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시대에는 어디서 자고 먹으며 여행했을까? 3

從心所欲 2021. 8. 2. 19:25

인조 때인 1644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박취문(朴就文, 1617 ~ 1690)은 바로 그 해에 함경도로 출발하여 회령에서 약 1년간 부방(赴防)을 했다. 그리고 부방을 위해 길을 떠나 돌아올 때까지의 일을 일기로 남겼고, 그보다 40년 앞서 부방을 했던 그의 아버지 박계숙의 일기와 함께 「부북일기(赴北日記)」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 사람의 일기에는 당시 사람들이 어디서 자고 먹으며 어떻게 여행했는지를 알 수 있는 생생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부자는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나 당시에는 아직 벼슬에 오르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여행이 북쪽 국경을 지키는 임무라는 공무(公務)를 위한 여행이었기에 그들도 관원(官員)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연도(沿道)의 각 역참(驛站)에서 역마와 식료 등을 공급받을 수 있는 문서인 ‘초료 체지(草料帖紙)’를 발급받아 주로 역참(驛站)을 이용하여 여행을 했다. 또한 고을 수령의 호의를 입기도 했으며, 역참에 머물 수 없는 경우에는 민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공무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여행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역참에 따라서는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물품이나 말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는 일도 자주 생겼다.

 

아래는 「부북일기(赴北日記)」에서 박취문이 부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일기가운데 숙식을 어떻게 해결했는 지를 보여주는 부분만 발췌한 것이다.​

 

[1646년 2월 11일]
행장을 꾸렸다. 판관이 쌀, 콩, 죽 각 6두와 어물 등을 많이 보내주었다.
행자(行資)가 풍족하여 전부 정좌랑(鄭佐郞)의 집에 보냈다. 병영과 경성부의 관청에 속한 감관(監官)과 여러 동료군관, 향소, 기타 친한 사람과 하인들이 각각 쌀, 콩, 죽, 어물 등을 보내 주었다. 거의 한 바리 가득인데 반은 정좌랑에게 보내고 반은 주인집에 남겨 보관하였다. 저녁에 판관이 전별연을 베풀었다.

[2월 13일]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귀문관(鬼門關)에서 말을 먹이고 명천부에서 머물렀다. 들어가 부사를 뵈었는데 잔치를 열어주어 밤이 되어 파하였다. 옥매향(玉梅香)이 와서 봤다.

[2월 14일]
아침을 먹었다. 부사가 쌀, 콩, 죽 각 1두(斗)와 찬거리 등을 보내주어 들어가 인사를 드렸다. 고참역(古站驛)에서 앞서 올 때 들렀던 박린(朴潾)의 집에서 말을 먹였다. 바꿔 온 말이 야위고 피곤하여 누워서는 일어나지 못하니 역에서 복마(卜馬)를 얻어 길주(吉州)에 도착하였다.

[​2월 25일]
아침을 먹고 마천령에 올라 들판에서 말을 먹였다. 영서(嶺西) 마곡역(麻谷驛) 이시립(李時立)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2월 26일]
단천군(端川郡) 입구에서 아침을 먹었다. 군수는 신병이 있어 만나지 못하였다. 민선천(閔宣川) 역시 이미 방환되어 만날 수 없었다. 비가 와서 머물렀다.

[2월 27일]
마운령(磨雲嶺) 북쪽 촌가(村家)에서 아침을 먹었다. 마운령을 넘어 곡구역(谷口驛) 김윤선(金胤善)의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큰 손님과 같이 대하였다. 부방하러 올 때 맡겨두었던 짐과 노자를 찾아 가지고 이성현(利城縣) 앞 역리(驛吏) 김준남(金俊男)의 집에서 머물렀다. 사내종의 말이 상처를 입었는데 역의 복마를 지급해 주어 매우 고마웠다. 공망과 함께 들어가 현령(縣令)을 뵙고 술을 얻어 마셨다. 두 사람에게 쌀, 콩, 죽 1두씩 을 주고 또 어물과 찬거리 등을 주었다. 현령은 황해도 평산 사람 김취장(金就章)이다.

[2월 28일]
아침을 먹고 수중대(水重臺)를 지나다 비가 와서 뱃사람의 집에 머물렀다. 집주인의 이름은 강금상(姜今上)인데, 후하게 대접해주었다.

[2월 29일]
거산역(居山驛)에서 아침을 먹었다. 순찰사가 별세하였다는 기별(別世)을 들었다. 역시 비로 인해 머물렀다.

[​2월 30일]
아침을 먹고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여 북청(北靑) 남문 밖에서 말을 먹였다. 병사(兵使)는 춘순(春巡)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며, 판관(判官)은 문병하기 위해 순영(巡營)에 가서 돌아오지 않아 모두 만나지 못하였다. 료미(料米)를 주지 않아 해당 색리를 불러서 개유하여 받아 왔다. 우후는 산보(山堡)에 나갔다가 밤이 된 후에 큰 비를 무릅쓰고 돌아와 머물러 잤다.

[3월 1일]
새벽에 비가 잠시 그쳤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평포역(平浦驛)에서 아침을 먹었다. 물이 많아서 건너기 어려워 머물렀다.

[3월 2일]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여 홍원(洪原) 석을관(石乙串) 어귀의 한 기와집에 들어가니 대접이 심히 후하였다. 집주인의 이름은 박종한(朴宗韓)이고 나이는 66세였다. 아들이 9명이었는데 첫째가 일취(日就), 둘째가 일빈(日彬), 셋째가 일성(日城), 넷째가 일장(日章), 다섯째가 일관(日寬), 여섯째가 일순(日諄)이고 나머지 세 명은 아직 관명(官名)을 짓지 못했다 하니 대단한 일이다. 스스로 동성이라 칭하며 큰 손님과 같이 대접해 주었다. 비가 내려 머물렀다.

[3월 3일]
아침을 먹고 홍원현(洪原縣) 기생 조생(趙生)의 집에서 말을 먹였다. 현감(縣監)은 함흥(咸興)의 순찰사 호상소(護喪所)에 가서 만나 뵙지 못하고 출발하였다. 겨우 10여리를 가서 큰 비를 만나 촌가에 머물렀다.

[​3월 4일]
아침을 먹고 함원참(咸原站)에서 말을 먹이고 함관령(咸關嶺) 조금 아래 수철점(水鐵店)에서 머물렀다. 큰 비가 와서 작은 냇가라도 건너기 어려웠다.

[3월 5일]
덕산역(德山驛)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주인역리(主人驛吏) 이사용(李嗣溶)이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비를 무릅쓰고 함흥(咸興)에 도착하여 보니 전에 묵었던 주인 오장손(吾莊孫)은 이미 죽고 없었다. 남문 밖 김여황(金麗晃)의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초료 체지(草料帖紙)를 얻지 못하여 머물렀다. 김여황은 사람됨이 매우 영리하여 아낄만한 사람이다.

[​3월 6일]
초료 체지를 받지 못했고 비까지 내려 부득이 머물렀다. 저녁에 의흥(義興) 도내유(都乃兪)의 딸 기생 고온(高溫) 모녀가 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고 약간의 식량과 그 아비에게 보낼 편지를 주었다. 정자(正字) 한여위(韓汝徫)가 우리 일행 소식을 듣고 쌀, 콩, 죽 각 1두씩 보냈다. 도사(都事)에게서 초료 체지를 받기가 어려웠다.

​[3월 7일]
아침밥을 먹고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여 정평부(定平府) 남문 밖에서 머물렀다.

[3월 8일]
아침밥을 먹었다. 물이 많아 어렵게 고원군(高原郡)에 도착하였다. 전에 올 때 들렀던 박영순(朴永諄)집에 머물렀다. 동생 여순(汝諄), 사순(士諄), 이순(而諄)등 4형제들이 동성이라며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쌀, 콩, 죽 각 2두씩과 반찬 등을 거두어 주었다. 매우 감사하였다.

[김득신 <나루터> 또는 <대도도(待渡圖)]

 

[3월 9일]
아침밥을 먹고 문천(文川)의 경계의 전탄(箭灘)에 도착하니 물이 많아 건너기가 어려워 아주 작은 통선(桶船)을 타고 어렵게 건넜다. 말들은 배의 꼬리 부분에 매달아 건넜다. 건넌 뒤에 물건을 실으니 두 세 걸음도 못 가서 넘어지고 또 짐을 싣고 넘어지고 하였다. 공망은 먼저 가고 숙회와 함께 뒤쳐졌다. 아무리 천만번 생각해봐도 도무지 나아갈 계책이 없었다. 내가 타는 기마(騎馬)에 짐을 실어 숙회로 하여금 나의 종과 말을 먼저 데리고 가도록 하고, 나는 이생(李生)을 데리고 천천히 뒤따라간다고 하였다. 원근(遠近)도 잘 몰라 길가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인가에 들어가게 되면 사내종 한 명을 갈림길에 보내서 기다리게 하자고 약속하였다.

​큰 비가 마치 물을 쏟아 붓는 것 같았고, 천지가 밤처럼 어두웠다. 원근을 분간 할 수 없어서 또한 인가가 있는지 없는지 알지도 못했고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먼저 간 사람들이 머무르는 마을을 지나쳐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문천(文川)에서 15리 남짓 못 미친 무인지경의 산골짜기에서 같이 가던 말이 갑자기 넘어져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날은 이미 저녁이라 어두웠고 비 또한 크게 내렸다. 부득이 말을 길에다 버리고 말안장은 이생으로 하여금 짊어지게 하였다. 활과 화살, 환도 등의 물건은 내가 직접 찼다. 입고 있는 저고리와 바지는 모두 진흙탕에 축축해졌다. 어두운 저녁 무렵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어렵게 문천 읍내에 도달하여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천만번 소리질러 불렀으나 아무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사람은 혹 미친 사람으로 의심을 했다. 미친듯이 부르고 다니면서 저녁밥도 얻어먹지 못한 데다 몸 또한 춥고 얼어서 숨이 곧 끊어질 것 같아 다시 소리를 지를 힘도 없었다.

마침 이엉을 많이 쌓아 둔 곳이 있어 누울 곳을 만들려고 아래쪽 7, 8묶음을 빼내고 구멍을 만들어 이생과 함께 그 구멍 속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마치 백옥루(白玉樓) 제 1층에 오른 것 같았다. 그러나 굶주림과 추위로 죽을 것 같은 한계에 달하여 바로 어떤 큰 집으로 들어가 큰 소리로 주인을 불러 말하길​
“주인은 어떤 사람인데 장차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보고도 끝내 목숨을 구해주지 않는가? 날이 밝길 기다려 장차 관청에 송사할 것이다.”
​고 하니 주인이 비로소 방문을 열고 엿보는 것이었다.

그대로 들어가서 환도로 사립문을 잠가 놓은 새끼줄을 자르고 뛰어 들어가자 주인이 부득이 나와서 말안장과 활, 화살 등을 보고 어느 곳의 어떤 사람인지를 물었다. 갖추어 위와 같은 사유를 말한 즉 마침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게 했다. 그런데 오래 비어있던 온돌이라 추위가 더욱 심하여 따뜻한 물을 청하고 또 땔나무를 부탁하니 좁쌀로 빚은 따뜻한 탁주를 주고 땔나무 반 묶음을 주었다. 이생과 함께 한기를 덜고 불을 피워 어렵게 내일을 기다릴 수 있었다. 좁쌀로 빚은 탁주 한 잔이 천금과 같았다.


[​3월 10일]
이생과 함께 추위에 몸을 움츠리며 해가 뜰 때까지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였는데 집주인이 말하길
“양반 두 일행이 짐 실은 말 세 마리와 또 말안장 없는 빈 말 한필을 끌고 다니며 이생을 부르고 다닙니다.”
​하였다. 급히 문을 열고 나가보니 박(朴), 이(李) 두 일행이 길에서 버린 말을 끌고 왔었다. 뼈에 새길 만큼의 어려운 고통을 어찌 필설로 다하며, 백골이 되더라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긴 비가 완전히 개어 햇볕에 의복을 말렸다. 말을 잘 돌봐 달라하니 2통의 죽과 1말의 콩을 먹이고 머물렀다.

​[3월 11일]
저녁 무렵 기마(騎馬)에 짐을 싣고 복마(卜馬)는 그냥 끌고 도보로 길을 떠났다. 주인 이태남(李太男)에게 줄 물건이 없어 단지 오래된 참빗 1개를 주고 떠나 20여리를 가서 뱃사람의 집에서 머물렀다.

[3월 12일]
뱃사람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덕원(德原)을 지나 원산촌(元山村)에서 말을 먹이고 저녁에 안변(安邊)에 도착하여 선생(先生)의 집에 머물렀다. 밤에 복마가 새끼를 낳았다.

[3월 13일]
식후에 들어가 안변 부사를 뵈었다. 성주(城主) 이후천(李後天)은 일찍이 한양에 가고 없었다. 대부인(大夫人)에게 이름을 올리니 계집종 용생(龍生)을 시켜 술과 반찬을 보내주었다. 용생으로 하여금 노마(奴馬)가 뒤쳐진 일을 들어가 고하게 하니 비록 여러 날 머물더라도 노마들의 양식까지 마땅히 모두 준비해 주겠다고 하였다. 또 떠날 때도 쌀, 콩, 죽 또한 풍족하게 준비해 줄 터이니 더 이상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어 안변 부사에게 하직하는 뜻을 고하니 노마에게 지급하는 양식은 모두 넉넉하게 지급해 주겠다고 하여 매우 감사하였다. 이어 하직하고 오후에 출발하여 비론현(飛論峴)을 넘어 해부(海夫) 집에서 머물렀다. 안변에서 체지(帖紙)로 지급받은 쌀, 콩, 죽과 반찬 등을 이(李) 박(朴) 두 일행에게 나누어 주고, 약간은 이생에게 주었다.

[3월 14일]
아침밥을 먹었다. 흡곡(歙谷) 경계의 해부(海夫) 집에서 말먹이를 주고 흡곡현 앞에서 머물렀다. 들어가 수령에게 종성 부사의 편지를 전하니 술상을 내려주어 잘 마시고 쌀, 콩, 죽과 찬거리 등도 많이 내려주어 인사하고 작별하였다.
▶해부(海夫) : 어부

[3월 15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통천군(通川郡)에 도착하여 전에 올 때 묵었던 이춘(李春)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교진역(交津驛)의 전에 묵었던 김득춘(金得春)의 집에서 말을 먹이고 출발하고자 하니 주인이 말하길
“다리의 통증으로 걷기 어려우시니 오늘은 저희 집에서 머무르시오.”
​라면서 마음을 다해 권하여 머물렀다. 저녁에 황계(黃鷄)를 삶아주고 백주(白酒)를 주니 매우 감사했다.

[​3월 16일]
일찍 아침밥을 먹고 출발하여 양진역(兩津驛)에서 말을 먹이고 고성(高城)의 동문 밖에서 머물러 잤다.

[3월 17일]
대강역(大强驛)에서 아침밥을 먹고 한령촌(汗令村)에서 말을 먹였다. 간성(杆城)의 동문 밖에서 머물러 잤다.

[​3월 18일]
청간역(淸干驛) 아래의 올 때 묵었던 박언부(朴彦夫)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는데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강신역(强神驛) 아래 올 때 묵었던 주인인 김억필의 손자와 손녀사위 황유신(黃有信)의 집에서 말을 먹였다. 지나가는 길에 낙산사(樂山寺)에 올랐다가 양양(襄陽) 동문 밖에서 머물렀다. 도사의 체지(帖紙) 운운하며 초료를 주지 않으므로 색리를 불러 타이르니 즉시 수량에 맞추어 지급해 주었다.

[​3월 19일]
상운역(祥雲驛)에서 올 때 묵었던 홍선립(洪善立)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동산역(洞山驛)에서 말을 먹이고 강릉부(江陵府)에 10여리 정도 못 미친 해부촌(海夫村)에서 머물러 잤다.

[3월 20일]
연곡역(連谷驛)에서 전에 머물렀던 홍승립(洪承立)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들에서 말을 먹이고 시동촌(時同村) 생원 심지하(沈之河)의 집에 들어가 머물러 잤다. 심공은 읍내에 들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만나지 못하였다.

[3월 21일]
화비현(火飛峴)을 넘어 해부(海夫)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또 율현(栗峴)을 넘어 우계역(愚溪驛)에서 말을 먹이고 평릉역(平陵驛)에 머물렀다.

[3월 22일]
삼척부(三陟府)에서 올 때 묵었던 김팽남(金彭男)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주탕 예현(禮賢)에 대해 물은 즉 의녀로 뽑혀 한양으로 갔다고 했다. 별감 홍응부(洪應簿)가 술을 가지고 왔다. 교개역(交介驛)에서 올 때 묵었던 이지훈(李之勳)의 집에서 말을 먹였다. 비가 내렸기 때문에 머물렀다. 교개역 역리 김종민(金宗敏)과 이여성(李汝誠)등이 술을 가져왔다.

[​3월 23일]
저녁에 비가 잠시 개었기에 출발하여 15리를 갔으나 물이 많아 건너지 못해 들판에서 머물러 잤다.

[3월 24일]
물을 건너지 못해 5리 가량 가서 촌가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 해가 질 무렵 어렵게 물을 건너 강가에서 머물러 잤다.

[​3월 25일]
아침부터 또 비가 내려 10리 정도 가서 해부(海夫)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머물렀다.

[​3월 26일]
또 비가 왔다. 오후에 개어 길을 떠나 15리 정도 갔으나 또 물을 건너지 못해 해촌(海村)에서 머물렀다.

[​3월 27일]
또 비가 내려 오전에 머물다가 오후에 쾌청하게 되어 길을 떠나 소공대(召公臺) 고개를 넘어 들에서 머물렀다. 한밤중에 인치(釼峙)를 넘어 용화역(龍花驛)에서 아침밥을 먹고 오원역(五院驛)에서 말을 먹이고 해촌(海村)에서 머물러 잤다.

[​3월 28일]
해촌(海村)에서 아침밥을 먹고 울진(蔚珍) 경계의 해촌(海村)에서 말을 먹이고 울진현 서산성(西山城) 아래에서 머물러 잤다.

[​3월 29일]
마야을촌(馬也乙村)에서 말을 먹이고 지나는 길에 또 망양정(望洋亭)에 올랐다. 들에서 말을 먹이고 평해(平海) 경계 흥명촌(興明村)에서 머물렀다.

[3월 30일]
평해(平海) 주탕(酒湯) 향환(香環)의 집에서 아침을 먹고 영해(寧海) 병곡역(丙谷驛)에서 말을 먹였다. 역인들이 말먹이 콩과 여물을 많이 준비하여 주었고 술을 가지고 와서 노비들에게도 주었다. 생각은 뻔하여 비록 알지만 모르는 체 하면서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그 때의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하니 우스웠다. 20리 정도를 가서 들에서 머물러 잤다.

 

일기에 나오는 ‘그 때의 일’이라는 것은 박취문과 일행이 1년여 전에 함경도로 부방 가는 길에 생겼던 소동이다. 당시 일행이 병곡역(丙谷驛)에서 소란을 일으켜 큰 봉변을 당하였었다.

 

[1644년 12월 21일]
울현령(蔚峴嶺)을 넘어 40리를 더 가서 비소원(飛所院)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40리를 가서 영해의 병곡역(丙谷驛)에서 머물렀다.

이사추(士推)와 용회(用晦) 두 사람이 해가 질 무렵 말을 타고 달려와서 말하길,
“이 곳 역장(驛長)이 민가의 야사(野祀)를 하는 곳에 나아가 말 먹이도 주지 않고 우리에게 접대의 뜻도 없으니 처음 역로에 반드시 따끔하게 다스려 놓아야 앞으로 각 역에서도 소문이 퍼져 접대를 잘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사추(士推)와 용회(用晦) : 사추(士推)는 자이고 이름은 이확이다. 용회(用晦)는 박이명란 인물의 자이다. 두 사람 모두 박취문과 함께 부방 길에 오른 일행으로 글의 뒤쪽에 이선달, 박선달로 불리는 인물들이다.

​두 선달이 박숙회(叔晦)가 머무는 주인집 손님방에 와서 앉아 각자 사내종 한명씩을 보내어 역장을 끌고 와 거꾸로 매달려고 할 때 나와 숙회(叔晦)는 금하도록 하였으나 두 사람은 사내종을 시켜 역장(驛長)을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하여 역장의 족속과 자질(子姪) 수십 명이 반취하거나 크게 취한 상태로 소리를 크게 지르며 뛰어들어 매달아 놓은 새끼줄을 끊었고 이 때문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어서 반취하거나 크게 취한 사람들이 잇달아 도착하였는데 거의 백여 명에 달하였다. 날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졌는데 돌멩이나 몽둥이를 들고 와 필히 박, 이 두 선달을 잡아 갈 것이라 말하였다.
▶역장(驛長) : 신역(身役)으로 각 역참에 소속되어 근무하던 아전인 역리(驛吏)의 우두머리로 향리(鄕吏)이다.
▶숙회(叔晦) : 역시 일행 중의 하나인 박이돈. 용회(用晦) 박이명과 형제 사이로 짐작된다.
▶자질(子姪) : 아들과 조카

무수히 소란이 일어나서 하는 수 없이 나와 숙회(叔晦), 숙회(叔晦)의 사내종 춘립(春立) 세 사람이 갑자기 뛰어나가서 크게 대항하여 이들과 크게 싸웠다. 언양 출신 세 명의 선달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왔지만 역리들의 무리에 막혀 들어올 길이 없었다.
​장 선달은 울타리 밖을 빙 돌아 들어오려다 깊은 우물 속에 빠져 옷이 다 젖어 버렸고 선달 이득영(李得榮)의 사내종이 들어와 싸우다가 역인에게 머리를 맞아 크게 다쳐 유혈이 낭자하였는데 끝끝내 죽을 것 같이 보였다. 저들은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사내종을 끌고 나가는데 그 가는 방향을 알지 못하였다.

역인들이 말하길
“두 선달을 내어 주면 우리도 그들을 거꾸로 매단 연후에 그만두겠다.”
​라고 하면서 큰소리를 내며 들어오려고 창문과 방 벽을 부수니 어쩔 수 없이 주인집 안방으로 들어가서 겨우 화를 모면했다.
나중에 이동하려 할 때 또 싸움이 벌어졌는데 용회(用晦)가 갑자기 역인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 나가게 되었다. 이를 숙회(叔晦)가 구하려 할 때에 그도 역시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가면서 망건도 잃어버렸다.
​역인들이 말하길,
“이집과 저 집에서 머무는 두 사람은 애당초 이 일을 금지하려 한 자들이므로 이들은 욕되게 하지 마라.”
​고 하였다.
이집과 저 집이라고 칭해진 사람은 나와 숙회(叔晦)를 가리킨 모양으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사추(士推)가 용회(用晦)를 구하고자 뜰로 나갔다가 역인들에게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간신히 도망갔고 용회(用晦)는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꿇어 앉혀 이루 말할 수 없는 욕을 당하였다.
숙회(叔晦)는 부중(府中)에 들어가 이 사실을 알리고자 하였는데 부사(府使)는 한양에 가고 없고 형방(刑房)인 김유성(金有聲)이 와서 타이르기도 하고 때려서 내쫓아 버리기도 하였다. 역인 등이 겨우 잠잠해졌으나 이 일을 한 두 마디로 기록하기가 어려웠다.

날이 밝기 전에 김유성은 부중으로 돌아갔다. 새벽에 우리는 출발하려고 하니 이선달과 박선달의 사내종들이 보이지 않았다. 역인(驛人)들이 날이 샐 무렵에 이선달과 박선달이 머무는 집을 둘러싸고,
“네 놈들을 거꾸로 매달고자 하였으나 형방이 못하게 하니 시행하지는 않겠다. 대신 너희 종놈들을 거꾸로 매달아서 곤장을 때린 뒤에야 너희들을 보내주겠다.”
​고 하였다.
끝내 포위를 풀지 않았고 실랑이 끝에 박 선달의 종 시남(是男)과 이 선달의 종 경립(竟立)을 붙잡아 곤장 10대를 때린 후 말하길
“처음엔 크게 때리고자 하였으나 너희가 신출신(新出身)으로 부북(赴北)하러 가는 길임을 만분 참작한 것이니 다음부터는 이와 같이 하지 마라.”
​고 하였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 이루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으니 백골이 되어도 어찌 잊겠는가. 5리에서 10리 정도를 가니 이선달과 박선달의 도망갔던 종들이 숲이나 산자락에서 나타나오니 참으로 가소로웠다.

 

영해(寧海)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지역이다.

 

[​4월 1일]
남역(南驛)에서 아침밥을 먹고 들에서 말을 먹였다. 해부(海夫)의 집에 머물렀다.

[​4월 2일]
​​청하(淸河) 송라역(松羅驛) 윤신빙(尹莘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신빙(莘聘), 신달(莘達), 기정(起挺)등으로 하여금 급히 이경장(李慶長), 이선각(李先覺), 김영(金榮), 김이남(金二男)등에게 알리게 했으나 만나보지 못했다. 역마로 유역(柳驛)에 도착하여 말을 먹이고 노당(魯堂)의 생원(生員) 장숙주(蔣叔主) 집에서 머물렀다.

​​[4월 3일]
​유역의 역마는 돌려보냈다. 숙주(叔主)의 말을 타고 광제원(廣濟院)에서 말을 먹이고 사리역(沙里驛)에서 또 말을 먹였다. 기마(騎馬)를 얻어 타고 조역(朝驛)에서 머물렀다.

[​4월 4일]
구어역(仇於驛)에서 아침밥을 먹고 역마를 타고 집에 도착하여 양친을 뵈오니 기쁨이 극에 달하여 슬픔으로 변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부북일기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조선왕조실록’ (꽃향기 나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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