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138

조선의 기생 7 - 관리숙창률

조선시대 초기부터도 관리를 포함한 양반 사대부들이 기생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거나 첩으로 삼는 일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한 풍기문란의 문제도 일찍부터 제기되었었다. 세종 때에 평안감사 윤곤(尹坤)은 왕의 명령을 받아 사행하는 사신들이 지방 관아의 기생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하라는 아래와 같은 건의서를 올렸다. 【"우리 동방이 해외의 한 작은 나라로서, 중국과 견주는 것은 특히 예의가 존재하기 때문 이온데, 요즘 대소 사신이 명령을 받들고 외방에 나가면, 혹은 관기(官妓)와 사랑에 빠져 직무를 전폐하고 욕심껏 즐기어 못할 짓 없이 다하며, 만약 기생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그 수령이 아무리 어질어도 취모멱자(吹毛覓疵)하여 일부러 죄망에 몰아넣고, 명사들끼리나, 한 고..

우리 옛 뿌리 2021.04.27

조선의 기생 6 - 흥청망청

여악 가운데서도 연산군이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인 것이 흥청(興淸)이다. 지금 ‘흥청망청(興淸亡淸)’ 이라는 말은 재물을 함부로 낭비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모두가 아는 대로 이 말은 연산군이 흥청에 재물을 낭비하여 결국 망조에 이르게 되었음을 가리키는 데서 비롯되었다. 흥청은 운평 가운데서 외모와 재기로 선발한 최정예 여악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연산군의 여인집단이기도 했다. 연산군은 흥청을 직접 심사하여 선발하였는데 그 기준이 까다로워 정원 300명을 정해놓고도 몇 달이 지나도록 그 인원수를 채우지 못하였다. 【전교하기를, "광희·운평은 거의 수를 채우게 되었거늘, 흥청(興淸)은 어찌하여 수를 채우지 못하는가? 흥청의 원액(元額) 및 현재 간택된 수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매, 장악원..

우리 옛 뿌리 2021.04.21

조선의 기생 5 - 연산군

조선의 여악제도는 연산군 대에 이르러 대전환을 맞는다. 연산군은 궁중의 악제를 개편하여 여악을 둘로 나누어 각기 흥청(興淸)과 운평(運平)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면서 "소위 흥청(興淸)이란 사예(邪穢)를 깨끗이 씻으라는 뜻이요(所謂興淸 乃蕩滌邪穢之意也), 운평(運平)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모든 악공(樂工)과 악생은 모두 광희(廣熙)라고 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모든 여기(女妓)를 운평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연산군이 여악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갑자사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연산군 10년인 1504년이었다. 【전교하기를, "기녀는 곧 어전에서 정재(呈才)하는 사람이니, 모름지기 젊고 모습이나 얼굴이 좋은 자를 가려서 문적(文籍)에 두어야 하며, 음률..

우리 옛 뿌리 2021.04.17

조선의 기생 4 - 약방기생

의녀들이 궁중 연회에 의장여령으로 참석하게 된 20여년 후인 1502년 《연산군일기》에는 이런 기사가 올라있다. 【서울 안의 각사(各司)에서 공적으로 차린 연회에는 혹은 본사(本司) 혹은 경저(京邸)에서 의녀(醫女)와 여기(女妓)를 불러오게 하니, 이 일로 인하여 각사의 노비들이 피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이와 같은 법을 범한 관리들은 사헌부로 하여금 엄중히 금지시키고 공의에 논할 것 없이 파출(罷黜)시키소서.】 (《연산군일기》연산 8년 1월 28일 기사) ▶파출(罷黜) : 관직에서 파면(罷免)하는 동시에 관등(官等)을 낮춤. 이 기사를 통하여 궁중에서의 신역을 담당하기 위해 차출된 여악과 의녀들이 궁궐 행사가 아닌 관청과 지위 있는 자들의 사사로운 행사에 불려 다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 옛 뿌리 2021.04.09

조선의 기생 3 - 의녀(醫女)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기생들 외에도 혜민서(惠民署)와 내의원(內醫院) 소속 의녀(醫女)인 약방기생(藥房妓生)과 상의원(尙衣院) 소속 침선비(針線婢)인 상방기생(尙房妓生) 또는 공조기생(工曹妓生)이 있었다는 것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기생의 역을 같이 담당했던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 세종 5년(1423년) 12월 27일 기사를 보면 그들의 선발기준부터 여악과는 다르다. 【예조에서 계(啓)하기를, "제생원(濟生院)의 의녀(醫女)들은 반드시 먼저 글을 읽게 하여, 글자를 안 연후에 의방(醫方)을 읽어 익히도록 하고 있으니, 지방에서 선발하여 올려 보내려고 하는 의녀도 또한 지금 거주하고 있는 그 고을의 관원으로 하여금 먼저 《천자(千字)》, 《효경(孝經)》, 《..

우리 옛 뿌리 2021.04.05

조선의 기생 2 - 관기(官妓)

새로운 나라 조선에서 고려시대의 여악(女樂)제도를 계승하고, 조선시대 내내 성리학자들의 끊임없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생 제도가 1908년까지 유지된 것은,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생겨난 폐해 못지않게 애초 제도를 설립할 때의 효용성도 함께 존재했기 때문이다. 기생(妓生)은 조선의 국역체계(國役體系)의 한 부분으로, 관부(官府)에 예속된 여자 종[공노비(公奴婢)]에게 부여된 신역(身役)의 하나였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관비(官婢)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생(妓生)인데 일명 주탕(酒湯)이라고도 하고, 하나는 비자(婢子)인데 일명 수급(水汲)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평안도 풍속에 자색이 있는 관비(官婢)를 주탕(酒湯)이라 한다”고 했다. 수급(水汲)은 수급비(水汲婢)라..

우리 옛 뿌리 2021.04.01

조선의 기생 1 - 여악(女樂)

국어사전에 ‘기생’은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런 설명을 보면서 ‘기생’에 대해 떠올리는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유녀나 작부 또는 호스티스와 같은 이미지가 떠오를 수도 있고 음식상이 차려진 술자리에서 춤추는 모습이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은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퇴락해가던 시기의 기생의 모습에 더 가깝다. 기생은 매춘부나 창녀처럼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직업이 아니다. 그들은 선발되어 교육받고 훈련되어 탄생한 연예인이자 예술인이었다. 기생(妓生)이라는 한자어는 조선시대 문헌에서 처음 등장한다고 하는데 그 연원을 따지자면 여악(女樂)이다. 여악(女樂)은 한성(漢城)과 지방의 국가기관에서 신..

우리 옛 뿌리 2021.03.28

투호아집도(投壺雅集圖)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인 투호(投壺)는 지금도 명절 때면 고궁이나 한옥마을에서 민속놀이 형태로 제공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투호는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놀이로 후대에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진나라 제후와 제나라 제후가 술을 마시는 가운데 투호를 한 것으로 『춘추좌전(春秋左傳)』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특히 당나라 때에는 손님 접대의 수단이 되기도 했으며, 주로 왕실이나 귀족층의 놀이로 발달해 왔다. 이러한 투호가 언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여러 기록을 통하여 삼국시대에 이미 투호가 시행되었고, 특히 고구려와 백제에서 크게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한동안 시행되지 않다가 예종 때 송나라에서 투호의 도..

우리 옛 뿌리 2021.03.19

자줏골에서의 무관 연회 - 탑동연첩(塔洞宴帖)

1803년 지금의 창신동 지역인 자줏골에서 무관들을 위한 잔치가 열렸다. 그리고 이 잔치를 기념하는 그림과 몇 편의 시로 구성된 첩이 이다. 유경원(劉璟源)이란 인물이 쓴 발문에 의하면 “병신년(1836년) 초춘(初春)에 내가 이름을 쓰고 첩을 만들어 병영에 두었는데, 이것은 계해년(1803년) 유람(勝遊) 때에 만든 것”이라고 하여 첩이 만들어진 시기는 잔치가 있은 훨씬 뒤임을 알 수 있다. 임유린(林有麟)이란 인물이 작성한 서문에 이 잔치의 내력이 들어있다. 【사또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이 특별히 은택을 베푸시어 우리들 108명이 휴식하는 밑천으로 3섬의 쌀을 내려 주시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춤추니 죽을 곳을 알지 못할 정도이다. 또한 부장인 전 첨사 김명숙(金命淑)이 원수(元帥)의 은혜를 따라 ..

우리 옛 뿌리 2021.03.07

북한산에서의 계회(契會)

조선 후기에 중인들이 인왕산 자락의 계곡에서 시사(詩社)를 연 일이나 관리들이 남산에서 계회(契會)를 가진 일들은 많은 그림과 기록을 통하여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인왕산만큼은 아니지만 북한산에서도 계회나 시사를 갖기도 했던 모양이다. 지금의 북한산이야 인왕산이나 남산처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도성 밖에 있는 데다, 산에 이르는 길조차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돌고 돌아야만 했기 때문에 당일로는 다시 도성에 돌아올 수도 없는 산이었다. 1857년에 안시윤(安時潤)이라는 인물과 그 벗들이 계를 이루어 음력 3월 보름에 북한산의 중흥사(重興寺)에 묵으면서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그 일을 기록하고 그림으로 그려 「금란계첩(金蘭契帖)」이라..

우리 옛 뿌리 2021.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