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24 - 기생조합

從心所欲 2021. 9. 17. 07:25

[일제강점기 엽서 : 정재무 복장의 관기, 국립민속박물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공사노비법(公私奴婢法)이 혁파된 뒤에도 관기(官妓)는 한동안 존속하였다. 그러다 1897년부터 지방의 관기가 해체되기 시작하였고 1908년에 궁중 관기까지 해산되면서 조선의 관기제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어 1908년 9월에는 '기생 및 창기 단속 시행령'이 제정되면서 기생들은 예전의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을 통합한 기구인 경무청(警務廳)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즉 모든 기생들은 기생조합소(妓生組合所)에 소속되어 가무영업의 허가를 받아야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1909년에 최초의 기생조합인 한성(漢城)기생조합소가 설립되었다.

 

한성기생조합소는 내의원(內醫院) 의녀(醫女)와 상의사(尙衣司)의 침선비(針線婢) 등 서울의 경기(京妓)들과 진연(進宴) 때에 지방에서 선상(選上)된 향기(鄕妓)들 가운데 귀향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기방을 차려 운영하던 기생들을 모아 만든 조합이었다. 그러나 이 한성기생조합소는 1912년 이후 기록에서 사라지고 1913년에는 다동조합(茶洞組合)과 광교조합(廣橋組合)이 새롭게 등장한다. 최초의 한성기생조합소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별로 없지만 다동조합(茶洞組合)이 출범하는 과정을 보면 서울의 경기(京妓)와 지방에서 올라온 향기(鄕妓) 사이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엽서 : 궁중 여악과 악사들.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의 기념촬영. 국립민속박물관]

 

1880년대부터 한성에는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지금의 충무로 일대인 진고개에는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가 생겨났다. 일본인의 숫자가 3천 명이나 되면서 1887년에 '정문루(井門樓)'를 필두로 일본식 요정들이 들어섰다. 이 일본식 요정에서는 단순히 요리만 파는 것이 아니라 일본 기생인 게이샤가 동원되고 성매매까지 이루어졌다.

이런 일본식 요정을 뒤따라 대한제국 말 궁내부(宮內府)에서 궁중요리를 하던 안순환이라는 인물이 1909년 세종로에 조선식 요릿집을 차렸는데 그것이 바로 명월관(明月館)이다. 명월관에서는 손님들의 요청에 따라 조합의 기생들을 불렀는데 그것이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일시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기생들에게는 좋은 돈벌이가 될 수 있는 출구였다. 이에 지방의 기생들도 서울로 올라오는 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나 텃세가 있기 마련이어서 지방 기생들의 한양 정착은 쉽지 않았다. 우선 경기(京妓)들은 한성이 익숙한 지역인데다 궁중에서 궁중 정재를 하던 신분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궁중 정재를 배우지 못한 지방 기생들의 민간 가무는 이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경기(京妓)들은 기부(妓夫)가 있는 유부기(有夫妓)였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향기는 기둥서방이 없는 무부기(無夫妓)였다. 당연히 생활과 행동 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런 차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부 갈등으로 표출됐는지는 불확실하지만, 1913년 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이 출범하면서 ‘무부기조합’임을 앞에 내세운 것을 보면 ‘유부기(有夫妓)’ 때문에 손님의 불만과 무부기 기생들의 활동에 제약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일제강점기 엽서 : 거문고, 가야금, 양금과 함께 한 경성(京城) 기생. 국립민속박물관]

 

다동조합의 출범을 주도한 평양 출신의 기생 주산월(朱山月)은 새로운 기생조합을 만든 이유에 대하여, ‘자신은 어릴 때 평양에서 기생이 되었는데 서울로 올라와보니 기생들이 기둥서방한테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풍조에다 기둥서방이 없는 기생들을 얕잡아보기만 하니, 기왕 기생 노릇을 할 바에는 한 번 개량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조합을 창설하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

 

다동조합 설립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서도(西道) 출신 기생들이 중심에 있었지만 실력 있는 남도(南道) 출신 기생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다동조합이 설립되자 곧이어 서울 출신의 경기(京妓)들이 모여 광교기생조합(廣橋妓生組合)을 설립하였다. 광교기생들은 기둥서방이 있는 유부기들이었으므로, 광교기생조합을 유부기조합이라고 불렀고, 줄여서 광교조합이라고 하였다.

광교조합 경기(京妓)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궁중 정재였던 반면 다동조합의 기생들은 자신들의 지역적 특성을 살리는데 주력하였다. 서도기생들은 수심가, 노량 사거리, 난봉가 등 시조와 가사에 능했고 남도기생들은 춘향가, 육자배기, 흥타령 등 창(唱)을 잘 불렀다. 서도기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기생서재(書齋)에서 노래 공부를 익혔기 때문에 명창도 많았다. 또한 관례적으로 금녀의 영역이었던 연희 종목을 수용했고, 당시 새로운 공연물이었던 여성 창극에도 도전했으며 창작 궁중무용도 펼쳤다.

 

[일제강점기 엽서 : 명월관 특1호무대에서 공연 중인 기생들, 손동작으로 보아 일본 춤을 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가 지속되면서 후에는 기생들이 왜놈 춤도 공연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

 

요릿집에서 기생을 부르는 것은 요즈음의 술집에서 파트너를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 기생을 부르는 주된 목적은 그들의 공연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남녀 간의 정사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예전에는 궁중에서와 소수 양반층만 볼 수 있었던 기생의 기예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으로 바뀐 것이다. 당연히 세간에서는 기생들의 이런 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신문에서도 이런 내용을 가십(gossip) 기사로 다루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한국어 일간신문인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실렸던 기사들이다.

 

[매일신보 1913.05.16]
진주기생조합설립. 경남 진주는 본래부터 기생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저의 집에 계집아이의 머리를 쪽을 져서 내세우고 기생이라 하면서 매음을 하는 풍속이 근래에 매우 심하여 사회발전에 큰 유독들이 되더니 당 지원 기생 중 이난주, 명매, 향강, 벽도, 박중○, 천춘운 등이 조합을 모아 매창 매음을 구별하여 일정한 규모를 정하라고 취지를 발표하고 기부를 칭하여 자본을 삼으려 하는데, 당지 경찰서에서도 극히 찬성할 뿐 아니라 신사들도 기부를 다수히 한다더라. (경남지국)

[매일신보 1913.05.18]
엊그제 기생좌 기생연주회 구경을 좀 갔더니 참 기생의 재주들이야말로 정말 놀랍던 걸. 들으니까 매일 낮이면 온종일 연습을 한대요. 시골기생이라고 업신여겼다가는 망신하겠습니다. (개성서부생)

[매일신보 1913.06.24]
기생의 음흉한 행위. 진주군 중안삼동 사는 기생 황금주는 제대로 기생영업이나 하여 먹고 살 것이지. 그 중에 노름으로 사나이 돈을 빼앗고, 심지어 일전에 단성군 사는 권모와 단둘이 투전을 하여 금화 백환을 잃고, 무슨 면목으로 행순순사에게 고발하였던지, 당지 경찰서에서 금주와 권가를 각각 벌금 삼십오환에 처하고, 금주의 견실한 돈 백환은 사기도박으로 인정하고 권가에게 도로 찾아서 금주에게 출금하였는데, 필경 계집된 까닭으로 그 재산을 보호코자 함인듯 하더라. (경남지국)

[매일신보 1913.08.07]
주산월이는 서화기예가 일시 화류계의 첫째 방석을 차지하더니 그만 마마님이되여 산 깊이 들어갔다 하고, 시곡(詩谷) 기생들은 요사이 파리 날리기에 아주 나랏집하는 모양이라더니 그 중 몇 명은 함경도로 출장을 갔다하고, 광교기생 다동기생들은 여전한 모양인데, 권연 물고 인력거로 올라 앉아 대로상으로 횡치하는 것이 가증한다하고.

 

다동기생조합 설립을 주도했던 주산월은 명월관에서 손님으로 온 천도교 대도주(大道主)를 지낸 의암(義菴) 손병희를 만났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그의 소실(小室)이 되면서 기생 활동을 접었다. 당시 손병희는 53세였고 주산월은 20세였다.

 

[매일신보 1913.09.04]
충청남도 공주군 기생조합소에서 지난 달 31일 천장절에 그 고을 관민 간 유력자를 청요하여 선유(船遊)를 차리고 각종 가무로 질탕히 놀았더라. (공주지국)

[매일신보 1913.09.05]
일찍이 화류계에서 서화기예로 유명하던 주산월이는 그간 마마님이 되었다기에 화류계에는 아주 무색하게 되었으나 당자에게는 대단 고맙다고 하였더니 요사이 들은즉 도로 나와서 기생노릇을 한다하니 화류계에는 광채가 나겠지만 당자에게는 불행인 걸. 좌우간 한 번 가볼밖에. (호색자)

 

필명 ‘호색자’가 투고한 글은 가짜뉴스였다. 그러나 이 기사가 나가자 주산월을 보려고 손님들이 요릿집에 몰려들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주산월의 인기가 상당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산월은 1915년에는 손병희와 결혼하여 세 번째 부인이 되었으며 이름도 주옥경(朱鈺卿)으로 바꾸었다.

당시 매일신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이라는 제목으로 예술인 100명에 대한 기사를 연재했었는데 1914년 1월 29일에 주산월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였다.

 

[매일신보 1914년 1월 29일 기사. 국립중앙도서관]

 

기사에 “얼굴은 풍후(豊厚)하고 태도는 단아하며 성질은 온순하다. 겸하여 가야금, 양금, 남무(男舞), 립무 등과 평양에서 유명한 수심가까지 잘 하고 못하는 것은 다시 물어볼 일도 아니다.” 라고 하였다. 게다가 요청을 받은 자리에서 바로 그려내는 소위 석화(席畵)에 뛰어났으며, 그 가운데서도 매란국죽(梅蘭菊竹)과 노안도(蘆雁圖) 에 특장(特長)이 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대중잡지였던 <삼천리>의 1936년에 6월호에서는 주옥경에 대하여 "얼굴은 비록 잘나지 못한 편이나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더구나 마음씨가 곱고 태도가 아련해서 장안의 수많은 남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 평소 서화와 음악을 좋아했다는 손병희가 주옥경을 가까이 하게 된 것 역시 미모가 아니라 주옥경의 재능에 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주옥경은 손병희가 3․1 운동에 참여하였을 때 “우이동 봉황각에서 거사준비를 하는 동안 저는 혹시 누가 와서 엿듣지 않을까 파수를 보았다”고 회고했다. 거사 후 손병희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자 주옥경은 감옥 앞 단칸방에서 기거하며 옥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손병희가 1년여의 옥살이 끝에 1922년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결국 별세하자 손병희의 딸인 손광화(孫廣嬅)와 함께 지금의 천도교여성회의 전신인 내수단(內修團)을 창단하고 이후 여성 사회운동에 헌신하였다.

 

[매일신보 1913.09.09]
어떤 요리점에서는 은근자를 무부기라고 속여 기생들과 같이 놀게 할 즈음에 마침 정작 무부기가 와서 보고 요리점 주인과 일장풍파가 난 후로 기생들이 일제히 가지 않기로 공론을 하였더니 주인이 기생조합에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빈 후에 다시 가기로 공론을 하였는데, 그 요리점은 은근자 요리점이라나요? 이후부터는 그런 마음을 좀 씻었으면. (확실히 아는자)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면서 기생들은 일패(一牌), 이패, 삼패로 구분되었다. 일패는 궁중의 여악 출신 기생들이다. 이패(二牌)는 일패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한 기생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다양한 능력과 함께 인격까지 갖추어야 대접받을 수 있는 기생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밀매음(密賣淫)을 하다 발각이 되는 경우 이패 또는 은근자(慇懃者)로 불렸다. 반면 삼패(三牌)는 궁중과 전혀 관련 없이 민간에서만 활동했던 부류이다. 이들은 예술적 기능을 지니기는 했지만 일정한 교육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기생조합에 들 수가 없어 결국 돈벌이를 위해서 창녀(娼女)처럼 몸을 팔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삼패 가운데는 가창(歌唱)이 출중했던 인물들이 상당히 있어서, 후에 민간 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에서는 삼패도 궁중 여악 출신 기생들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16년에는 친일파 조중응(趙重應)이 삼패기생(三牌妓生)들을 모아 신창기생조합(信彰妓生組合)을 세움으로써 삼패들도 공식적으로 기생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신보 1913.09.12]
평양무부기로 유명한 김옥진, 홍채봉 두 기생은 소문이 굉장하게 마마님이 되셔서 들어갔다더니 불과 한 달에 도로 기생으로 나왔다니 들어가서 제 볼일은 다 보았기에 또 나왔지요. 일 년에 4-5차례만 그렇게 하면 큰 수 날 것이오. 평양기생들은 무자본 대상들이래요. (일풍유랑)

[매일신보 1913.10.04]
우리 의주 화류계는 예기조합이 설립된 후로 이전같이 방탕한 행실은 점점 없어가고 이인 경대하는 범절과 가곡만 열심히 공부하니 그것이 신통한 일이오. 이것을 보면 화류계가 발전될 모양이야. (의주풍류랑)

[매일신보 1913.10.05]
우리 기생조합에서는 이번 채하동에서 습률대회를 하는데, 한바탕 우리들의 가무도 한 번 구경시킬 겸 여러 손님의 흥미를 도와드려야 할 터로 요사이 가무를 공부하였더니 지금은 어디를 가서 노는지 남에게 뒤는 지지 아니할 터인 즉 참 좋단 말이야. (개성기생)

 

 

 

 

참고 및 인용 : 기생 이야기(신현규, 2007, 살림출판사), 잠깐 동안 봄이려니(이문영, 2021, 혜화동),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보고사), 문화원형백과(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