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22 - 기방 풍속

從心所欲 2021. 9. 1. 11:30

조선 전기에는 기생의 거처를 창가(娼家)라고 불렀다. 그저 기생이 유숙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등장한 기방(妓房)은 기생의 거처인 동시에 영업 공간이었다. 기방의 기생은 의녀와 침비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여러 가지 사유로 한양에 올라왔다가 내려가지 않은 향기(鄕妓)들도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의 국문소설「게우사(誡愚詞)」의 주인공 무숙이와 평양 기생 의양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고, 또 다른 조선 후기의 한문단편집인 「차산필담(此山筆談)」의 <하미감승(嚇美酣僧)>이란 야담에도 나타난다. 종로(鐘路)의 큰 기방에 있는 기생이 자신을 “저는 본래 평양 교방(敎坊)의 일등이었습니다. 개성의 대상(大商) 백유성(白惟性)이 만금을 투자하여 이 누대를 꾸미고 저를 술청에 앉혀두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기방은 지금 현재의 송현동, 사간동, 중학동 일대에 걸쳐 있던 벽장동과 지금의 세종로 일대인 육조 앞 그리고 지금의 다동(茶洞)인 다방골에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방에 양반과 고관대작들이 드나들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사극 때문에 생긴 오해다. 양반이나 권세 있는 인물들은 기생을 불러 자기들끼리 따로 놀았다.

 

[신윤복 <청금상련(聽琴賞蓮)> 또는 <연당야유도(蓮塘野遊圖)>, 지본채색(紙本彩色), 28.2cm x 35.3cm, 간송미술관]

 

[신윤복<상춘야흥(賞春野興), 지본채색(紙本彩色), 28.2cm x 35.6cm, 간송미술관]

 

[신윤복 <쌍검대무(雙劍對舞)>, 지본채색(紙本彩色), 28.2cm x 35.6cm, 간송미술관]

 

기방은 무인(武人)과 조선후기에 등장한 부유한 중인층이 주 고객이었다. 룸살롱처럼 한 곳에 기생이 여럿 있었던 것도 아니다. 대개가 혼자이고 많아야 두세 명을 넘지 않았다. 이런 기방에서 파트너를 생각하는 것 역시 사극과 요정 문화에 물든 탓이다.

한 기생을 두고 여러 패의 손님들이 둘러앉은 자리니 분위기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격식을 알지 못한 채 기방에 들어갔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현종 때인 1662년의 실록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장령 이정(李程) 등이 탄핵하기를,

"전 정언(正言) 정창도(丁昌燾)가 지난번 등석(燈夕)에 사자(士子) 몇 사람과 함께 술이 취해 창가(娼家)에 들렀다가 심야에 걸어오면서 무인(武人)들이 여악(女樂)을 즐기며 모여 마시는 곳에 돌입하여 서로들 싸움을 했다는 이야기가 자자하게 퍼졌으니, 사부(士夫)로서 이보다 더 심한 치욕이 없습니다. 정창도를 파직시키고, 무인도 해부(該部)로 하여금 적발해 내어 죄를 매기게 하고, 사자는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벌을 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현종실록》 현종 3년 4월 25일]
▶등석(燈夕) : 초파일 저녁
▶사관(四館) : 조선시대 교육·문예를 담당하던 성균관(成均館), 예문관(藝文館), 승문원(承文院), 교서관(校書館)의 4 관서.

 

정언(正言)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正六品) 벼슬이고, 사자(士子)는 학식(學識)은 있되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를 가리키나 글에서는 과거에 급제했으나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예비관료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방의 분위기가 이렇듯 언제든 험악할 수 있다보니 점잖은 양반들은 알아서 출입을 삼갔을 것이다.

 

역대 기생들의 역사와 실상을 정리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이능화는 정조, 순조 때의 무신(武臣)으로 조선 후기의 양반 오입쟁이 가운데 제일이라는 소리를 듣던 서춘보(徐春輔)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청루(靑樓)에 드나드는 데에는 인사하는 법을 비롯해 여러 가지 까다로운 법도가 있어서 잘못하면 풍파가 일어나고 잘하면 봄바람이 돌았다”고 했다.

강명관의 「조선풍속사」에서는 기방에 들어갈 때의 인사법을 이렇게 소개했다.

“들어가자.”
선입객(先入客) : “두루...”
“평안호(平安乎)?”
선입객 : “평안호?”
“무사한가?”
기생 : “평안합시요?”

 

“들어가자.”는 기방을 찾은 손님이 방안에 먼저 와 있는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로 들어가도 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에 먼저 온 손님이 방안에서 들어오라는 뜻으로 “두루...”하고 말끝을 흐리는 것은 밖의 손님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니 대충 말을 씹는 것이다. 그러면 손님은 방에 들어서며 먼저 와있는 손님에게 “평안하신가?”고 인사를 하고 먼저 온 손님도 이에 응답한다. 그런 다음 손님은 기생에게 “별일 없나?”하는 의례적 인사를 건네고 기생도 이를 받는다.

 

줄곧 안산(安山)에서만 살다가,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한양 생활을 처음 경험한 18세기 후반의 강이천(姜彛天)이란 인물은 그가 직접 보고들은 한양 풍경들을 많은 시로 읊었는데, 그 가운데는 기방에서의 이러한 독특한 인사법을 다룬 한시(漢詩)도 있다.

처마 끝 버드나무에 지등(紙燈)을 내걸고
술독들 술 갓 괴어오르니 마음도 무르녹네.
좌중에 사람을 마주치면
성명은 통하지 않고 “평안호” 묻노라.

 

그러나 인사를 나눴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다. 그 다음부터는 손님 간에 기싸움이 이어진다. 나중에 왔더라도 힘깨나 쓰고 행세를 하는 측이라면 기방에 들어서며 “평안호”를 연발하고는 방을 차지하고 앉은 먼저 온 손님들에게 “좀, 쬡시다!”라는 말로 앉을 자리를 내놓으라고 기세 싸움을 시작한다. 이런 손님이 들면 먼저 온 손님 중에는 알아서 하나 둘 자리를 뜨기도 하지만, 기세에 눌리지 않고 반격하는 이도 있다.

“게가 여기를 어딘 줄 알고 들어왔소?”
“기생의 집으로 알고 들어왔소.”
“게 같은 오입쟁이는 처음 보았으니 나가오.”

 

이때 나중 손님이 기세가 꺾인 경우에는 “내 보아하니, 오입 연조가 나보다 높은가 보오.” 하고 나간다. 하지만 역으로 “너 같은 오입쟁이는 보지 못했다.”고 반격을 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되면 어느 쪽에서든 상대방 갓의 갓모자를 담뱃대로 치고 주먹을 날렸다. 그러면 서로 치고받는 난투극이 벌어지게 된다.

 

[신윤복 <유곽쟁웅(遊廓爭雄)>, 지본채색(紙本彩色), 28.2cm x 35.6cm, 간송미술관]

 

위 <유곽쟁웅> 그림에서 갓모자와 양태가 떨어져 나간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반드시 이렇듯 험악하게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시비하던 손님이 나가는 손님을 불러 세우기도 한다. 그러면 나가던 객은 돌아와서 앉고, 선입객이 “기생집에서 인사가 왜 있겠소만, 인사합시다.”하면 그때는 앞의 시비를 잊고 함께 기방에서 놀게 된다.

 

기방에서 논다는 것은 기생에게 거문고나 가야금을 연주하게 하거나, 노래를 시켜 듣는 것이다. 기방에서는 기생이 춤은 추지 않았다 한다. 아마도 협소한 공간과 더불어 음악 연주자가 따로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기생에게 악기 연주나 노래를 시킬 때에도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기생을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방안의 다른 손님들과 같이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생에게 무언가를 시킬 때는 반드시 합석한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이때는 반드시 “좌중에 통할 말 있소.”라고 운을 떼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한다.

「조선풍속사」에 실린 기방에서 놀 때의 일반적 대화법이다.

 

“좌중에 통할 말 있소.”
“무슨 말이오?”
“주인 기생 소리 들읍시다.”
“좋은 말이오. 같이 들읍시다.”
“여보게.”
“네.”
“시조 부르게.”
“네.”
기생이 시조 한 장을 부르면 이번에는 객이 이렇게 말한다.
“시조 청한 친구한테 통할 말 있소.”
“네. 무슨 말이오.”
“나머지 시조는 두었다 듣는 청 좀 합시다.”
“청 듣다 뿐이오. 여보게.”
“네.”
“친구가 청을 하시니 나머지 시조는 이담에나 오거든 하라기 전에 하렷다.”
“네.”
“수구했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묻는 것은 혹 시비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여러 객들이 한 기생을 두고 앉은 자리이고 각 객들이 기생에게 원하는 것이 다를 수도 있으니 서로 사전에 의견조율을 거치는 것이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조선풍속사(강명관, 2010, 푸른역사), 조선후기 서울 기생의 기업(妓業) 활동(조재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