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23 - 청루(靑樓) 홍루(紅樓)

從心所欲 2021. 9. 3. 08:26

기방의 고객을 오입쟁이라 하는데, 강명관의 「조선풍속사」에는 이 오입쟁이들이 기방에 처음 나온 기생을 길들이는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한 사람이 좌중에 통할 말 있소.”
“네, 무슨 말이요.”
“처음 보는 계집 말 묻겠소.”

이렇게 운을 떼면 “같이 물읍시다.” 또는 잘 물으시오.“라고 한다. 이 말이 떨어지면 “이년아, 네가 명색이 무엇이냐?”라고 묻고, “기생이올시다.”라고 하면, “너 같은 기생은 처음 보았다. 이년아, 내려가 물이나 떠오너라.”하고 뺨을 약간 때린다. 이건 기생이 아니라 하인이 아니냐는 수작이다. 기생이 여전히 “기생이올시다.”라고 하면 “이년아, 죽어도 기생이야”라고 하고, 여기에 또 “기생이올시다.”라고 답하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네가 하- 기생이라 하니, 이름이 무엇이냐?”
“무엇이올시다.”
“나이가 몇 살이냐?”
“몇 살이올시다.”
“그 나이를 한꺼번에 먹었단 말이냐?”
“한 해에 한 살씩 먹었습니다.”
“그러면 꼽아라.”
기생은 손가락으로 “한 해에 한 살 먹었고, 두 해에 두 살 먹었고, 세 해에 세 살 먹었고...”

이런 식으로 나이를 꼽는다. 그러면 원래 물었던 오입쟁이가 “이년아, 듣기 싫다.” 하고 “시골이 어디냐?”고 출신지를 묻는다. 대개 기생은 지방에서 올라왔기 때문이다.
기생이 아무 곳이라고 답을 하면, 올라오면서 거친 곳을 꼽으라는 뜻으로 “노정기를 외라”고 한다. 기생이 노정기(路程記)를 외고 나면, 본격적으로 기생을 단련시키기 시작한다.

“서방이 누구냐?”
“아무(성만 말한다) 서방님이세요.”
“그 서방 이름은 무엇이냐?”
“아무세요.”
“그러면 그 서방님은 오입에 연조가 높으시거니와 너는 그 서방님과 사는 것이 당치않으니 버려라.”
“못 버리겠세요.”
“왜 못 버리겠니. 버려라.”
“못 버리겠세요.”
“왜 못 버리겠니?”
“정이 들어서 못 버리겠세요.”
“어따 이년아, 그동안 정이 들었어. 네가 정이 하 들었다니 어디 정이 있단 말이냐?”
“뱃속에 들었세요.”
“어디 보자.”

이제부터 ‘정’이란 말을 꼬투리 삼아 성적 희학(戱謔)이 벌어진다.
먼저 기생의 겉치마를 벗긴다. 그러고는 “이것이 정이냐? 정이 없나 보구나.” 하고, 다시 단속곳을 끄르고 속속곳만 입고 앉아 있으면, “이년아 이것이 정이냐?”라고 묻는다.

그러면 기생이 그제야 일어선다. 그러면 다시 정을 보자고 요구한다. 기생이 속곳끈을 풀면, “이년아 두 손 떼어라.”하고 소리를 친다. 기생이 속곳 허리를 입에 물고 두 손을 떼고 서면, 속곳 문을 것을 손으로 팩 젖힌다. 이때 기생의 ‘하문(下門)’이 순식간에 보이고 기생은 주저앉는다. 그러면 “정이 참 뱃속 하나 가득 들었나 보다. 그 서방님 모시고 오래 살아.”하고, 담배를 한 대 붙여준다.

이것이 기생에 처음 나온 기생을 다루는 방식이다. 기생이 기방에 나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정 보기’가 계속 되는데 별 문제없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수치심에 우는 기생도 있다. 그러면 뺨을 때리기도 한다. 기생을 지배하고 있는 기부(妓夫)는 이렇게 기생이 시달리는 것을 ‘빨이’라고 하며 좋아하기도 하여, 고의적으로 그렇게 해달라고 오입쟁이들에게 청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생의 하문을 보는 가혹한 통과의례를 치르는 것은, 기생으로 하여금 빨리 수치심을 잊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글 내용을 읽다보면 근래의 어느 싸구려 색주가 분위기다. 객과 기생이 시를 나누는 고상한 아취 같은 것은 기대난망이다. 청아한 가야금 소리 대신 상을 두드리는 젓가락 장단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오입쟁이라는 자들은 풍류의 소양도 갖추지 못한 삼류 양아치 무리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이들 오입쟁이로 불리는 자들은 주로 경아전 서리, 군교, 별감 등으로 한 기방의 기부이자 또한 다른 기방의 손님이기도 했다. 직책을 이용한 다양한 비리로 부를 모았던 이들 중인계층 졸부들은 유흥과 사치에 돈을 쓰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일이 없는 부류들이었다. 각종 폭력과 난동으로 조선후기 시정(市井)을 소란스럽게 만들던 이들이 기방을 장악함으로써 기방 분위기가 이렇게 난잡해졌고, 그래서 점잖은 양반들은 기방에 드나들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기생들이 오입쟁이들의 이런 모욕적인 말과 대우에도 불구하고 고분고분한 이유가 있다.

「조선풍속사」에서는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를 인용하여 오입쟁이들이 기방을 지배하는 방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오입에 잘못한 일이 일어나거나 오입 처소끼리 싸움이 나면 이렇게 하는 법인데, 기생은 잡아서 홋속것만 입히고 발 벗기고 머리 풀리며, 기생서방은 겉옷 입은 채로 뒤로 결박 짓고 상투 풀고 발 벗고, 두 연놈을 앞에 세우고 여러 오입장이가 따라서 대로상으로 나가면, 타처 오입장이가 떡 가로 서서
“웬 등사요?” 하기도 하고
“보완즉 오입등산가 보오.” 하기도 하나니.
“네 오입등사요, 청 좀 합시다.”
“청 듣다 뿐이요.”
“너희 연놈들을 영 파의를 시키고 아주 찢어 발기쟀더니 친구가 청을 하시니, 들어가거라.”
마침 보교가 따라오다가 태워가지고 들어가나니라.

 

대화에 등장하는 ‘등사’라는 말은 조선시대 죄인에게 형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의 수위와 방법에 차등이 있어 ‘등사(等事)’라고 했다. 단순히 이처럼 공개적 모욕을 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기생집의 세간을 모두 때려 부수고 기생이 사과하기를 기다려 새집을 사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입쟁이들은 기생과 기부가 잘못을 하면 그들을 폭력적 처벌 방법으로 기방을 지배했던 것이다.

 

과거 지체 높은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기생을 부르던 시절에는 기생들이 사적 연회에 참석하는 일은 관기(官妓)로서 관역(官役)의 연장선상으로 이해되었기에 보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고비를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으며 금액이 얼마가 되던 그것은 주는 사람의 재량이었다. 불려 다니는 기생들도 이를 문제 삼을 처지가 아니었고 당연한 일로 받아 들였다. 그런데 기부들이 기방을 운영하면서는 달라졌다. 기방은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유흥업소이기 때문이다. 대가(代價)없이는 기생을 움직일 수 없는 환경이 된 것이다.

 

과거 기생들의 성관계는 관역의 부수적 임무이거나 개인적 선택이었다. 기예를 팔지언정 몸은 팔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금전을 조건으로 성관계를 갖지는 않았다. 「부북일기」에서 보듯 박취문 부자가 수많은 기생들과 관계를 가지면서도 금품을 주고받는 일은 없었다.

 

물론 성관계를 가진 후에 남자가 금품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廣文者傳)> 에 달린 ‘광문전 뒤에 쓰다[書廣文傳後]’는 글에는 광문이 표철주(表鐵柱)라는 인물과 만나 나누는 대화 속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옛날에 풍원군이 함께 기린각(麒麟閣)에서 잔치를 벌인 후 유독 분단이만 잡아 두고서 함께 잔 적이 있었지. 새벽에 일어나 대궐에 들어갈 차비를 하는데, 분단이가 불이 켜진 초를 잡다가 그만 잘못하여 초모(貂帽)를 태워버리는 바람에 어쩔 줄을 몰라 하였네. 풍원군이 웃으면서 ‘네가 부끄러운 모양이구나!’ 하고는 곧바로 압수전(壓羞錢) 5천문을 주었지.”

 

글 속의 풍원군(豊原君)은 영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조현명(趙顯命)이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공신에 녹훈되며 받은 공신호(功臣號)이다. 그가 기생 분단과 잔 뒤 분단이 실수로 담비 털로 만든 모자를 태우고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압수전(壓羞錢) 5천문(文)’을 주었다고 했다. ‘압수(壓羞)’는 ‘부끄러움을 평정한다’는 의미이고 ‘5천문’은 50냥이다. 조현명이 하룻밤을 지낸데 대한 사례를 그런 방식으로 지불한 것이다. 여기에는 사전에 금품을 약속한 정황은 없다.

그렇지만 기방에서는 달랐다. 기방이 생기고부터는 기부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성매매가 이루어졌다. 기방에 나오는 기생은 돈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청루소일(靑樓消日)>,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신윤복「혜원전신첩」中 <홍루대주(紅樓待酒)>,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각기 ‘청루에서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다’와 ‘홍루에서 술을 기다리다’의 뜻이다. 그림 제목에 따르자면 청루(靑樓)는 기생이 몸을 파는 곳이고 홍루(紅樓)는 술을 마시는 곳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조선의 기방에 청루(靑樓)와 홍루(紅樓)의 구별이 따로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기방을 ‘청루(靑樓)’로 칭한 17세기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 외에도 협사(狹斜) 또는 창루(娼樓)라는 호칭도 사용되었다.

청루(靑樓)와 홍루(紅樓)는 중국에서 기루(妓樓)를 구분하던 방식이다. 그런 구분에 따르면 오히려 홍루가 몸 파는 곳이고, 청루는 격조 있는 풍류장소이다. 그래서 신윤복이 아닌 누군가가 나중에 붙인 그림 제목들은 오히려 혼란만 부추긴다. 홍루이든 청루이든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방에서 기생이 몸을 파는 것은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닌 세상이 된 것이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기방무사(妓房無事)>, 지본채색, 28.2 x 35.2cm, 간송미술관]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야금모행(夜禁冒行)>,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기방에서 성매매가 빈번하게 이루어진 정황은 조선후기의 한문 소화집(笑話集)인 「어수신화(禦睡新話)」에 실린 <기가포폄(妓家褒貶)>이라는 글을 통해서도 유추가 된다.

 

어느 한 고을의 기생은 집에서 손님을 맞곤 했는데, 오는 손님들은 모두 한 두 번씩 관계를 가진 사이였다.
한 손님이 먼저 와서 기생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을 때였다. 잇따라 기생집으로 사람이 오는데, 마침 두 사람이 짝을 지어 들어왔다. 기생이 손님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마부장(馬部將)과 우별감(牛別監)이 오셨습니다.“
또 두 사람이 연속해서 들어왔다. 그러자 기생은 다시 은밀하게 말했다.
“여초관(驢哨官)과 최서방(崔書房)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먼저 온 손님이 네 사람을 보니, 어떤 사람의 성은 김씨고 어떤 사람의 성은 이씨였다. 네 사람 중에 마씨, 우씨, 여씨, 최씨는 한 사람도 없었다.

네 사람이 모두 돌아간 후, 손님이 기생에게 물었다.
“너는 아까 왔던 손님들의 성씨를 과연 모르느냐?”
“모두 저와 친하게 지낸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성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마씨니 여씨니 하는 말은 그저 밤일을 평가하여 붙인 것이지요.”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아무개는 몸과 양물이 모두 장대하니 성이 말 마(馬)가 된 것이고, 아무개는 몸은 작으나 양물이 크니 성이 당나귀 여(驢)가 된 것이고, 아무개는 한번 삽입하면 곧바로 끝내버리니 성이 소 우(牛)가 된 것이고, 아무개는 잠깐 동안에 오르락내리락하니 성이 참새 최(崔)가 된 것이죠.”

다 듣고 나서 손님이 물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떤 별명을 붙이려느냐?”
“실속도 없이 날마다 헛되이 왔다가 헛되이 돌아가 허송세월만 하니 마땅히 허(許)생원으로 붙이는 것이 좋겠네요.”

 

 

 

참고 및 인용 : 조선풍속사(강명관, 2010, 푸른역사), 조선후기 성소화선집(김준형 옮김, 2010,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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