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강화도조약으로 불리는 왜국과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래 조선은 미국, 영국, 독일 ,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과 연이어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조선에는 이들 나라가 조선에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개설함으로써 외국의 외교관들이 상주하기 시작했다.
미국공사관이 정동에 터를 잡고, 그 뒤를 이어 영국영사관, 러시아공사관이 정동에 자리 잡으면서 정동은 외국 공사관의 거리로 변모하게 된다. 러시아 , 프랑스, 영국 등은 1890년부터 이곳에 서양식 건물을 공관으로 짓기 시작했다. 조선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 규모나 위세가 서양식 건물을 처음 보는 조선인들에게는 대단했겠지만, 외국인 중에는 이 건물들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 인물도 있었다. 미국공사관 서기관의 신분으로 한국 땅에 부임하였다가 사직하고, 조선 궁내부에서 일했던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William Franklin Sands)는 자신의 회고록 「비외교적 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에 이렇게 기술했다.
"미국공사관은 서울에서 가장 편안한 곳 중의 하나에 든다. 러시아, 프랑스, 일본공사관과 영국총영사관 건물들은 일본인과 중국인 청부업자들이 유럽건축물을 모방하여 지은 것들로, 칙칙하고 음울한 느낌을 주었다.“
당시 미국은 오랫동안 한옥을 개수하여 공관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런 글을 썼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한옥은 개수하기에 매우 편리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잘 다음어진 화강암 기초 위에 튼튼하게 세워 올린 건물이었다. 벽은 진흙이나 벽돌로 되어 있어 기후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으며, 육중한 참나무나 밤나무 대들보로 받쳐진 지붕은 수 톤의 흙으로 채워서 높이 올리고 그 위에 기와를 씌워 놓아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강추위가 침범하지 못했다.”고
한옥 예찬론을 펼쳤다.
당시만 해도 조선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인력이 없었기에, 중국이나 일본의 기술자들을 데려와 지어야만 했고, 공사 감독관 역시 외국인이었다. 아마도 우리 손으로 지은 최초의 서양식 석조 건축물일 ‘독립문’도, 서재필의 구상에 따라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땄다고는 하지만 석재를 쌓는 방법은 이전의 성벽을 쌓는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1892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1898년에 완공된 명동 대성당도 우리나라에는 양옥 건축의 기술자가 없어 중국에서 벽돌공, 미장이, 목수 등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다.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에 의해 한성에 신축되거나 증축된 청사만 139개동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이 선호했던 건축양식은 자신들의 건축 방식에 르네상스 양식을 합친 ‘왜양절충형’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건물들을 조선의 근대화를
이끄는 자신들의 치적으로 홍보하는 사진엽서를 꾸준히 발행했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의 완공과 함께 현재의 태평로, 남대문로 주변에 일제의 관공서, 금융시설, 호텔 등이 차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때의 건물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유학한 일본 건축가들이 설계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공간구성에는 건물의 겉모양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경복궁 정문에 해당하는 광화문을 옮긴 자리에 세운 것이 대표적 사례다. 원구단을 헐고 철도호텔을 세운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국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1910년 이후에는 서울, 부산, 군산, 목포, 인천 등의 주요 도시와 항구에 일본풍의 건축물과 일본인 거리가 우후죽순으로 본격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거리에는 식민지 자본주의의 변모에 걸맞는 도시적 풍경이 등장했고, 서울 등 대도시에는 백화점도 들어섰다.
일제 경무국 자료에 따르면 1936년 한 해의 신축건물만 2,944채였다. 1944년에 조선에 있던 왜인들의 수는 70만을 넘어섰고, 호수는 16만에서 17만 호에 달했으며, 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 조선 전국에는 무려 1141개의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참고 및 인용 : 일제강점기 사회와 문화(이준식, 2014, 역사비평사), 제국의 억압과 저항의 사회사(김수현, 정창현, 2011, 민속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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