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어을우동(於乙宇同)

從心所欲 2021. 8. 30. 10:11

1985년 이장호가 감독하고 이보희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이래 전모(氈帽) 쓴 기생 차림의 여인에다 어우동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허다한데, 어우동은 기생이 아니었다. 버젓한 양반 가문 출신에다 왕실 가문인 종친(宗親)의 부인이었다.

어우동의 아버지 박윤창(朴允昌)은 승문원 지사(承文院知事)라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승문원(承文院)은 조선시대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로, 지사(知事)는 정3품 관직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권응인{權應仁)이 지은 시화 및 일화집인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조차 어우동에 대하여 “호서(湖西)의 창(娼)으로 농부의 딸이었으나 단정하지 않아, 그 시가 뛰어나나 싣지 않는다.”고 했다. 권응인이 명종 때의 인물인데, 이때부터도 어우동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퍼지기 시작했으니 그 후로 얼마나 많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이 덧붙여졌을지는 쉽게 상상이 가는 일이다.

 

소소하고 구체적인 사정까지는 몰라도 그나마 어우동에 대하여 가장 사실에 근접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시기적으로도 사건이 있었던 때와 가장 가깝고 또 국가의 공식 기록인 까닭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우동보다는 어을우동(於乙宇同)이라는 이름이 주로 사용되었다. 어우동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어우동 자신이 아니라 그의 남편 때문이었다.

 

[《성종실록》 성종 7년(1476년) 9월 5일]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이 여기(女妓) 연경비(燕輕飛)를 매우 사랑하여 그 아내 박씨(朴氏)를 버렸습니다. 대저 종친으로서 첩(妾)을 사랑하다가,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려서 이별하는데, 한편 그 단서가 열리면 폐단의 근원을 막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박씨와 다시 결합하게 하고, 동(仝)의 죄는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동의 고신(告身)을 거두게 하였다.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은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이지만 서자이다. 수(守)라는 직위는 종친부(宗親府)에서 왕자군(王子君)의 중증손(衆曾孫)에게 처음 제수되는 정4품 관직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동이 기생 때문에 버렸다는 아내 박씨(朴氏)가 바로 어우동이다. 어우동은 외명부 종친처(宗親妻) 품계에 따라 정4품 혜인(惠人)의 신분이었다.

 

종실의 잘못을 조사 규탄하는 임무를 맡아보던 관청인 종부시(宗簿寺)에서 이동과 어우동을 다시 결합하게 할 것을 건의하고 성종이 이를 받아들였지만 실제 결합이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어우동은 이동(李仝)에게 쫓겨난 뒤 그 어머니 집에 머물렀던 것으로 나타난다. 부모의 집인 ‘친정’ 대신 ‘어머니의 집’이라 한 것은 어우동의 어머니 또한 불미스러운 일로 남편과 헤어져 친정에 가있던 상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종실록》의 다른 기사에는 “어을우동의 어미도 추행(醜行)이 있어서 그 아비 박윤창(朴允昌)이 어을우동에게 ‘내 딸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니, 그 음행(淫行)은 어미로부터 그러한 것입니다."라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릴리언 메이 밀러(Lilian May Miller, 1895 ~ 1943)의 <위대한 한강>, 1920년, 목판화, 23.7 × 16.7cm]

 

이로부터 4년이 지난 1480년, 성종은 의금부(義禁府)에 어우동을 국문하라는 명을 내린다.

 

[성종 11년 6월 13일]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방산수(方山守) 난(瀾)이 태강수(泰江守) 동(仝)의 버린 아내 박씨(朴氏)를 간통하였으니, 국문하여 아뢰라."
하였다.

 

성종이 어디선가 어우동이 간통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그런데 그 상대가 방산수(方山守)라고 하였으니 그 역시 종친이다.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은 세종의 둘째 서자인 계양군(桂陽君)의 서자였다. 그러니까 세종의 서손자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성종은 종실 간의 간통 소식에 더 분노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이틀 뒤다.

 

[《성종실록》 성종 11년 6월 15일]

좌승지(左承旨) 김계창(金季昌)이 들어와 일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태강수(泰江守)의 버린 아내 박씨(朴氏)가 죄가 중한 것을 스스로 알고 도망하였다 하니, 끝까지 추포(追捕)하라." 하였다.

김계창이 말하기를,
"박씨가 처음에 은장이[銀匠]와 간통하여 남편의 버림을 받았고, 또 방산수(方山守)와 간통하여 추한 소문이 일국에 들리었으며, 또 그 어미는 노복과 간통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었습니다. 한 집안의 음풍(淫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끝까지 추포(追捕)하여 법에 처치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결국 어우동은 잡혀와 7월부터 국문을 받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 때마다 어우동이 관계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했다. 어우동과 간부(奸夫)들에 대한 국문은 8월까지 이어지고 9월에 들어서면서는 죄인들을 치죄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10월 18일에는 어우동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사실과 함께 어우동이 그간 저지른 간통 행각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다룬 기사가 게재되었다.

 

[성종 11년 10월 18일]

어을우동(於乙宇同)을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어을우동은 바로 승문원 지사(承文院知事) 박윤창(朴允昌)의 딸인데, 처음에 태강수(泰江守) 동(仝)에게 시집가서 행실(行實)을 자못 삼가지 못하였다. 태강수 동이 일찍이 은장이[銀匠]을 집에다 맞이하여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女僕]처럼 하고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속으로 가까이 하려고 하였다. 태강수 동이 그것을 알고 곧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서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였는데, 한 계집종[女奴]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傷心)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년(吳從年)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司憲府)의 도리(都吏)가 되었고, 용모(容貌)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오며, 족계(族系)도 천(賤)하지 않으니, 배필(配匹)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主人)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마땅히 주인을 위해서 불러 오겠습니다."
하니, 어을우동이 머리를 끄덕이었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맞이하여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다. 또 일찍이 미복(微服)을 하고 방산수(方山守) 난(瀾)의 집 앞을 지나다가, 난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는데, 정호(情好)가 매우 두터워서 난이 자기의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이름을 새기었다.

또 단옷날[端牛日]에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都城) 서쪽에서 그네 뛰는 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守山守) 기(驥)가 보고 좋아하여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뉘 집의 여자냐?"
하였더니, 계집종이 대답하기를,
"내금위(內禁衛)의 첩(妾)입니다."
하여, 마침내 남양(南陽)경저(京邸)로 맞아들여 정(情)을 통했다.

 

미복(微服)은 변장을 뜻하고, 도리(都吏)는 관아에 딸린 아전 중의 우두머리로 중인계층이다. 방산수(方山守)와 수산수(守山守)는 수(守)가 붙었으니 모두 종친이다. 남양(南陽)경저(京邸)는 지금 식으로 설명하자면 경기도 화성군에 속해 있던 남양면(南陽面)의 서울사무소이다.

 

《성종실록》에는 어우동과 은장(銀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별한 내용이 없으나, 성종 때의 문신이었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좀 더 기술이 자세하다. 『용재총화(慵齋叢話)』는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의 성종때까지의 여러 인물에 대한 일화(逸話)와 해담(諧談)을 많이 채록한 책으로, 내용 중에는 당시 사회에서 무시 받던 과부(寡婦)ㆍ승방(僧房)ㆍ복서(卜筮)ㆍ기녀(妓女)와 탕녀(蕩女)들에 얽힌 연화(戀話)도 다수 들어있다. 그 중 어우동에 대한 글의 일부분이다.

 

어우동(於于同)은 지승문(知承文) 박 선생의 딸이다. 그녀는 집에 돈이 많고 자색이 있었으나, 성품이 방탕하고 바르지 못하여 종실인 태강수(泰江守)의 아내가 된 뒤에도 군수가 막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나이 젊고 훤칠한 장인을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를 기뻐하여 매양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의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교한 솜씨를 칭찬하더니, 드디어 내실로 이끌어 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 그의 남편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마침내 어우동을 내쫓아 버렸다.

그 여자는 이로부터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였다. 그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예쁜 소년을 이끌어 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이 피고 달이 밝은 저녁엔 정욕(情慾)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여기서 소년(少年)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 사내아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젊은 남자를 뜻한다. 어우동과 그 여종이 함께 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다시 이어지는 《성종실록》 성종 11년 10월 18일 기사다.

 

전의감(典醫監)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이 종[奴]을 파는 일로 인해 어을우동의 집에 이르러서 값을 직접 의논하기를 청하니, 어을우동이 박강창을 나와서 보고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기었다. 또 이근지(李謹之)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淫行)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하려고 하여 직접 그의 문(門)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方山守)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나와서 이근지를 보고 문득 붙잡고서 간통을 하였다.

내금위(內禁衛) 구전(具詮)이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그의 집 정원(庭園)에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담을 뛰어넘어 서로 붙들고 익실(翼室)로 들어가서 간통을 하였다.
▶익실(翼室) : 좌우(左右) 쪽에 있는 방.

생원(生員) 이승언(李承彦)이 일찍이 집 앞에 서 있다가 어을우동이 걸어서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妓生)이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서, 침방(寢房)에 들어가 비파(琵琶)를 보고 가져다가 탔다. 어을우동이 성명(姓名)을 묻자, 대답하기를,
"이 생원(李生員)이라."
하니, 〈어을우동이〉 말하기를,
"장안(長安)의 이생원(李生員)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하므로, 〈이승언이〉 대답하기를,
"춘양군(春陽君)의 사위[女壻] 이생원(李生員)을 누가 모르는가?"
하였는데, 마침내 함께 동숙(同宿)하였다.
▶춘양군(春陽君) :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 이래(李徠)

학록(學錄) 홍찬(洪璨)이 처음 과거(科擧)에 올라 유가(遊街)하다가 방산수(方山守)의 집을 지날 적에 어을우동이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뒤에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리어, 홍찬이 마침내 그의 집에 이르러서 간통하였다. 서리(署吏) 감의향(甘義享)이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자, 희롱하며 따라가서 그의 집에 이르러 간통하였는데, 어을우동이 사랑하여 또 등[背]에다 이름을 새기었다.
▶유가(遊街) : 과거(科擧)의 급제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잡히면서 거리를 돌며, 좌주(座主), 선진자(先進者), 친척들을 찾아보는 일.

밀성군(密城君)의 종[奴] 지거비(知巨非)가 이웃에서 살았는데, 틈을 타서 간통(奸通)하려고 하여, 어느 날 새벽에 어을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부인(婦人)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장차 크게 떠들어서 이웃 마을에 모두 알게 하면, 큰 옥사(獄事)가 장차 일어날 것이오."
하니, 어을우동이 두려워서 마침내 안으로 불러 들여 간통을 하였다.

이때 방산수(方山守) 난(瀾)이 옥중(獄中)에 있었는데,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감동(甘同)이 많은 간부(奸夫)로 인하여 중죄(重罪)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사통(私通)한 바를 숨김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간부(奸夫)를 많이 열거(列擧)하고, 방산수 난(瀾)도 어유소(魚有沼)·노공필(盧公弼)·김세적(金世勣)·김칭(金偁)·김휘(金暉)·정숙지(鄭叔墀) 등을 끌어대었으나, 모두 증거[左驗]가 없어 면(免)하게 되었다.

방산수 난이 공술(供述)하여 말하기를,
"어유소는 일찍이 어울우동의 이웃집에 피접(避接)하여 살았는데,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그 집에 맞아들여 사당(祠堂)에서 간통하고, 뒤에 만날 것을 기약(期約)하여 옥가락지[玉環]를 주어 신표(信標)로 삼았습니다. 김휘는 어을우동을 사직동(社稷洞)에서 만나 길가의 인가(人家)를 빌려서 정(情)을 통하였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이 자못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鄭氏)도 음행(淫行)이 있을 것을 의심하였는데, (그 어미가)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惑)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하였다.

 

어우동이 교수형을 당하던 날, 조정에서는 어우동의 처벌 수위를 두고 논의가 있었다.

[성종 11년 10월 18일]

동부승지(同副承旨) 이공(李拱)이 의금부(義禁府)에서 삼복(三覆)한 어을우동(於乙宇同)의 죄안(罪案)을 가지고 아뢰기를,
"어을우동이 전에 태강수(泰江守) 동(仝)의 처(妻)가 되었을 때 수산수(守山守) 기(驥) 등과 간통한 죄는, 《대명률(大明律)》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에 비의(比擬)하여, 교부대시(絞不待時)에 해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비의(比擬) : 죄를 벌함에 있어 정확한 해당 조문이 없으면 다른 법을 유추해서 적용하는 것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이 대답하기를,
"태형(笞刑)이나 장형(杖刑)의 죄는 혹 비율(比律)하여 논단(論斷)할 수 있지만, 사형(死刑)에 이르러서 어찌 비율할 수 있겠습니까? 태종조(太宗朝)에 이와 같이 음탕한 자가 있어서 간혹 극형에 처하였으나, 이것은 특별히 율(律) 밖의 형벌이었는데, 어찌 후세(後世)에서 법(法)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어을우동의 죄는 비록 주살(誅殺)을 용서할 수 없지만, 인주(人主)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好生]으로써 덕(德)을 삼아 율 밖의 형벌을 써서는 안됩니다." 하고,
▶비율(比律) : 죄에 맞는 정조(正條)가 없을 때 비슷한 조문(條文)을 비의(比擬)함.
▶주살(誅殺) : 죄에 해당(該當)시키어 죽임

도승지 김계창(金季昌)은 아뢰기를,
"어을우동은 다른 음탕한 자와 비할 수 없습니다. 종실(宗室)의 처(妻)로서 종실의 근친(近親)과 간통을 하고, 또 지거비(知巨非)는 일찍이 종의 남편이었는데도 그와 간통을 하였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순명(金順命)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이극기(李克基)는 아뢰기를,
"인주(人主)가 형벌을 쓰는 것은 마땅히 정률(正律)을 써야 하고, 비율(比律)하여 죽여서는 안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풍속(風俗)이 아름답지 못하여, 여자(女子)들이 음행(淫行)을 많이 자행한다. 만약에 법으로써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징계(懲戒)되는 바가 없을 텐데, 풍속이 어떻게 바루어지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끝내 나쁜 짓을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어을우동이 음행을 자행한 것이 이와 같은데, 중전(重典)에 처하지 않고서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중전(重典) : 엄하고 무거운 법률

정창손이 아뢰기를,
"(사형수에 대하여) 복심(覆審)하여 아뢰는 까닭은 죄수를 위하여 살릴 길을 구하는 것이니, 한때의 노여움으로 인하여 경솔히 율(律) 밖의 중전(重典)을 써서는 옳지 못합니다. 또 풍속이 어찌 형벌로써 갑자기 변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형벌하는 까닭은 교화(敎化)를 돕고자 함인데, 만약에 풍속을 고칠 수 없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어찌 반드시 형벌을 쓰겠는가? 어을우동의 음행이 이와 같은데, 지금 엄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고려[前朝] 말세(末世)의 음란(淫亂)한 풍속이 이로부터 일어날까 두렵다." 하였다.

김계창이 곧 아뢰기를,
"형벌이란 시대에 따라서 가볍게도 하고 무겁게도 하는 것입니다. 어을우동은 음란하기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중전(重典)에 처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조정의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사관은 기사 끝에 이런 의견을 달았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계창은 임금의 뜻을 헤아려 깨닫고 힘써 영합(迎合)하기만 하였다. 소위(所謂) ‘시대에 따라서 가볍게도 하고 무겁게도 한다.’는 것이 율(律) 밖의 형벌을 말함이겠는가? 감히 이 말을 속여서 인용하여 중전(重典)을 쓰도록 권(勸)하였으니, 이때의 의논이 그르게 여기었다." 하였다.

 

성종이 법에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면서까지 어우동을 교수형에 처한 이유는 어우동을 살려두면 혹시라도 이것이 빌미가 되어 두고두고 종친들에게 뒤탈이 될까봐 염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성종은 풍속(風俗)을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기어코 어우동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년) 8월 8일]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이의형(李義亨)·헌납(獻納) 이종윤(李從允)이 아뢰기를,
"이기(李驥)와 이난(李瀾)을 석방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죄를 받은 지 이미 3년이 되었고, 이제 또 은혜를 베풀기 때문에 석방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기(李驥)와 이난(李瀾)은 종친인 수산수(守山守)와 방산수(方山守)이다.

성종이 이들을 사면하려 하자 어우동에게 율외(律外)의 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며 교수형을 반대했던 정창손(鄭昌孫)은 "종친들은 법을 범하기가 쉽습니다. 이제 석방을 너무 빨리 하면 징계(懲戒)하는 뜻이 없어지니, 아직은 석방해 주지 말고 징계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반대했지만 성종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죄를 받은 지 이미 3년이 되었고, 이제 또 은혜를 베풀기 때문에 석방하는 것이다." 라면서

“어을우동(於乙宇同)과 간통한 자들을 모두 석방하였으니, 수산수도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

 

조선의 풍속을 바로 세우는 일은 오로지 여인들의 책임이었던 모양이다.

 

[릴리언 메이 밀러(Lilian May Miller, 1895 ~ 1943)의 <위대한 한강>, 1920년, 목판화, 23.7 × 16.7cm]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인물한국사(신병주, 장선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