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26 - 일제강점기

從心所欲 2021. 9. 20. 12:48

일제강점기에도 명성을 얻었던 기생들이 적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대중잡지였던 『삼천리』 제3권 제9호에 당시 이름을 날렸던 기생들을 조명한 글이 있다. 1931년 9월의 글이다.

 

춤 잘 추는 서도기생(西道妓生) 소리 잘하는 남도기생(南道妓生)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날 아름답던 노래와 춤을 겨우 지탱하여 가주는 남도기생, 서도기생은 누구, 누구들인가?

성주풀이의 김초향(金楚香)
“성주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에 제비원이 본일네라.
제비원에 솔씨를 받어 대평소평 던졌더니
그 솔이 점점 자라 소부동이 되었네. 대부동이 되었네
얼화- 만수
얼화- 대세니라”
하고 청산류수가치 멋지게 넘어가는 <성주풀이> 한마디가 다방골 어떤 장명등 달린 집 일각대문에서 흘러 새어나온다. 아마 장안 일등명기 김초향(金楚香)이 고수 한성준(韓成俊)의 북을 더불어 흐르는 가을바람 아끼어 오늘저녁 대청마루에서 한 곡조 넘기는 것이 아닐까.

김초향은 <고고천변 일륜홍>이든지 <자진사랑가>든지 <흥부놀부>든지 모든 남도소리를 잘하기로 유명하다. 원래 고향이 경상도 대구니까 남도기생이 남도소리 잘하는 것이 곱지 않겠지만 김초향의 남도소리에 이르러는 가히 명창이요. 절창의 소리를 들을 만하다. 금년 봄의 일이지만 단성사에서 팔도명창대회를 할 때에도 김창환(金昌煥)이나 오태석(吳太石) 못지않게 인기가 있어서 수천 청중에게서 재청, 삼청, 사청까지 받아 장내가 떠날 것 같던 역사를 가졌다. 원래 조선의 노래라거나 춤이라거나 모두 남도에서 발원이 된 것이니 김창환이요, 송만갑(宋萬甲)이요, 김창룡, 오태석들이 모두 경상도나 전라도 출신이지만 기생 축에도 소리 잘하는 박녹주(朴綠珠), 김추월, 리소향(李小香), 리화중선(李花仲仙), 하롱주(河弄珠), 리옥화(李玉花)들도 모두 남도의 출생들이다.
그중에서도 김초향은 뛰어났다.

 

김초향(金楚香, 1900 ~ 1983)은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여성 명창이다. 12세 되던 1911년부터 대구에서 가곡을 배웠고, 14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동백(李東伯), 김창환(金昌煥), 송만갑(宋萬甲) 등에게 소리를 배웠다. 14세에 장안사(長安社)의 전속기생으로 들어가 판소리 몇 대목을 배우고, 바로 극장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장안사는 1908년부터 1914년까지 서울 교동에 존속했던 사설 극장이다. 김초향은 공연으로 적지 않은 인기를 끌었고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기획 기사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소개되기도 했다. 30대 초반까지 무대에서 판소리 공연을 하고 레코드 음반을 취입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소리는 암만해도 서도소리보다 남도소리가 나은 것 같다.
서도소리라야 겨우 <수심가>, <앞산타령>, <뒷산타령>, <놀량>, <배따라기>, <영변가>, <메나리> 등 잡가등속으로 우선 그 가짓수에 있어서 남도소리보다 못하고, 소리 그 자체도 규모가 크지 못하며 웅장하지도 못하고 멋도 부족하다. <영변가> 같이 건들건들한 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명월관이나 식도원에서나 JODK방송국에서도 남도소리 방송이 더 많은 점으로 보아 소리나 들을 줄 아는 일반가객들이 어떻게나 서도소리보다 남도소리를 즐겨하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지만 서도에도 소리 잘하는 기생이 서울에 없는 것이 아니다. 백모란(白牧丹)의 <수심가>, 이진봉(李眞鳳)의 <앞산타령>, 이영산홍(李映山紅)의 <자진배따라기>, 김옥엽(金玉葉)의 <뒷산타령>, 장학선(張鶴仙)과 문명옥(文明玉)의 <엮음 수심가>, 손진홍(孫眞紅)의 <메나리타령> 등은 그 소리가 대동강 능라도의 실버들같이 곱고 연하고 휘늘어져서 다정다감한 젊은이들을 울게 한다.
더구나 새로 나온 명기 김채봉(金彩鳳)의 <배따라기> 하나는 서도 각시를 대표하여 자랑거리인 것만큼 서도정조를 잘 살린 절창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서도기생은 평양서, 남도기생은 진주서 난다고 하지만 남도기생은 진주보다 전라도 오십삼 주와 옛날 백제 땅인 충청도에서도 많이 난다. 아까 말한 김초향이 우선 경상도 대구요, 이욱화(李玉花)는 전라도 해남(海南)이고, 이소향은 신라 서울 경주(慶州)가 그 출생지들이다. 서도의 산수는 대동강을 끼고 평양개명 한 곳에 와서 몰렸기에 기생이라면 으레 평양 한 곳을 손꼽게 되지만 남도는 진주뿐 아니라 승지강산이 남강 물, 낙동강 물을 끼고 물골 닿는 곳곳마다 승지가 잇는 까닭에 인몰도 이리저리 여러 곳에 나누어 있는 것이 아닐까. 미상불 재미있는 지리상 대조다.

평양기생학교와 승무(僧舞)
소리는 남도가 승하지만 춤은 암만해도 서도기생들이 더 잘 추는 것 같다. 나는 작년 여름에 평양에 내려갔다가 연광정(鍊光亭) 부근의 기생학교에 가서 서도아씨들이 춤추는 모양을 한나절이나 보고 몹시 취한 일이 있었다. 고깔 쓰고, 장삼 입고, 만첩청산 깊은 산골로 아장아장 걸어 내려오는 그 중의 거동, 그 몸맵시가 어쩌면 그렇게도 연하고 부드러울까. 아미를 고요히 내리깔고 분 같은 하얀 손을 장삼 끝으로 보일락 말락 조금 내밀고 우쭐우쭐 몸을 날리는 그 양자는 별것 없이 두루미였다. 몇 해 전 서전황태자(瑞典皇太子)도 평양에 와서 이 승무를 보고 몹시 반하였다고 그때 신문에 쓰여 있었다. 황태자 앞에서 춤춘 이는 명기 김옥란(金玉蘭)이었다.

평양색시들은 키가 크다. 남남북녀라고 하는 말처럼 서북도 여자들은 키가 후리후리하게 큰 것이 보기 좋다. 키가 크니까 몸에 있는 곡선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키가 크니까 팔과 다리가 멋지게 축 늘어져서 수족을 쓰는 것이 마치 바람에 한들한들 나부끼는 수양버들의 움직임 같다. 서양여자들 춤이 보기 좋은 것은 큰 키 때문인 것 같다. 실로 키 작은 남도기생들이 추는 춤은 억지춘향같이 어쩐지 안타깝게 보인다. 남도기생의 춤을 앙상한 산골 늙은 소나무가 바람에 떠는 것이라 한다면, 서도기생의 춤은 강변 모래 벌에 봄바람 안고 저절로 늘어져 흔드는 버들이라 할 것이다.언제든가 경복궁(景福宮)안에서 춘앵무(春鶯舞)라는 춤을 서도 각시들이 춘 일이 있었다. 빨갛고 파랗고 노란 오색 채의에 면류관을 쓴 각시 칠팔 명이 가운데 큰 북 하나를 놓고,“어으-, 어으-!”“에야-, 에야-!”하여 멋진 선소리와 같이 북을 둥둥 울리고는 고요히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앉았던 영국영사와 미국영사는 어쩔 줄 모르게 기뻐하였다. 실로 그 춤은 늙었던 사람이 도로 젊어지도록 한다. 춤도 동양식 고전적 아아한 정취가 깊었지만, 키 크고 윤곽이 뚜렷한 서도 각시들이 추었기에 말이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 남도 각시들이 추었던들 그렇게도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하였으리라.딴말이지만 경기기생으로 춤 잘 추는 이는 헌매홍(玄梅紅)을 들겠고, 남도기생으로는 진소홍(秦小紅)를 들리라.

절세미모(絶世美貌)에 그 아미(娥眉)
춤도 춤이려니와 춤보다도 서도기생들의 자랑거리는 그 인물이 잘난 점이다. 김옥난(金玉蘭) 같은 이는 일본서 대표적 미인이라고 떠드는 수곡팔중자(水谷八重子)보다 그 우아(優雅), 풍려(豊麗), 청초(淸楚)한 폼이 몇 배나 나은지 모르겠다. 다만 그네보다 교양(敎養)이 없어서 몸가짐이 깨끗하지 못한 점이 한탄거리일가? 배은주(裵銀珠), 김홍도(金紅桃), 리옥화(李玉花), 김춘자(金春子)들도 모두 꽃봉오리에 이슬 맺힌 것 같은 이팔청춘이지만 그 위에 가위 절세의 미인들이라 할 만하다.

조선서 미인을 찾자하면 암만해도 기생 속을 뒤져야 하고, 기생 속에서도 평양기생을 먼저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여학교 교육의 역사가 삼십여 년이나 있어서 조선 여학생 중에 미인이 간혹 있었기는 하지만 그것은 새벽별 같이 극히 드물었고, 다만 육체미는 여학생편이 훨씬 뛰어났었지만 얼굴바탕의 아름다움에 기생을 치지 않을 수 없다.지금의 기생들은 소리 잘하고, 인물 잘나고, 춤 잘 추어 그 이름이 빛나지만 예전과 같은 의(義)에 목숨을 바치든 기생이라거나 문장시부(文章詩賦)를 깨끗이 한다든가 하다못해 사군자라도 치는 품성 있는 명기들이 없다. 지금의 기생은 그저 돈만 주면 웃음도 팔고 절개도 팔뿐이다.

임진왜란 때에 왜장청정의 목을 안고 진주 남강 물에 떨어져 죽은 논개(論介)라거나, 평양에 천추만대로 향불을 받고 있는 계월향(桂月香)이라거나, 함흥기소춘풍(咸興妓笑春風)이라거나, 개성명기 황진이(黃眞伊)라거나, 서도기부용(西道妓芙蓉) 등의 재주와 절개를 오늘날 기생에게는 터럭 끝만치라도 찾을 길 없는 것이 슬프구나. 이것이 정말 슬프다. 조선기생이 비록 쓰러져가는 조선의 고유한 노래와 춤을 보존하여 주고 조선광대가 거문고, 생황, 장고, 해금, 피리, 소고, 날라리 등 고유한 음악과 악기를 보존하여 주는 점에는 크게 감사할 바이지만 옛날과 같이 우러러 쳐다볼 만한 명기가 드문 것이 자못 한탄된다. 더구나 <승무> 대신에 댄스를 하고, <백구사(白鷗詞)>, <어부사(漁父詞)>를 하는 대신에 <낭깅마찌요>, <오료꼬>를 하는 것을 볼 때 깊은 시름을 금할 수 없다.

추강(秋風)에 흐르는 단가(短歌)
지금은 기생이 확실히 보잘 것 없이 타락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원군이 가고 명성황후마저 간 뒤 광무와 융희가 이화는 둥둥 하늘에 나는 듯이 모두 자취를 감추자 기생들도 옛날의 영화와 작별하고 음탕한 거리거리로 돌아다니는 직업여성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춘향전(春香傳)>을 보아도 옛 기생의 사상과 생활을 엿볼 수 있지 않느냐?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기생이 처음 있기는 신라 진흥왕(眞興王)시대부터라 한다. 그 뒤 고려에 와서는 여악(女樂)이라 하여 궁중부중의 예악(禮樂)을 기생들이 잡았고 이조(李朝)에 들어 십대 조 연산군(燕山君)때에 이르러는 아주 전성하여서 지금의 탑골공원 터에 있던 원각사(圓覺寺)를 교방(敎坊)으로까지 꾸민 일이 있다고 한다. 그때에는 네 가지 종류의 기생이 있었다. 약방기생(藥房妓生), 상의기생(裳衣妓生), 혜민서기생(惠民署妓生), 활인서기생(活人署妓生)이 그것이다. 또 관찰부소속의 기생을 영문기생(營門妓生), 군청소속의 기생을 본군기생(本郡妓生)이라 하였다. 모두 조정에 대경사가 있을 때마다 풍류를 가지고 나아가 백성과 관원을 즐겁게 하였고 평일에는 가무음곡(歌舞音曲)과 풍류운사(風流韻事)로 벗하여 교양을 쌓기에 힘써왔다.

아무튼 지금 서울에는 수백 명의 기생들이 춤과 노래로 무너져 가는 옛 서울의 정조를 조금씩이라도 지키고 있다. 기생들은 모두 권번(券番)에 기적(妓籍)을 올리고 있는데 가장 큰 권번이 조선권번(시내 다옥정177)이고, 한성(무교정92), 한남(공평동65) 등이 그다음으로 가는데 모두 백여 명씩의 노소기생들이 있으니 어떻게 질퍽하냐. 그러고 이 기생들이 가장 많이 살기로는 다방골(茶屋町)이오, 그다음이 서린동(瑞麟洞)과 인사동(仁寺洞)과 관철동(貫鐵洞), 청진동(淸進洞)이다.이제 이 붓을 떼려 할 때 어대선가 노랫가락 한마디가 내 귓가를 스친다.

남문을 열고 바라를 치니,
계명산천이 화닥닥 밝아 온다.
에헤 에헤 에헤야 에헤로다.

나는 이 소리를 우두커니 듣고 섰다가 절개 굳기로 유명하던 개성 황진이가 서화담(徐花譚)을 두고 지은 <반달[半月]>이란 시를 읊어 화답하였다.

“誰琢崑山玉 裁成織女櫛 牽牛一去溪 愁擲半空虛”

 

황진이의 <반달[半月]>이란 시의 내용은 이렇다.

 

수탁곤산옥(誰琢崑山玉) 누가 곤륜산의 옥을 다듬어

재성직녀즐(裁成織女梳)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던고.

견우일거계(牽牛一去溪) 견우가 한 번 은하수를 건너가자

수척반공허(愁擲半空虛) 시름하다 반공중 빈 곳에 던져버린 것이라.

 

1936년 『삼천리』잡지 8권 6호에 실린 <명기영화사(名妓榮華史) 조선권번(朝鮮券番)>이란 글의 나머지 부분이다.

 

조선의 정악(正樂)은 물론이지만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하규일씨의 손아래에서 하나에서 수천을 헤아리는 수많은 기생(妓生)들 가운데서도 얼굴 잘 나고 재주가 용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 불러서 장안의 호걸과 풍류객들이 너도나도 하며 단 침을 삼키며 연연 사모하던 기생들이 하나 둘이 아니려니 이제 이들의 지난날의 성망(聲望)과 그들의 자취도 알아보자. 원화홍(元花紅)이 그러하고 오소홍(吳小紅)이 또한 그러하다. 그밖에는 김산호주(金珊瑚珠) 또한 빠질 수 없는 한다하는 명기(名妓)였다.

이들은 모다 하규일(河奎一)씨의 손아래에서 노래를 배우고 춤을 배운 유명한 기생들이었다.
고향은 본래가 모다 평양이었으나 서울에 올라와 한동안 수많은 남자의 흠모와 사랑을 무던히 받아오던 기생들이다. 그중에도 더구나 김산호주(金珊瑚珠)같은 기생은 「일문십지(一聞十知)」하는 재주를 구비한데다가 평양에서부터 이름 있는 어여쁜 얼굴을 가진 기생이다. ‘패성’의 풍류객도 풍류객이려니와 그 당시 서울장안의 기생방을 드나드는 고관대작의 아들까지 사랑을 아끼지 않던 일대명기였다. 그 때가 바로 대정원년(大正元年)경이어서 아직 예적도 없이 지나던 때의 일이다. 지금의 이들은 모다 어느 돈 많은 남자들을 얻어가서 곱다랗게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지! 그렇지 못하면 일찍이 세상을 떠나갔는지? 그들의 소식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대정원년(大正元年) : 일왕 요시히토의 재위 시작년도인 1912년

이들이 한번 기생의 자리를 물러간 뒤에는 현매홍(玄梅紅)과 김월선(金月仙)이 또한 당대의 한다하는 이름을 이 강산(江山)에 날리던 명기(名妓)들이다. 현매홍(玄梅紅)의 본명(本名)은 달순(達順)이요, 김월선(金月仙)의 본명(本名)은 복순(卜順)이라. 둘이 모두 지금에는 사십(四十)을 가까이 바라다보는 이들로서 매홍(梅紅)은 열 넷에 월선(月仙)은 열다섯에 똑같이 기생이 되어서 하선생(河先生)의 귀여움을 받아가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춤추고 노래 부르게 되었으니 둘이 모두 경성잡가(京城雜歌)와 서도잡가(西道雜歌)를 잘하는 명창(名唱)들이었다. 더구나 매홍(梅紅)은 김상순(金相淳)씨에게서 양금(洋琴)까지 배워서 양금 잘 타기로도 당대에 그 이름이 자자하였던 기생이다. 모다 십오년(十五年)동안이나 기생으로 있으면서 십여 년전(十餘年前)까지도 이름 있는 명기(名妓)로 치던 기생들이다. 지금에는 모두 현모양처가 되여 돈 있는 남자의 가정으로 들어갔다 한다.

그런데 이들과 거의같이 나와서 몇 해 앞서 기적(妓籍)에서 물러간 이로는 김명옥(金明玉)이 있다. 명옥(明玉)이 역시 지금은 오십(五十)의 고개를 바라게 되는 몸이나 한 이십년(二十年)전까지는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기로 (더욱이 서도잡가(西道雜歌))는 빼어 놓을 수 없는 명기(名妓)의 하나였다. 지금엔 이 기생도 전라도 어떤 부호와 짝을 지어 평온한 가정을 이루어 여생을 보낸다고 한다.

그 다음에 나타난 명기(名妓) 가운데는 주산월(朱山月)이 있다. 본명(本名)은 주○경(朱○京)이다. 일찍이 「천○교의×대교주 손×희」의 뜨거운 총애를 받아 오던 주산월(朱山月)이는 어려서 십사세(十四歲)에 기생으로 나섰던 것이다. 얼골은 비록 잘 나지 못한 편이나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더구나 마음씨가 곱고 태도가 아련해서 장안의 수많은 남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손○희씨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비록 기생의 몸으로 있으나마 침식을 잊어가면서 극진한 간호를 하였던 것이며 그가 돌아감에 뜨거운 피눈물을 그의 무덤 위에 몇 번이고 뿌렸다고 한다. 그가 기적을 떠나 천○교의 돈으로 동경에 건너가 여자 영어숙(英語塾)학교에까지 졸업하고 돌아와 오늘날까지 내내 독신으로 지내면서 지금엔 천○교의 여자부의 총무로서 50의 고개가 넘도록 피로를 모르고 부지런히 일을 하여 가고 있다. 

 

글 가운데 ‘주○경(朱○京)’은 주옥경(朱鈺卿)이고, ‘천○교의×대교주 손×희’는 '천도교의 3대 교주 손병희'이다. 이름을 다 밝혀 글을 쓰지 못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가 간 후에는 또한. 이난향(李蘭香)과 서산호주(徐刪瑚珠)를 손꼽을 것이다.
이난향의 본 이름은 선비(仙妃)요 서산호주의 본 이름은 순봉(順鳳)이다. 둘이 다 대정 8년부터 기생으로 나섰으니 난향이 나이 19요 산호주는 15였다. 평양이 역시 이들의 고향이었고 똑같이 춤 잘추고 노래 잘하고 양금 잘 타기로 그 당시 장안의 남자들은 어누 누구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욱이 이난향은 얼굴 잘나고 거동 곱고 말소리가 맑을 뿐더러 하나 물으면 열을 아는 재주덩어리였으니 그것은 난향의 맑은 두 눈동자와 넓죽한 이마에 그 재주가 들었다고나 할 것이다. 글 잘하는 사람들도 「난향」이요 돈 잘 쓰는 궐자들도 「난향」이었다. 그러더니 난향이나 산호주나 기적에 몸을 둔 지 15년째 되는 소화 8년 봄, 꽃피고 새 지저귀던 때 이들의 나이도 모두 30년의 고개를 넘게 되니 이들에게는 머지않아 닥쳐올 얼굴의 주름살을 막을 길 바이없음을 느꼈던지 난향은 영남의 어떤 부호의 사랑과 짝을 지어 화류계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지금에는 아들 딸 많이 낳고 무심한 세월만을 손꼽고 있으리라.
▶대정8년(大正元年) : 1919년
▶소화 8년 : 소화(昭和)는 일왕 히로히토의 재위기간을 가리키는 용어로 원년은 1926년이다. 소화 8년은 1933년.

 

이난향(李蘭香)은 1900년에 평양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 형편은 원래 넉넉했지만, 아버지가 물산 객주업을 하다 실패하여 가세가 기울어졌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는 12살인 막내 이난향을 기생 양성소라 불리는 평양의 이름난 노래서재로 보냈다.
이후 13살에 순종의 진연에 참가하는 기생으로 뽑혀 서울로 상경하였다. 다동기생조합의 기생이 되었고, 그 후 대정권번에 소속되어 하규일에게 정악과 가무를 배웠다. 정가인 가곡, 가사, 시조 뿐 아니라 서도잡가도 불렀으며, 다방면에 능했다. 또한 춤추는 태가 빼어났다고 한다. 또한 미모가 뛰어나고 목소리가 고왔으며 총명하기도 하여 당시 장안의 남자들치고 이난향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31세 되던 해에 결혼을 하면서 기생 일은 접었지만 그 후에도 음악활동은 계속하였다.

2012년에는 뒤늦게 그녀의 얼굴이 걸그룹 f(x) 출신의 설리와 꼭 빼닮았다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일제강점기 엽서 : 정재무 복장을 한 관기.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난향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엽서 속의 이난향]

 

그러면 난향이와 산호주가 간 뒤의 조선권번에는 어떤 명기가 오늘날까지 있어오는가?
백운선(白雲仙)이가 그 이름이요, 김수정(金水晶)이 또한 그러하다. 백운선의 본 이름은 순향이요 명치 33년 3월 17일이 그의 생일이다. 인제 나이는 먹을 만치 먹어 대정 8년에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니 실로 기적에 몸을 던진 지 20년을 헤아리게 되었다. 기생으로 더구나 한다하는 명기로 이렇듯이 오랜 동안을 계속해서 오는 이는 오직 백운선이 하나뿐일 것이요 30의 고개를 넘으나 그 노래 그 춤은 조금도 변할 줄 몰라 그의 인기는 도무지 사라질 줄 모르니 이를 가리켜 만년 명기라고나 할 것이다. 모두가 하규일씨의 손에 길러지면서 귀여움을 많이 받은 명기가 그 누구랴마는 유독히 백운선은 그중에서도 가장 귀여움을 받아오고 아껴오는 기생이다.

김수정(金水晶)은 아직 활짝 피지 못한 한 떨기 백장미화, 그의 나이 24다. 일찍이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졸업하던 즉시 열다섯에 기적에 몸을 두어 오늘에 이르렀다. 경기잡가, 서도잡가가 기막히지마는 양금도 신간이 녹고 춤도 탄복할만하니 그의 재주가 어느 명기에 뒤지지 않는다. 요사이 장안에서 백운선이를 아는 자 또한 김수정을 알게 되었다. 한 가지 풍편에 들리는 바는 수정은 오래지 않아 기적에서 정든 남자를 따라 가정으로 들어간다니 수정이 간 뒤에는 과연 누가 또한 나설 것인가.

조선권번이 있어온 지 이제 25여 년 그 동안 얼굴 잘난 명기 이밖에도 많았었고 소리 잘하고 춤 잘 추던 기생 또한 허다하며 어떤 기생은 비관하고 목숨을 끊은 이도 있고 어떤 기생, 해외의 손님과 정을 드려 머나먼 외지로 가서 소식조차 없는 이가 하도 많으니 이것을 모조리 적을 수도 없는 일이요 그것을 다 추려낼 시간의 여유를 못 가졌음을 한할 뿐이다.

 

왜인들은 조선의 기생을 성적으로 상품화하여 수많은 사진엽서를 만들어 팔았다. 이것이 왜인들의 변태적 취향에 들어맞았는지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방문하는 왜인 관광단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생이라고 할 정도였다. 1970년대 왜인들이 한국으로 기생관광을 위해 몰려왔던 것은 전혀 새로운 풍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엽서, 국립민속박물관]

 

[일제강점기 엽서, 국립민속박물관]

 

[일제강점기 엽서, 국립민속박물관]

 

엽서 속의 이러한 사진들과는 달리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사진 중에는 기생으로써의 자부심이 물씬 풍겨나는 사진들이 있다.

 

 

 

 

 

사진 속 기생의 포즈가 사진사의 주문에 의한 것인지 본인이 알아서 취한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진 속 기생의 모습에는 당당함이 넘쳐난다. 어느 계층이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남들에게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는 기생도 있었듯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기생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오늘까지 우리 전통 가무의 흐름을 이어준 주역들이었다.

 

 

- 조선의 기생 완(完) -

 

 

참고 및 인용 : 한국전통연희사전(전경욱, 2014, 민속원),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보고사),  문화원형백과(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우리 옛 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릉 조성의 기록 - 산릉도감의궤  (0) 2021.12.24
계(契)  (0) 2021.12.20
조선의 기생 25 - 권번  (0) 2021.09.18
조선의 기생 24 - 기생조합  (0) 2021.09.17
조선의 기생 23 - 청루(靑樓) 홍루(紅樓)  (0) 2021.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