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자유부인 유감동(兪甘同)

從心所欲 2021. 8. 24. 13:22

정조 때에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을 지냈던 이덕무(李德懋)는 『사소절(士小節)』이라는 제목의 수신서(修身書)에 이런 글을 남겼다.

 

부인이 말할 때마다 죽는다느니 죽이겠다느니 하는 것은 집안에 상서롭지 못하다. 또 잘 울거나 공교롭게 미소를 지어서도 안 된다.
평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은 원망하는 듯 보이고, 다른 사람의 귀에 대고 소곤대는 모습은 누군가를 헐뜯는 듯 보인다. 쉼 없이 희희낙락하는 모습은 음탕한 듯 보이며, 쉬지 않고 노닥거리는 모습은 가혹함에 가깝다.

집안의 남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근심하거나 탄식하는 소리를 내고, 집안의 여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원망하고 한탄하는 말을 하게 되면 집안 질서가 무너질 뿐 아니라 운세 또한 기울어갈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옛 책을 보고 옛사람들의 절개와 지조를 깊이 생각해 두었다가, 혹시 불행하게도 재앙과 난리를 만나면 목숨을 아끼지 않아야 절개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평소에 "남편을 위해 마땅히 내 목숨을 버리겠다."는 말을 함부로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된다.
부녀자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놓거나, 손을 흔들고 혀를 내밀며 저속한 말까지 섞어 가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꾸짖는 말을 지나치게 자주 하거나 잔소리가 많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고 아랫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
아이를 때리거나 종을 꾸짖는 소리가 집안 울타리 바깥으로 새어나가면, 그 집안의 질서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외부 사람들은 그 집안의 부인이 얌전하거나 단정하지 못하다고 비웃고, 또 반드시 그 집안의 가장이 식솔들을 잘 단속하지 못한다고 먼저 나무랄 것이다. 간혹 저속한 말까지 섞어가면서 크게 웃고 떠드는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반드시 가장이 집안을 다스리는 도리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경(易經)』에 "여자의 정숙함이 집안사람에게 이롭다."고 했는데, 정자(程子)는 이 말을 "집안사람의 도리는 그 이로움이 여자의 올바름에 있다. 여자가 올바르면 남자의 올바름을 알 수 있다."고 해석했다.
갓 결혼한 부인은 시댁의 자질구레한 일까지 시시콜콜 친정 식구들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서씨의 부인이 된 죽은 누이동생은 과묵하고 말수가 적었다. 10여 년간 가난하게 살았지만, 친정에 와서 시댁의 일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인의 모범이 될 만하다.
또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부인은 남편의 재주나 현명함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과장하여 말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혼인에 관해 의논할 때, 처녀가 그 말을 듣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음란한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말아야 한다. 그 말을 혹시 듣게 되더라도 귀를 막고 자리를 피해야 한다.
아랫사람을 부를 때 크게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바깥사랑에 들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웃 사람이 듣는다면 어떻겠는가?
과부나 처녀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 참석해 마음껏 웃고 떠드는 행동은 좋지 않다. 나이가 적은 부인이 다른 사람들의 자녀를 보고 '내 아들, 내 딸'이라고 말하는 것도 좋지 않다.

가만 살펴보면, 부녀자들은 과장해서 말하는 일을 즐겨한다. 한 마디 말을 들으면 즉시 그 내용을 엄청나게 부풀려 떠들어댄다. 그렇게 하면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이 꺼려하고 싫어하게 마련이다. 부녀자들은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사소절(士小節)』은 “소절(小節)을 닦아야 대절(大節)을 보고 대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유학의 전통적 관념을 바탕으로 선비의 예절과 수신 규범을 적은 것이다. 위 글은 그중에서도 '언어(言語)' 부분에서 부녀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도 이렇듯 모든 면에서 조신할 것을 강요받았던 조선시대의 여염(閭閻)집 부녀자 가운데 지금 시대에도 좀처럼 보기 힘든 두 명의 음부(淫婦)가 있었다. 하나는 그 유명한 어우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지도가 조금 떨어지지만 그 역시 행적이 만만치 않은 유감동이다. 유감동은 조선 전기인 세종 때의 인물로, 실록에 대강 기록된 그녀의 행적은 현대판 ‘자유부인’도 감히 명함을 못 내놓을 정도다.

 

 

[《세종실록》 세종 9년(1427년) 8월 17일]

임금이 대언 등에게 묻기를,
"사헌부에서 음부(淫婦) 유감동(兪甘同)을 가뒀다는데, 간부(奸夫)는 몇이나 되며, 본 남편은 누구인가. 세족(世族)이 의관(衣冠) 집의 여자인가."
하니, 좌대언 김자(金赭)가 대답하기를,
"간부(奸夫)는 이승(李升), 황치신(黃致身), 전수생(田穗生), 김여달(金如達), 이돈(李敦) 등과 같은 사람이고, 기타의 몰래 간통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사오며, 본 남편은 지금 평강 현감(平康縣監) 최중기(崔仲基)입니다. 중기(仲基)가 무안 군수(務安郡守)가 되었을 때에 거느리고 가서 부임(赴任)했는데, 이 여자가 병을 핑계하고 먼저 서울에 와서는 음란한 행실을 마구하므로 중기가 이를 버렸습니다. 그 아비는 검한성(檢漢城) 유귀수(兪龜壽)이니 모두 사족(士族)입니다."
하였다.
▶의관(衣冠) : 옷과 갓을 차려 입은 관리

 

‘검한성(檢漢城)’은 ‘검교직(檢校職) 한성윤(漢城尹)’의 준말이다. 한성윤(漢城尹)은 지금의 서울시장격인 한성판윤의 아래 관직으로 종2품이다. 검교직(檢校職)은 조선 시대의 관제(官制)에서 정원 이외에 임시로 증원(增員)할 때 붙이는 관직이다. 실제 직사(職事)는 없이 녹봉만 받는 명목상의 관직으로 주로 나이가 많은 원로를 대접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검한성(檢漢城)’은 지금의 서울 명예 부시장 정도의 직책인 것이다.

또한 현감(縣監)은 종6품, 군수(郡守)는 종4품이다. 모두 고을 원님으로 불리는 자리이다.

 

명망 있는 원로대신의 딸이자 사또의 부인인 여자가 상관한 남자가 이름이 밝혀진 것만 5명이고 그 외에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유감동이 남자들을 만난 방법도 충격적이다.

 

[세종 9년 8월 18일]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평강 현감(平康縣監) 최중기(崔仲基)의 아내 유감동(兪甘同)이 남편을 배반하고 스스로 창기(倡妓)라 일컬으면서 서울과 외방(外方)에서 멋대로 행동하므로 간부(奸夫) 김여달(金如達)·이승(李升)·황치신(黃致身)·전수생(田穗生)·이돈(李敦)이 여러 달 동안 간통했는데, 근각(根脚)을 알지 못하므로 수식(修飾)해서 통문에 답했으니 직첩을 회수하고, 감동과 함께 모두 형문(刑問)에 처하여 추국(推鞫)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근각(根脚) : 조선시대 죄(罪)를 지은 죄인(罪人)의 생년월일, 주소(住所), 조상(祖上)의 신원(伸寃) 따위를 기록(記錄)한 신원조사서
▶수식(修飾) : 겉모양(模樣)을 꾸밈

 

여염집 부인인 유감동이 자신을 기생이라 속이고 남자들을 만난 것이다. 그들과 관계한 남자들은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아 사헌부에서는 일단 그들이 관리로 판명되면 관직을 삭탈하고 국문하는 것에 대한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이틀 뒤, 사헌부가 올린 보고에는 더 많은 남자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세종 9년 8월 20일]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유감동(兪甘同)의 간부(奸夫)로서 총제(摠制) 정효문(鄭孝文), 상호군 이효량(李孝良), 해주 판관(海州判官) 오안로(吳安老), 전(前) 도사(都事) 이곡(李谷), 수정장(水精匠) 장지(張智), 안자장(鞍子匠) 최문수(崔文殊), 은장(銀匠) 이성(李成), 전 호군 전유성(全由性), 행수(行首) 변상동(邊尙同) 등이 더 나타났으니, 청하건대 직첩을 회수하고 잡아와서 국문하고, 또 후에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뒤따라 곧 직첩을 회수하고 잡아 와서 국문하게 하소서."

 

‘총제(摠制)’는 조선 초기 중앙군의 최상급 군령(軍令)기관인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버금 벼슬로, 지금으로 치면 군단장(軍團長) 급이다. ‘상호군(上護軍)’은 조선시대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인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이니 최소한 사단장 급이다. 이런 고위 무관직(武官職) 관리들과 함께 수정장(水精匠), 안자장(鞍子匠), 은장(銀匠)과 같은 기술자들의 직책도 등장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에 따른 사회계급에 따르면 농민보다 낮은 계층이다. 유감동의 다양한 남성 편력이 드러난 것이다.

 

세종은 유감동의 남성 편력에도 놀랐겠지만 연루된 인물의 면면 때문에도 곤혹스러웠던 것 같다. 정효문은 과거에 여러 가지 문제로 수차례 탄핵을 받아 처벌을 받았음에도 세종이 그 때마다 구제해준 것을 보면 세종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던 무관(武官)으로 보인다. 또한 이효랑은 공신(功臣)의 후손이었다.

세종은 사헌부의 보고를 받고는 정효문과 이효랑은 일단 직첩(職牒)은 회수하지 말고 잡아 오기만 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이후에 다시 나타나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처리하기 전에 미리 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세종의 처사에 김종서가 이의를 제기했다.

 

"효문(孝文)의 범죄는 비록 사죄 전에 있었지만, 그의 숙부 정탁(鄭擢)이 간통했는데 이를 알면서도 고의로 범했으니,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되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며, 효량(孝良)은 최중기(崔仲基)의 매부(妹夫)이면서 간통했으니, 두 사람의 행실이 짐승과 같으니 모름지기 추궁하여 다스리소서."

 

정효문은 자신의 숙부가 유감동과 관계를 가진 것을 알고도 유감동과 다시 관계를 맺었고, 이효랑은 자신의 처남댁과 관계를 가진 것이다. 아직 성리학이 굳게 자리를 잡기 전의 조선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면 김종서의 말대로 패륜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세종은 이 일이 크게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듯하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여자를 더 추국(推鞫)할 필요가 없다. 이미 간부(奸夫)가 10 수 명이 나타났고 또 재상(宰相)도 끼여 있으므로 일의 대체(大體)는 벌써 다 이루어졌으니 이것을 가지고 죄를 결단해도 될 것이다. 다시 더 추국한다 하더라도 이 여자가 어떻게 능히 다 기억하겠는가. 효문(孝文)은 알지 못하고 간통했다고 말하고 또 공신(功臣)의 아들로서 사죄(赦罪) 전의 일이니 다시 추국하지 말라."
하였다.

 

여기서 ‘사죄(赦罪)’란 국왕의 특권으로 범죄인에 대해 형벌의 전부 혹은 일부를 면죄하거나 형벌의 상실된 자격을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지금의 대통령 사면에 해당하는 것이다. 세종 4년인 1422년, 태종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세종은 “모반 대역(謀反大逆)과 조부모와 부모를 때리거나 죽인 자, 처나 첩으로 남편을 죽인 자, 노비로 상전을 죽인 자, 요망한 독약과 마술을 가지고 고의로 살인하려 꾀한 자와, 다만 강도를 범한 자로서, 자식이 아비를, 처가 남편을, 종이 상전을 죽이려고 한 자는 미수에 그쳤다 할지라도, 증거가 드러난 자를 제외하고 이미 발각된 것이나, 발각되지 아니한 것이나, 이미 판결한 것이나 판결하지 아니한 것을 막론하고 모두 사면하여 석방하라”는 교시를 내린 일이 있었다.

세종은 어떻게든 두 사람을 지켜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건을 더 이상 확대시키고 싶지 않은 세종의 바람과는 달리 유감동을 거친 남자들의 명단이 계속 터져나왔다.

 

[세종 9년 8월 30일]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유감동(兪甘同) 여인의 간부(奸夫)로서 장연 첨절제사(長淵僉節制使) 박종지(朴從智), 행 사직(行司直) 주진자(朱嗔紫), 전 판관 유승유(柳升濡), 내자 판관 김유진(金由畛), 찰방 최심(崔潯), 길주 판관(吉州判官) 안위(安位), 부령(部令) 이수동(李秀東), 진해 현감(鎭海縣監) 김이정(金利貞), 사정 김약회(金若晦), 부사직 설석(薛晳), 여경(余慶), 행수(行首) 이견수(李堅秀), 전직 권격(權格), 별시위 송복리(宋復利), 급제(及第) 이효례(李孝禮) 등이 더 나타났습니다."
하였다.


[세종 9년 9월 2일]
추가로 나타난 유감동(兪甘同)의 간부(奸夫)는 성달생(成達生)·박근(朴根)·박호문(朴好問)·이치(李菑)·이구상(李具商)·홍치(洪治)·남궁계(南宮啓)·유강(柳江)·정중수(鄭中守)이었다.

 

[신윤복 <월하정인>,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ㅣ제시는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달빛이 침침한 삼경(三更)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 이다.]

 

유감동과 관계를 맺은 남자들의 명단이 계속 추가된 끝에 사헌부에서는 그간의 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상간이 이루어진 정황과 연루자들에 대한 처벌 방안을 보고했다.

 

[세종 9년 9월 16일]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검한성(檢漢城) 유귀수(兪龜壽)의 딸이며, 현감(縣監) 최중기(崔仲基)의 아내인 유감동(兪甘同)의 간부(奸夫) 성달생(成達生)·정효문(鄭孝文)·유승유(柳升濡)·김이정(金利貞)·김약회(金若晦)·설석(薛晳)·여경(余慶)·이견수(李堅秀)·이곡(李谷)과 장인(匠人) 최문수(崔文殊)·장지(張智)·이성(李成) 등은 범죄한 것이 사죄(赦罪) 전에 있었고, 전유성(全由性)·주진자(朱嗔紫)·김유진(金由畛)·이효례(李孝禮)·이수동(李秀東)·송복리(宋復利)·안위(安位) 등은 이 여자의 지내온 내력을 살피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간통하여 그 욕심을 마음대로 부렸으며, 이자성(李子成)은 비록 간통은 하지 않았으나 간통한 것과 다름이 없으며, 황치신(黃致身)은 관진(關津)의 아전으로서 지나가는 여자를 불러 서로 간통했는데, 후에는 그 지내온 내력을 알면서도 또한 계속 간통했으며, 변상동(邊尙同)은 이승(李升)이 첩으로 정하여 거느리고 살 때에 몰래 훔쳐서 간통했으니, 다만 마음과 행실이 불초(不肖)할 뿐만 아니라 여러 달을 간통했으니 어찌 이 여자의 지내온 내력을 알지 못했겠습니까. 
이승(李升)과 이돈(李敦)은 근각(根脚)을 알면서도 안연(安然)하게 간통하면서 그의 아버지의 집에까지 드나들었으니, 그 뻔뻔스러움은 말할 수 없습니다.

오안로(吳安老)는 이미 백성의 사표(師表)로서 지나온 내력도 모르는 여자를 관아(官衙)에 끌어들여 간통하고, 관청의 물건까지 팔기도 하고 주기도 하였으며, 전수생(田穗生)도 또한 여러 달 동안 간통하였으니, 그가 근각(根脚)을 안 것은 확실하며, 또한 최복해(崔福海)에게 청하여 맹인(盲人)의 청이라 핑계하고는 단자(單子)를 써서 현재의 군자감(軍資監)에 바쳐서 친히 쌀 10두(斗)를 주었는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또 서생(書生)의 청이라 핑계하여 쌀 1곡(斛)을 주었으니, 벽을 뚫어서 물건을 훔치는 도적과 다름이 없었으며, 이효량(李孝良)은 비록 복제(服制)에 들지 않는 친척이라 하지마는 처남의 정처(正妻)와 간통했으니 사람이라 할 수 없으며, 권격(權格)은 고모부(姑母夫)인 이효례(李孝禮)가 일찍이 간통한 것을 알면서도 또 여러 차례 간통했으며, 김여달(金如達)은 길에서 비접[避病]하러 가는 유감동(兪甘同)을 만나자 순찰한다고 속이고 위협하여 강간하고, 드디어 음탕한 욕심을 내어 중기(仲基)의 집에까지 왕래하면서 거리낌없이 간통하다가 마침내 거느리고 도망하기까지 했으니 완악(頑惡)함이 비할 데가 없었습니다.

유감동(兪甘同)은 조사(朝士)의 정처(正妻)로서 남편을 버리고 도망하여 거짓으로 창기(倡妓)라 일컬어, 서울과 외방(外方)에 횡행하면서 밤낮으로 음란한 짓을 하여 추악함이 비할 데가 없으니, 마땅히 크게 징계시켜 뒷사람을 감계(鑑戒)해야 될 것입니다.

최복해(崔福海)는 수생(穗生)의 간사한 꾀를 듣고 거짓으로 맹인(盲人)이라 핑계하고는 군자감(軍資監) 유귀수(兪龜壽)에게 쌀을 구하였으니, 다만 여자의 음란한 행실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간부(奸夫)도 또한 집안에서 접촉하기를 허용하였으니, 모두 형률에 의거하면 유성(由性)·진자(嗔紫)·유진(由畛)·효례(孝禮)·수동(秀東)·복리(復利)·안위(安位)·자성(子成) 등은 관리로서 창기(倡妓)에게 유숙했으니 곤장 60대를 칠 것이며, 치신(致身)은 남편이 없는 여자와 서로 눈이 맞아서 간통했으니 곤장 80대를 칠 것이며, 이승(李升)은 임지(任地)에 거느리고 가서 영을 어겼으니 태형(笞刑) 50대를 칠 것이며, 안로(安老)는 관리로서 창기(娼妓)에게 유숙했으니 곤장 60대, 포물(布物)을 받고 잡물(雜物)을 방매(放賣)했으니 태형(笞刑) 40대, 양미(糧米)를 주어 스스로 도적질을 하였으니 곤장 80대를 칠 것이며, 수생(穗生)은 창기에게 유숙했으니 곤장 60대, 군자 주부(軍資注簿)로 있을 때에 1곡(斛)이 넘는 쌀을 준 것이 장물(贓物) 1관(貫) 이하는 될 것이니 곤장 80대를 칠 것이며, 효량(孝良)은 곤장 1백 대, 권격(權格)은 곤장 90대, 유감동(兪甘同)이 중기(仲基)와 같이 살 때에 김여달(金如達)과 간통했는데, 후에 가장[家翁]과 함께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하여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개가(改嫁)한 자이니 교형(絞刑)에 처할 것이며, 김여달은 1등(等)을 감형(減刑)하여 곤장 1백 대를 치고 3천 리(里) 밖으로 귀양 보낼 것이며, 유감동(兪甘同)이 정탁(鄭擢)의 첩이 되었을 때에 동성(同姓) 조카인 정효문(鄭孝文)은 백숙(伯叔)의 아내를 간통한 자이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첩은 1등을 감형(減刑)할 것이며, 간통한 중기(仲基)의 매부(妹夫) 이효량(李孝良)은 곤장 1백 대를 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사죄(赦罪) 전에 범한 것이므로 이승의 첩을 간통한 변상동은 곤장 90대를 칠 것이며, 병오년에 다시 간통한 여달(如達)과 몇 사람들은 곤장 80대, 다시 간통한 효량과 권격의 죄는 곤장 1백 대, 종일(從一)은 곤장 1백 대를 치되 옷을 벗고 형벌을 받게 할 것이며, 치신(致身)·안로(安老)·이승(李升)·수생(穗生)은 곤장 80대, 안로와 수생은 자자(刺字)할 것이며, 유성(由性)·진자(嗔紫)·유진(由畛)·수동(秀東)·복리(復利)·안위(安位)·효례(孝禮)·자성(子成) 등은 각기 곤장 60대, 권격(權格)과 상동(尙同)은 곤장 90대, 이돈(李敦)과 여달(如達)은 곤장 80대, 효량(孝良)은 곤장 1백대, 귀수(龜壽)는 태형(笞刑) 40대, 복해(福海)는 태형(笞刑) 50대를 칠 것입니다."

하니, 계한대로 하도록 명하되,

“귀수는 다른 것은 없애고 자원하여 부처(付處)하도록 하고, 치신(致身)은 다만 그 관직만 파면하도록 하고, 안로(安老)는 자자(刺字)를 면제하고 곤장 80대만 치기로 하고, 이돈·효량·상동·수생은 공신(功臣)의 후손이므로 다른 일은 없애고 외방(外方)에 부처하도록 하고, 진자(嗔紫)는 공신의 아들이므로 다만 관직만 파면하도록 하고, 권격(權格)은 1등을 감형(減刑)하도록 하고, 이자성(李子成)은 논죄(論罪)하지 말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정효문은 모두 사죄(赦罪) 전에 범죄한 것이라 하여 논죄(論罪)하지 않았고, 이효랑은 부처(付處)되는 것으로 면죄부를 얻었다.

정효문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429년, 본처를 소박하고 평양 기생 하봉래(下蓬萊)를 첩으로 삼은 것과 관련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해 망언을 했고, 그 죄로 청주(淸州)에 부처(付處)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석방된데 이어 1433년에는 다시 관직을 받고 1436년에는 종2품의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오르기까지 했다.

부처되었던 이효량도 몇 달 만에 다시 상호군(上護軍)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에는 삼군도총제부 첨총제(僉摠制)에 임명되었다.

 

유감동은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에 따라 ‘곤장을 친 후에 변군(邊郡)의 노비(奴婢)로 삼아 종신(終身)하도록 하여, 비록 사면(赦免)을 당하더라도 방면(放免)되지 못하도록’ 하는 벌을 받았으나, 세종은 다음 해에 유감동(兪甘同)의 천역을 면제하여 주고 대신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도록 명하였다.

 

 

 

참조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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