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138

조선의 기생 22 - 기방 풍속

조선 전기에는 기생의 거처를 창가(娼家)라고 불렀다. 그저 기생이 유숙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등장한 기방(妓房)은 기생의 거처인 동시에 영업 공간이었다. 기방의 기생은 의녀와 침비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여러 가지 사유로 한양에 올라왔다가 내려가지 않은 향기(鄕妓)들도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의 국문소설「게우사(誡愚詞)」의 주인공 무숙이와 평양 기생 의양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고, 또 다른 조선 후기의 한문단편집인 「차산필담(此山筆談)」의 이란 야담에도 나타난다. 종로(鐘路)의 큰 기방에 있는 기생이 자신을 “저는 본래 평양 교방(敎坊)의 일등이었습니다. 개성의 대상(大商) 백유성(白惟性)이 만금을 투자하여 이 누대를 꾸미고 저를 술청에 앉혀두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우리 옛 뿌리 2021.09.01

어을우동(於乙宇同)

1985년 이장호가 감독하고 이보희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이래 전모(氈帽) 쓴 기생 차림의 여인에다 어우동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허다한데, 어우동은 기생이 아니었다. 버젓한 양반 가문 출신에다 왕실 가문인 종친(宗親)의 부인이었다. 어우동의 아버지 박윤창(朴允昌)은 승문원 지사(承文院知事)라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승문원(承文院)은 조선시대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로, 지사(知事)는 정3품 관직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권응인{權應仁)이 지은 시화 및 일화집인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조차 어우동에 대하여 “호서(湖西)의 창(娼)으로 농부의 딸이었으나 단정하지 않아, 그 시가 뛰어나나 싣지 않는다.”고 했다. 권응인이 명종 때의 인물인데, 이때부터도 ..

우리 옛 뿌리 2021.08.30

조선의 자유부인 유감동(兪甘同)

정조 때에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을 지냈던 이덕무(李德懋)는 『사소절(士小節)』이라는 제목의 수신서(修身書)에 이런 글을 남겼다. 부인이 말할 때마다 죽는다느니 죽이겠다느니 하는 것은 집안에 상서롭지 못하다. 또 잘 울거나 공교롭게 미소를 지어서도 안 된다. 평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은 원망하는 듯 보이고, 다른 사람의 귀에 대고 소곤대는 모습은 누군가를 헐뜯는 듯 보인다. 쉼 없이 희희낙락하는 모습은 음탕한 듯 보이며, 쉬지 않고 노닥거리는 모습은 가혹함에 가깝다. 집안의 남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근심하거나 탄식하는 소리를 내고, 집안의 여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원망하고 한탄하는 말을 하게 되면 집안 질서가 무너질 뿐 아니라 운세 또한 기울어갈 것을 예측할 수 ..

우리 옛 뿌리 2021.08.24

조선의 기생 21 - 주점과 기방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거치면서 생겨난 국가적 혼란은 조선의 사회적 변동을 불러왔다. 왜란 이후 남발한 공명첩(空名帖)과 그 관리 부실은 조선 사회의 중심축이었던 신분제도를 문란케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숙종 때까지만 해도 전체 인구 중 6%밖에 되지 않았던 양반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 정조 대에는 30%에 이르고 고종 때에는 인구의 9할이 양반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당연히 양반에 대한 권위를 떨어뜨렸다. 그런 와중에 사대부와 관료 중심의 조선사회에 새로운 신분 세력이 떠올랐다. 신흥 부유층이다. 종래의 조선사회에서는 부(富)마저도 양반들이 독점했었지만, 상업과 교역이 발전하면서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부상(富商)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와 아울러 의관(醫官), 역관(譯官)과 같은 ..

우리 옛 뿌리 2021.08.22

1884년 조선 사진

조선 말기의 사진에 해설을 덧붙인 흥미롭고 유익한 영상이다. 퍼시벌 로웰(1855 ~ 1926)은 호기심이 많았던 인물인 듯하다. 그는 보스턴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수학을 전공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문의 사업을 돕다가 일본에 관심이 생겨 일본을 방문한다. 그가 일본에 머물던 중, 1883년 5월에 주일 미국 공사의 주선으로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일행을 만나게 된다. 보빙사란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사절단을 의미하는데, 당시 로웰이 만난 보빙사는 조미통상사절단이었다. 전 해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후 이듬해 미국의 공사가 조선을 방문한데 대한 답례와 양국 간의 친선을 위한 목적으로 파견되는 사절이었다. 보빙사 일행은 당시 28세였던 로웰의 안내를 받아 8월부터 11월까지 ..

우리 옛 뿌리 2021.08.17

조선의 기생 20 - 방직기

「부북일기(赴北日記)」에는 기생, 주탕, 방직기라는 호칭이 모두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을 모두 통틀어 창기(娼妓)로 부르는 예가 많다. 하지만, 부북일기(赴北日記)」에 이렇게 호칭을 나눈 것을 보면 이들 사이에는 지금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관비(官婢)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생(妓生)인데 일명 주탕(酒湯)이라고도 하고, 하나는 비자(婢子)인데 일명 수급(水汲)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기생과 주탕을 같은 개념으로 취급하였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이 흥청의 숫자를 채우는 일로 고민할 때 “평안도 풍속에 자색이 있는 관비(官婢)를 주탕(酒湯)이라 하는데, 혹은 노래 혹은 음률을 알아 또한 간택할 만합니다...

우리 옛 뿌리 2021.08.08

조선시대에는 어디서 자고 먹으며 여행했을까? 3

인조 때인 1644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박취문(朴就文, 1617 ~ 1690)은 바로 그 해에 함경도로 출발하여 회령에서 약 1년간 부방(赴防)을 했다. 그리고 부방을 위해 길을 떠나 돌아올 때까지의 일을 일기로 남겼고, 그보다 40년 앞서 부방을 했던 그의 아버지 박계숙의 일기와 함께 「부북일기(赴北日記)」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 사람의 일기에는 당시 사람들이 어디서 자고 먹으며 어떻게 여행했는지를 알 수 있는 생생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부자는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나 당시에는 아직 벼슬에 오르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여행이 북쪽 국경을 지키는 임무라는 공무(公務)를 위한 여행이었기에 그들도 관원(官員)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연도(沿道)의 각 역참(驛站)에서 ..

우리 옛 뿌리 2021.08.02

조선의 기생 19 - 노류장화

박취문과 그 일행의 엽색(獵色)행각은 여행 내내 계속되었다. [​1월 21일] 윤신길이 이른 아침에 방문했다. 기천(岐川) 정자(正字)의 아들 한희주(韓希注)가 들렸다. 식후에 천총(千摠) 이집을 만났다. 집주인이 나를 위해 성대하게 음식을 장만하여 주니 여러 동료들을 청하여 함께 먹었다. 매우 감사하였다. 저녁에 기생 4, 5명을 불러보았다. [1월 23일] 병영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방(同榜) 급제자 김찬(金贊)이 술을 가져와서 마셨다. 정오에 홀로 향교에 갔는데, 훈장 문일장(文日章)과 유사(有司) 이정겸(李廷謙), 원기(元琦)가 명륜당 위로 맞이하여 술상을 차려주어서 크게 마시고 돌아왔다. (중략) ​날이 어두워질 때 사향소(四鄕所), 향교의 사임(四任) 한희주(韓希注), 주목(朱楘) 등이 술과 안..

우리 옛 뿌리 2021.07.27

조선의 기생 18 - 성(性)풍속

유학(儒學)의 나라 조선은 ‘남녀(男女)’하면 ‘유별(有別)’이란 단어부터 떠오를 정도라, 남녀 간의 관계가 매우 엄격한 만큼 성관계도 매우 절제되었을 것이라는 선입감을 갖게 된다. 물론 지배계층인 양반들 사이에서는 그런 모양새를 갖추려 노력했고 또 갖춘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양반들은 신분이 다른 계층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잣대를 적용했다. 양반 부녀자들은 수절이니 정절이니 하는 가치관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아래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가치관을 따르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다. 기생이나 노비의 정절은 지킬 만한 가치도 없고 대상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조와 인조 때 각기 부방(赴防)을 했던 부자(父子)가 있었다. 부방(赴防)이란 무과(武科)에 급제한 무관(武官)들이 아직 벼슬에 오르기 전, 서북..

우리 옛 뿌리 2021.07.23

조선의 기생 17 - 사회적 인식

머리를 얹지 않은 10대 초반의 나이 어린 여자 기생을 동기(童妓)라 하고, 이들은 머리를 올린 뒤에야 정식 기생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동기는 지방의 교방(敎坊)에서 악가무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기예(技藝)를 닦는 동안에도 여악에 동원되는 일이 있었다. 지방의 향연에 동원되기도 하고, 특히 궁중정재 가운데 연화대(蓮花臺)와 선유락(船遊樂)에서는 나이 어린 여악(女樂)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동기들이 머리를 얹는 것은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분이 관기(官妓)이기 때문에 이것도 관아에서 관여를 했다. 동기가 머리를 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기생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예의 습득수준이 먼저지만 그와 함께 나이도 고려사항에 포함되었다. 대략 15세 전후다. 일반적으로 노비는..

우리 옛 뿌리 2021.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