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138

옥계시사(玉溪詩社)

15세부터 37세 까지의 남자 13명이 1년에 열두 번을 이렇게 모였다. 음력 정월 : 다리 밟으며 달구경하기. 음력 2월 : 높은 산에 올라 꽃구경하기. 음력 3월 : 한강 정자에서 풍취(風趣)있는 놀이하기. 음력 4월 : 성루에서 초파일 등(燈) 구경하기. 음력 5월 : 밤비에 더위 식히기. 음력 6월 : 흐르는 물에 갓끈 씻기. 음력 7월 : 청풍산 산기슭에서의 수계(修稧). 음력 8월 : 국화 핀 동산에서 모임하기. 음력9월 : 산사에서의 그윽한 약속하기. 음력 10월 : 눈 속에서 마주앉아 고기 구워먹기. 음력 11월 : 매화나무 아래서 술자리 열기. 음력 12월 : 섣달그믐에 밤새우기. 그리고는 모일 때마다 모인 사람 모두가 시를 지었다. 시를 잘 지어 연이어 세 번 장원하는 사람은 예주(醴酒..

우리 옛 뿌리 2021.02.06

일제강점기 건축물

흔히 강화도조약으로 불리는 왜국과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래 조선은 미국, 영국, 독일 ,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 연이어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조선에는 이들 나라가 조선에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개설함으로써 외국의 외교관들이 상주하기 시작했다. 미국공사관이 정동에 터를 잡고, 그 뒤를 이어 영국영사관, 러시아공사관이 정동에 자리 잡으면서 정동은 외국 공사관의 거리로 변모하게 된다. 러시아 , 프랑스, 영국 등은 1890년부터 이곳에 서양식 건물을 공관으로 짓기 시작했다. 조선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 규모나 위세가 서양식 건물을 처음 보는 조선인들에게는 대단했겠지만, 외국인 중에는 이 건물들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 인물도 있었다. 미국공사관 서기관의 신분으로 한국..

우리 옛 뿌리 2020.12.01

박문사(博文寺)

지금 모두가 공원으로 부르고 있는 장충단은 공원으로 부르면 안 될 이름이다. 장충단(奬忠壇)은 충성됨을 기린다는 의미다. 일본공사 미우라가 주동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때에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장졸들을 기리기 위한 제단이었다. 을미사변 5년 뒤인 1900년에 고종의 명에 의하여 어영청(御營廳)의 분영(分營)인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사당을 짓고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뒤이어 을미사변 때 순사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순절한 문신들도 배향되었다. 이런 곳이 일제의 입장에서 눈에 거슬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일제는 1910년에 이 사당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1919년에는 이곳 일대에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고는 장충단공원이라 불렀다...

우리 옛 뿌리 2020.11.30

조선신궁(朝鮮神宮)

왜놈들이 이 땅에 들어와 무슨 짓인들 안했을까마는, 남산을 훼손한 일에 대해서는 그리 자주 거론되지는 않는다. 1885년 왜인들의 한성 성내 거주가 허용되면서 왜인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곳은 남산 기슭이었다. 일본공사관부터 시작해서 한국주차군(駐箚軍) 사령부, 통감부, 통감관저, 헌병대 사령부 등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건물들이 남산 곳곳에 들어섰다. 그와 함께 지금의 충무로 3, 4, 5가에 해당하는 진고개 일대는 왜인 거류 지역으로 바뀌었다. 1893년경에 이미 이 일대에 100여개의 왜인 상점이 들어섰다. 진고개는 조선시대 내내 가난한 선비들이 살던 남산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한국주차군(駐箚軍) : 한반도에 주둔했던 왜군 중, 상주하는 군대는 주둔군(駐屯軍)이라 하고, 2년마다 본토의 부대와 교체..

우리 옛 뿌리 2020.11.29

서울의 옛 이름 - 한성(漢城)

조선시대 그림 중에서 아마도 집을 이렇게 많이 그린 그림은 없을 듯하다. 일명 로도 불리는 이 그림은 조선 말기의 중인 출신 화가인 김수철(金秀哲)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수철의 생몰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862년의 관지가 있는 작품이 남아있어 대강의 활동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1800년대 중반의 한양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오른쪽 멀리 도봉산으로부터 삼각산, 백악산, 인왕산까지 이어지는 연봉을 배경으로 남산에서 내려다 본 한양의 도성 안을 모두 그렸다. 그러면서도 궁궐이나 관청에 특별한 비중을 두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도성 안을 민가로 가득 채운 점이 특이하다. 우리가 흔히 한양(漢陽)으로 알고 있는 조선시대 수도 서울의 정식명칭은 한성부(漢城府)이..

우리 옛 뿌리 2020.11.28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6

사신들은 북경의 옥하관(玉河館)에 머무르면서, 10월 18일 새벽에 조회(朝會)에 참석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五拜三叩頭] 뒤 물러나왔다. 그 뒤 그들의 북경에서의 나날은 바다에서 겪던 고초만큼이나 고달팠다. 11월 8일 【예부의 복제(覆題)가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므로 우울함을 견디지 못하여 소갑(小甲)을 불러 그 연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근자에 남교(南郊)의 대례(大禮)가 박두하였으므로 지체되었습니다. 일전에 예부의 여러 관원이 회의하는 곳에서 들으니 평이 좋았으니, 과히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복제(覆題) : 회답하는 글. 인조의 왕위 책봉을 상주한 글에 대한 회답. 11월 15일 【맑음. 세월은 흘러가고 사세(事勢)는 점점 요원하므로, 황효성(黃孝..

우리 옛 뿌리 2020.11.27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5

30일 평원현(平原縣)으로 향하는 길에 유비(劉備)의 옛 읍치(邑治)와 도원결의(挑園結義)를 했던 곳임을 알리는 길가의 큰 비석을 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전국시대 조(趙)나라 땅이다. 성(城) 남쪽에는 평원군(平原君)의 사당이 있고, 성안에는 안진경(顔眞卿))의 사당이 있었다. ▶안진경(顔眞卿: 709 ~ 785)은 왕희지의 전아한 서체에서 벗어나 역동적이면서도 균제미(均齊美)를 갖춘 글씨체로 당(唐)나라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했던 인물이다. 10월 1일은 덕주(德州)에서 유숙했다. 남경(南京)은 일찍이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초(楚)나라의 금릉읍(金陵邑)이었던 곳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인 229년에 오나라의 손권(孫權)이 건업(建業)이라고 개칭한 곳이다. 후한이 멸망한 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

우리 옛 뿌리 2020.11.26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4

홍익한은 9월 17일 창읍현(昌邑縣)으로 가는 길에, 과거에 급제하여 새로 벼슬을 얻어 북경으로 올라가는 왕응치(王應豸)라는 인물의 행차를 본 일이 있었다. 말단미관에 불과한 그의 행차가 심히 성대함을 보고 홍인한은 중국이 사대부를 우대하는 것을 알겠다고 감탄하였다. 홍익한 자신도 그 해에 치러진 정시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왔기에, 그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일에 창락현(昌樂縣) 남관(南關)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길에서 보았던 왕응치(王應豸)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그날의 일을 홍익한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곳에서 한 수재(秀才)를 만났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관정(觀政) 왕응치(王應豸)의 아들인데 내주(萊州)에서 아버지를 따라 같이 왔습니다.” 하고, 나에..

우리 옛 뿌리 2020.11.25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3

풍랑이 심하여 8월 21일은 배를 평도 항구 깊숙한 곳으로 옮겨 정박했다가, 22일 새벽에 순풍을 얻어 순식간에 황성도를 지나고, 한낮에는 진주문(眞珠門)을 거쳐 묘도(廟島) 앞 항구에 다다랐다. 묘도에서 등주까지는 80리라고 기록되었으니 마침내 육지인 등주(登州)를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여섯 척의 배 중에 5척은 도착했지만 제4선으로 불리는 배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도 험난한 바다를 무사히 건너온 기쁨에 사신 일행은 그날 저물녘에 신녀묘(神女廟) 앞으로 배를 옮기고 제문을 지어 해신(海神)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홍익한은 “이날 밤에 바람은 자고 물결은 고요하니, 뱃길을 떠난 후에 비로소 편안히 잠잘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다음날 저녁나절에 제4선이 뒤늦게 도착했다. 황성도(皇城島) 앞바..

우리 옛 뿌리 2020.11.24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2

사행에는 여섯 척의 배와 사백 여 명의 격군(格軍)이 동원되었다. 3척은 각각 정사, 부사, 서장관의 배인 기선(騎船)이고 나머지 3척은 봉물을 실은 복선(卜船)이었을 것이다. 8월 4일 선사포를 출발한 배는 포구를 벗어나기 무섭게 비바람이 크게 일어 결국 닻을 내리고 항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오후에 다시 출항하여 새벽에 가도(椵島)에 도착하였다. 가도는 철산 선사포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목장을 설치하여 감독관을 두고 말을 사육하던 곳 중의 하나였다. ▶격군(格軍) : 곁군의 취음(取音)이다. 수참(水站)에 소속 되어 배를 부리는 등의 일을 하던 수부(水夫). 당시 이곳에는 모문룡(毛文龍)이라는 명나라 장수가 명나라 군대와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후금에게 빼앗긴 요동지방을 ..

우리 옛 뿌리 2020.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