지나 경성부(鏡城府)에 도착하였을 때의 일이다.

 

[대동여지도 속 6진과 함경도 병사(兵使)가 군사적 목적으로 머물던 행영(行營)과 경성부]

 

[12월 25일]
새벽닭이 울 때쯤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다. 45리를 가서 영강역(永康驛)에 도착하여 말먹이를 주었다. 또 45리를 가서 경성(鏡城)에 도착하여 남문 밖 사삿집에서 머물러 잤다. 밤에 동행인들과 함께 걸어서 성문으로 들어가니 관사는 고풍스러웠다. 배회하면서 산보할 즈음에 한 아리따운 여인이 비취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연꽃같이 가벼운 걸음걸이로 가벼이 와서 나를 보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지나갔다. 우리들이 오랫동안 눈여겨보다가 마침내 말을 붙여 가로되,
“우리는 영남의 풍류지도(風流之徒)인데 조정에 이름이 알려져 일당백(一當百)장사로 북쪽 변방을 지키러 선발된 사람들이다. 경화(京華)의 보물을 가지고 오지 않음이 없으니 원컨대 교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아리따운 여인이 먼저 뜻을 알고 살짝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변방의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을 보배로 여기지 않고 청하여 함께 노는 것을 보배롭게 여깁니다.”
​하였다. 함께 주인집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놀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아리따운 그 여인의 이름은 애춘(愛春)인데 자는 석향(釋香)이다. 나이는 20세이고 가사에 능하며 또 문자를 알았다.

[12월 26일]
쇄마하지 못하여 머물렀다. 이날 아침에 애춘이 어여쁜 여자와 함께 나를 찾아와 말하길
“어제 저녁에는 긴한 일이 있었던 고로 심히 부끄럽습니다만 부득이 오늘 다시 왔습니다.”
​하였다.
이에 방으로 들라 하였다. 따라온 아리따운 여인의 나이는 16세인데 모습은 서시(西施)가 놀랄 정도이고 아름답기가 왕소군(王昭君)을 능가하였다. 나삼(羅衫)을 반만 여민 자태는 가을 구름 뒤에 숨은 달 같았고, 비취색 소매에 웃는 모습은 봄 연못에 비친 연꽃 같았다. 이름은 금춘(今春)이고 자는 월아(月娥)이다. 가사와 바둑 같은 기예에도 능하지 않음이 없었고, 또 거문고와 가야금에도 능하였다.
▶왕소군(王昭君) : 중국 한나라 때의 궁녀로 역시 중국 고대 4대 미녀 중 하나다.
저녁 무렵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어찌 춘정이 없겠는가? 그러나 초심을 돌과 같이 지켜 끝내 가까이 할 뜻이 없었다. 저녁에 순찰사의 영을 받아 판관이 술과 반찬을 보내주었다. 내 숙소에서 여러 지인들과 함께 마셨다.

[12월 27일]
또 쇄마가 되지 않아 머물렀다.
​새해가 가까워지니 변방의 나그네의 근심이 만 갈래로 갈라지던 중에 금춘 등이 스스로 와서 웃으며 말하길
“낭군은 우리들을 비천하게 여기지 마시오. 어제 저녁에는 어둑어둑해서 방문한 즉 여러 친구들이 한방 가득히 있었던 고로 그냥 왔다 그냥 돌아갔었습니다.” ​하였다.
함께 어울려 저녁때까지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탕한 기운의 남아가 반년이나 집을 떠나 있었으니 어찌 춘정이 없을쏜가?
초심을 망각하고 마음을 정하지 못하여 드디어 한곡을 지어 주기를,

“비록 장부(丈夫)라 할지라도 그 마음이 쇠와 돌이랴.
집 앞의 홍분(紅粉)을 오랜 경계로 삼았더니
치성(治城)의 호치단순(晧齒丹脣)을 못 잊을까 하노라.”

금춘이 답하길

“요순(堯舜)임금을 친히 본 듯, 한당송(漢唐宋)도 지내신 듯.
고금 사리에 통달한 명철한 이들을 어디에 두고
동서도 분간 못 하고 먼 길 떠나는 사람[征夫]을 걸어 무엇 하리.”

내가 또 화답하길

“나도 이러하나 낙양성 동쪽의 나비로다.
광풍에 휘날려 여기저기 다니더니
변방의 이름난 꽃가지에 앉아보려 하노라.”

금춘이 즉시 화답하길

“아녀자의 실없는 말 대장부는 믿지 마시오.
문무(文武)가 하나라는 것은 나도 조금 아옵니다.
하물며 용맹한 무사를 아니 걸고 어쩌리.”

이날 밤 금춘과 함께 동침하여 못내 잊혀지지 않는 정을 다하였다. 김공(金公)은 여자를 가까이할 뜻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날 밤 애춘과 함께 동침하였다.

 

박계숙이 애춘과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금춘과 동침하기 위한 수작까지가 모두 소설장면처럼 로맨틱하고, 북방 여인들의 적극적 태도도 기이하다. 성이 개방되었다는 지금 시대에도 이만큼 속전속결로 성관계가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을 일이다. 박계숙이 애춘을 처음 봤을 때 기생을 뜻하는 ‘기(妓)’ 가 아닌 미녀를 뜻하는 ‘아(娥)’자를 쓴 것이나 글의 내용을 보더라도 애춘이나 금춘은 모두 기생은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고 양반집 여인도 아니었겠지만, 양인이든 천인이든 간에 어린 처녀들이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남자들, 그것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일행들과 별 스스럼없이 성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 대한 다른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하여튼 이렇게 박계숙은 여행을 떠날 때 가졌던 초심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집 떠난 지 두 달만의 일이다.

 

다시 아들 박취문의 일기다.

 

[12월 15일]
새벽에 길을 떠났다. 아침 먹기 전에 35리를 가서 의성현(義城縣)에 도착하였다. 병마 우후를 뵙고 언양(彦陽)의 선달 장준민(張俊敏)과 선달 이득영(李得榮)과 함께 점고를 받고 머물렀다. - 장준민은 나중에 두민(斗敏)으로 개명하였다. - 의성현의 소목장(小木匠)인 검동(檢同)이라는 사람 집에서 머물렀다.
우연찮게 주인집의 계집종 분이(粉伊)를 품게 되었다.

[12월 16일]
박선달의 인마를 기다리기 위해 머물렀다. 반구정(伴鳩亭) 삼촌댁의 사내종과 말을 울산으로 돌려보냈다. 처음으로 급료로 쌀과 콩을 지급 받았다. 밤에 의성현의 주탕(酒湯) 춘일(春日)과 동침하였고 숙회(叔晦)는 주탕 매화(梅花)와 동침하였다.
▶박선달 : 박이명.
▶숙회(叔晦) : 박이돈.

[12월 17일]
오후에 박선달의 사내종과 말이 도착하였다. 이확이 주탕 옥춘(玉春)과 동침하였다.

[12월 22일]
10여리를 가서 촌가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30리를 가서 평해(平海)군에 도착해 머물렀다. 밤에 우연찮게 주탕 향환(香環)을 품었고 숙회(叔晦)는 귀익(貴益)을 품었다.

[12월 26일]
35리를 가서 삼척부(三陟府) 동문 밖 김팽남(金彭男)의 집에 머물렀는데 대접에 매우 좋았다. ​그의 딸 주탕 예현(禮賢)은 나이 20살인데 자색이 빼어나고 거문고와 노래에도 능하여 그녀와 어울리다가 같이 잤다. 숙회(叔晦)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용회(用晦)는 자칭 ‘인색대장군(忍色大將軍)’이라 말하였는데 이날 밤 주탕 도선(道仙)에게 훼절(毁節)하고는 날이 새기도 전에 서둘러 떠나가 버렸으니 가히 우습다 할만하다.
▶용회(用晦) : 박이명
▶인색대장군(忍色大將軍) : ‘색(色)을 참고 멀리하는 대장부’라는 의미로 자신을 높인 말
▶훼절(毁節) : 절개(節槪)나 지조(志操)를 깨뜨림.

 

글에서 박취문은 부방에 동행하는 동행들을 ‘선달(先達)’로 부르고 있다. 선달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관직을 받지 못한 사람에 대한 호칭이다. ‘한량(閑良)’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주탕(酒湯)은 평안도에서 얼굴이 고운 관비(官婢)를 가리키는 말이다. 개중에는 노래나 음률을 익힌 경우도 있으나 기생처럼 정식으로 교방에서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다. 평안도에 중국 사신이 올 때는 기생과 같은 역할을 맡기도 하였지만 정식 기생은 아니다.

박취문은 12월 29일 강릉에 도착하여 강릉부 동문 밖에 사는 관노(官奴) 말선(末仙)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12월 30일]
머물렀다. 무명 2필을 좋은 술 4동이와 바꾸어 2동이는 노비들을 주고 2동이는 기생들과 즐거이 나눠 마시고 놀다가 기생 연향(蓮香)을 품고 잤다.

[1645년 1월 1일]
여전히 강릉부에 머물렀다. 숙회(叔晦)는 기생 가지개(加之介)를 품었다. 관노 최억신(崔億信)이라는 자가 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해주었다.

[1월 2일]
새벽에 비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최억신이 또 술을 가져와 대접해 주었는데 억신은 강릉부의 급창(及唱)이다. 저녁에도 음식을 대접하니 얻어먹기에 마음이 불편하여 참빗 하나를 주니 머리를 가로저으며 받지 않고 돌아갔다. 유명한 기생 건리개(件里介)에 대해 전해 듣고 저녁에 눈길을 무릅쓰며 그 집으로 가서 동침하였는데 밤중에 서로 말과 시(詩)를 주고받다가 나에게 묻기를,
“선달님, 기생 연향(蓮香)을 가까이 한 적이 없습니까?”
​라 하였다.
그렇다고 하니 곧 말없이 옷을 입고 일어나 앉아 대성통곡하였다. 그 어미와 남동생이 놀라서 나와 그 이유를 물으니,
“이 선달님이 지난밤에 연향이를 가까이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어미도 역시 통곡하니 괴이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연향은 당창(唐瘡)이 있다고 하였다. 주객이 모두 낙심하여 걱정하며 밤을 새웠다.

이날 밤 언양(彦陽) 이선달은 기생 대향(代香)을 품었고 사추(士推)는 기생 막개(莫介)를 품었다. 막개는 허리가 굽은 여인으로 원래 도사(都事)의 방기(房妓)였다. 금강산에 놀러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허리가 부러졌다고 하는데 틀림없는 명기이다.

​건리개에게 약을 사라고 세목(細木) 1필, 중목(中木) 1필을 주니 말하기를,
“나는 전답을 팔아서라도 약 값을 마련 할 수 있으나 선달님은 3천리 밖으로 떠나 있어 약 값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라 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당창(唐瘡)은 성병인데 지금의 매독과 같은 병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매독을 천포창(天疱瘡)이나 양매창(楊梅瘡)이라 불렀다. 이수광(李睟光)이 편찬한 ≪지봉유설≫에는 “우리나라 의서를 훑어보건대, 천포창은 중종 원년으로부터 16년까지에 이르는 이후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병이다. 중국 또한 과거에는 이 병이 없었으나 서역으로부터 전해져 왔으며, 그 뒤 이 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1506년 이전에는 매독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창(唐瘡)은 ‘당나라의 부스럼’이라는 뜻이니 이 역시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명칭이다.

 

 

 

참고 및 인용 : 부북일기(꽃향기 나는 돌, 네이버 블로그 ‘조선왕조실록’),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