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20 - 방직기

從心所欲 2021. 8. 8. 13:55

「부북일기(赴北日記)」에는 기생, 주탕, 방직기라는 호칭이 모두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을 모두 통틀어 창기(娼妓)로 부르는 예가 많다. 하지만, 부북일기(赴北日記)」에 이렇게 호칭을 나눈 것을 보면 이들 사이에는 지금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관비(官婢)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생(妓生)인데 일명 주탕(酒湯)이라고도 하고, 하나는 비자(婢子)인데 일명 수급(水汲)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기생과 주탕을 같은 개념으로 취급하였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이 흥청의 숫자를 채우는 일로 고민할 때 “평안도 풍속에 자색이 있는 관비(官婢)를 주탕(酒湯)이라 하는데, 혹은 노래 혹은 음률을 알아 또한 간택할 만합니다."라고 건의하는 내용이 있다. 부족한 기생의 숫자를 주탕 가운데 음악을 아는 자들을 선발하여 충원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주탕(酒湯) 중에 ‘혹은 노래와 음률을 아는 자도 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주탕(酒湯)이 되는 조건에 음악은 필수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주탕은 교방(敎坊)에서 악가무(樂歌舞)에 대한 전문교육을 받았던 기생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용모로 선발하고 그들을 부르는 명칭이 ‘술과 탕’이라는 의미의 ‘주탕(酒湯)’인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역할이 기생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평안도의 풍속이라고 했다.

 

개성, 평양, 의주로 이어지는 의주로는 조선과 중국의 사신들이 빈번하게 오가던 길이다. 그 외에 평양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부북일기(赴北日記)」에서 보듯 이제 막 무과에 급제했지만 아직 관직도 없는 인물들에게조차 술자리와 잠자리에 기생을 제공해야 하는 상황에 각 관아에 소속된 기생만으로는 그 수요를 모두 채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정식 기생은 아니지만 기생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관비 중에서 외모가 반반한 여종을 골라 손님을 접대하도록 한 것이 ‘주탕(酒湯)’이란 제도의 시작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북일기(赴北日記)」에 나오는 함경도와 다른 지역의 주탕들 역시 평안도의 사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방기(房妓) 또는 방직기(房直妓)는 기생이나 주탕(酒湯)과는 역할이 달랐다. 사실 그들은 기생이라기보다는 여종에 더 가까웠다.

세종이 함경도 감사에게 내린 지시를 보면 방직기의 역할과 존재 이유가 확실하다.

 

【"옛날에 변진(邊鎭)에 창기(娼妓)를 두어 군사들의 아내 없는 사람들을 접대하게 하였는데,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지금도 변진과 주군(州郡)에 또한 관기를 두어 행객을 접대하게 하는데, 더군다나 도내의 경원, 회령, 경성 등의 읍은 본국의 큰 진영으로 북쪽 변방에 있는데, 수자리 사는 군사들이 가정을 멀리 떠나서 추위와 더위를 두 번씩이나 지나므로, 일용(日用)의 잗단 일도 또한 어렵게 될 것이니, 기녀를 두어 사졸들을 접대하게 함이 거의 사의(事宜)에 합할 것이다."】[《세종실록》 세종18년(1436년) 12월 17일]

 

세종은 예전의 사례를 들어 극변(極邊)에 근무하는 군인들의 일용세사(日用細事)를 도와줄 기녀를 두라고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방직기(房直妓)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역할은 일반적 기생의 개념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생 역시 관비(官婢)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방직기는 말 그대로 그냥 관비다. 용모나 기예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변방에서 근무하는 군사들의 살림살이를 돕는 여종이었다. 무관에 배정된 방직기들은 빨래와 바느질을 해주며 무관의 살림을 도왔고 한 집에 같이 살다보니 때로는 잠자리까지 같이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찮은 대우를 받았다.

 

「부북일기(赴北日記)」에는 박취문이 자신에게 배정된 방직기에 대해서도 짧게 적은 내용들이 있는데 그 짧은 글 속에서도 방직기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정황들을 발견할 수 있다.

1644년 6월 14일 일기 끝머리에 박취문은 이렇게 적었다.

 

【의향(義香)이 천익(天翼)을 만드는 옷감을 잘못 재단하여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려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의향은 박취문의 방직기였다. 의향에게 무관이 입는 공복(公服)인 철릭을 새로 만들라고 했는데, 잘못 재단하여 옷감을 버려 화가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의 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의향의 어미가 내려와서 그 딸을 심하게 때렸다.】

 

의향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몰라도 일을 잘못했다고 자신의 엄마에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 물론 의향의 어미는 박취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부북일기(赴北日記)」에는 의향의 어미가 종종 박취문의 집을 방문하는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3월 14일]
아침에 의향의 어미가 술과 안주 및 땔감 한 수레, 볏짚 한 수레를 가지고 촌가에서 왔다.

[3월 15일]
아침에 의향의 어미가 돌아갔다.

[3월 26일]
아침에 의향의 어미가 땔감과 말 먹일 풀, 그리고 떡과 술을 싣고 왔다.

[4월 3일]
새벽에 부사(府使)가 흰죽을 끓여 보내어 많이 먹고 따뜻한 방에서 땀을 흠뻑 흘렸다. 월매가 종일 병구완을 해주어 같이 이야기 할 때마다 항상 눈물이 나왔다. 기고(忌故)가 있어 소식(素食)을 했는데 월매가 만류하였다. 여러 동료들이 병문안을 많이 왔고 의향의 어미도 병문안을 왔다.
▶기고(忌故) : 기제사(忌祭祀)를 지내는 것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집안 누군가의 기일(忌日)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당시 박취문의 부모는 생존하여 있었기 때문에 그 윗대의 기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소식(素食) : 고기나 생선을 갖추지 않은 음식.

 

이때 박취문은 감기에 걸려 앓고 있었다. 월매는 회령 기생으로, 그 어미 배종(裵從)은 박취문의 아버지 박계숙이 부방할 때에 인연이 있었던 사이다.

[4월 4일]
병이 나아진 기미가 있어 부사를 뵙고 인사를 하였다. 의향의 어미가 돌아갔다.

[4월 5일]
해가 질 무렵에 의향의 어미가 떡을 만들어왔다.

[4월 14일]
의향이 옷을 빨고 재단하기 위해 종 봉남을 데리고 그 어미 집으로 갔다.

[4월 20일]
아침에 활 10순을 쏘았다. 판관이 생대구 2마리, 생명태 5마리, 신삼어(申三魚) 5마리를 보내 주었는데 반은 월매에게 주고 또 반은 의향의 어미 집에 보내주었다.

[6월 12일]
아침에 비가 반려(半犁)정도 왔다. 의향의 어미가 떡을 만들어서 관청으로 보냈다.
▶반려(半犁) : 려(犁)는 쟁기를 뜻하기도 하지만 쟁기로 갈았을 때 갈아엎어지는 땅의 깊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반려(半犁)정도’라는 것은 쟁기로 밭을 갈 때 엎어지는 땅 깊이의 반 정도가 젖을 만큼의 비가 왔다는 뜻이다. 적은 비를 표현할 때는 호미를 가리키는 서(鋤)가 쓰였다. 서(鋤)는 호미로 팠을 때의 땅 깊이를 말하고, 반서(半鋤)는 그 깊이의 반을 가리킨다.

 

의향의 어미가 방직기 노릇을 하는 의향을 돕고 보살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의향의 어미가 박취문의 집을 찾을 때마다 무언가를 가지고 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정황이다. 의향의 어미가 가져오는 물건들이 박취문에게 자신의 딸을 잘 돌보아달라고 부탁하는 의미에서 사적으로 마련한 물품인지 아니면 관(官)에서 지급하는 물품을 대신 수령해 전달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만일 사적인 물품이라면 딸을 종살이 시키는 것도 모자라 부리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까지 해야 하는 그 상황이 안타깝고 분노가 치민다. 통상 누군가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형편이 나은 사람이 못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상례다. 의향이 관비이면 그 어미도 분명 관비였을 것이다. 그런데 박취문이 자신을 위해 수고하는 의향이나 그 어미에게 준 것이라고는 4월 20일에 기록한 것이 전부이자 유일하다. 반면 기생들에게는 수시로 자신이 상으로 받은 물품들을 나눠줬다.

관에서 지급한 물품을 전달한 것이라면 방직기의 임무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동원해야 했다는 것이니 여종에게 지워진 책임이 너무 크다.

 

[심사정 <촌가여행(村家女行), 지본담채, 32.5 x 26.5cm, 간송미술관]

 

방직기가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은 살림살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부방에 참여한 군관들은 거의 매일같이 활쏘기를 했다. 한가로운 여흥이 아니라 군관들의 훈련 일정 중의 하나다. 매일 반복되는 훈련의 무료함을 달래고 흥미를 더하기 위하여 편을 나누어 내기를 하는 일도 있고, 우열을 가려 포상을 하기도 한다.

특히 병사(兵使)나 고을 수령이 포상을 내걸고 활쏘기를 할 때는 성적이 좋은 자에 대한 포상과 함께 성적이 나쁜 자에게는 벌이 내려졌다. 그 벌칙은 화살을 주워오게 하거나 광대 옷을 입히든지 기생에게 발바닥을 맞는 것과 같은 수치심을 주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벌칙에 아무 상관도 없는 방직기들이 불려 다녔다.

 

[5월 23일]
동방(同榜) 급제자 등과 함께 편을 나누어 활을 쏘았는데 우리 편이 졌다. 우리 편에서 꼴찌를 한 김신의 방직기 기란(起蘭)을 잡아와서 장차 족장(足杖)을 치려 할 때 벌을 받는 대신 술을 한 동이 내기를 원하였다.
▶족장(足杖) : 발바닥을 때리는 것

[12월 28일]
날이 점점 따뜻해지니 군관들은 좌목에 의거하여 자주 활을 쏘라는 분부가 있었다. 사또가 영소당(永嘯堂)에서 공무를 보고 활 10순을 쏘았다. 김광일(金光一)이 꼴찌를 하여 광대 옷을 입었다. 그 방직기 막개 또한 광대 옷을 입혀서 소에 태운 후 김광일로 하여금 끌고 가서 화살을 주어오게 하였다. 또 활 10순을 쏘았는데 강성일(姜成一)이 꼴찌를 하여 또한 이와 같이 했다. 또 10순을 쏘아 김광일과 김고(金杲) 두 사람이 꼴찌를 해서 또 이와 같이 했다. 그 방직기 등이 매우 답답하고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1645년 1월 18일]
밤에 눈이 내리다가 아침에 개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사또를 모시고 활 50순을 쏘는데 사또가 말하길
“군관들의 활 쏘는 재주가 모두 다르니 다음 10순은 3등(等)으로 나누어 각 등의 거말(居末)은 방직기와 함께 광대 옷을 입히겠다.”
​는 영(令)을 내렸다.
(중략)
상등(上等) 거말(居末)은 한상급(韓山岌), 중등(中等) 거말(居末)은 김고(金杲)와 공망(公望), 하등(下等) 거말(居末)은 백예원(白禮元)이었다. 공망(公望)은 김고(金杲)와 서로 우열을 가릴 것을 하소연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방직기들을 불러서 음악 없이 뜰아래에서 춤을 추게 하다가 잠시 뒤에야 마루 위로 오르게 하여 음악에 맞추어 춤추도록 하였다. 이날 각 방직기들이 연이어 불려오게 되니 몹시 민망해 했다. 매우 우스웠다.
▶거말(居末) : 어떤 등급이나 지위, 평가에서 가장 말단을 차지함.

[1월 21일]
.....거말(居末)한 백예원은 방직기와 함께 광대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2월 21일]
활을 쏘았다.........“두민(斗敏)이 활을 잘 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그 방직기인 태옥(太玉)의 죄다.”
​라고 하면서 잡아 들여 광대 옷을 입히고 종일 춤을 추게 하였다.

 

이런 생활을 했던 방직기를 단지 호칭 끝에 기(妓)자가 붙었다고 해서 기녀로 분류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으로 보인다. 방직기는 그냥 여종일 뿐이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이렇게 적었다.

 

【기생은 가난하더라도 모두 예뻐해 주는 자가 있으니 돌봐줄 것이 없다....(중략)...

가장 불쌍한 것은 얼굴이 추한 급비(汲婢)이다. 겨울에는 삼베옷을 입고 여름에는 무명옷을 입으며, 머리는 쑥대강이같이 생겨가지고 밤에는 물을 긷고, 새벽에는 밥을 짓느라 쉴 새 없이 분주하다.】

 

방직기들은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군관들의 살림을 도왔다. 그러나 「부북일기(赴北日記)」에는 자신의 살림을 도와준 방직기에 대한 고마움이나 그 노고를 인정하는 표현은 단 한마디도 없다.

 

 

 

참고 및 인용 : 부북일기(꽃향기 나는 돌, 네이버 블로그 ‘조선왕조실록’),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