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놈들이 이 땅에 들어와 무슨 짓인들 안했을까마는, 남산을 훼손한 일에 대해서는 그리 자주 거론되지는 않는다.
1885년 왜인들의 한성 성내 거주가 허용되면서 왜인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곳은 남산 기슭이었다. 일본공사관부터 시작해서 한국주차군(駐箚軍) 사령부, 통감부, 통감관저, 헌병대 사령부 등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건물들이 남산 곳곳에 들어섰다. 그와 함께 지금의 충무로 3, 4, 5가에 해당하는 진고개 일대는 왜인 거류 지역으로 바뀌었다. 1893년경에 이미 이 일대에 100여개의 왜인 상점이 들어섰다. 진고개는 조선시대 내내 가난한 선비들이 살던 남산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한국주차군(駐箚軍) : 한반도에 주둔했던 왜군 중, 상주하는 군대는 주둔군(駐屯軍)이라 하고, 2년마다 본토의 부대와 교체되던 군대를 주차군(駐箚軍)이라 불렀다. 한국주차군은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사용되던 명칭이고, 1910년에는 조선주차군으로, 그리고 1918년부터는 조선군으로 바뀌었다. |
왜인들은 1892년부터 남산에 신사(神社)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또한 청일전쟁에서 이긴 뒤에는 전사한 왜군을 기리는 충혼기념탑까지도 세우려고 했다. 그러다 1897년, 조선시대 군사들의 무예 훈련장이 있던 예장골에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을 우선 조성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에 주둔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왜인들은 이곳에 도로를 내고 벚나무 600그루도 심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898년 10월, 남산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라는 신사(神社)를 지었다.
신사(神社)는 왜국 고유종교인 신도(神道)의 신들을 제사지내기 위한 건물이다. 신도(神道)의 신앙 대상은 천황과 그 조상들이다. 신도는 개조가 없고 경전도 없으며, 신화와 자연 신앙, 애니미즘, 조상 숭배가 혼합된 종교이다. 자연과 신을 하나로 보고 신과 인간을 잇는 도구와 방법이 제사이며, 그 제사를 지내는 곳이 신사이다.
왜국의 개벽신화에 따르면 천상의 세계[高天原]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신이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이다. 오누이 사이인 둘은 결혼하고 일본 열도인 오야시마[大八洲]를 만든다.
여동생 이자나미가 불의 신을 낳다가 죽고, 홀로 남은 오빠 이자나기가 얼굴을 씻다가 세 아이를 낳는다. 왼쪽 눈을 씻으니 태양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나오고, 오른쪽 눈을 씻으니 달의 신이 나오고, 코를 씻으니 폭풍의 신이 나왔다는 것이다. 아마테라스는 태양의 신인 동시에 일본 천황의 조상신이며 왜국민족의 시조신이고 신도(神道)에서 말하는 왜국의 8백만 신을 지배하는 여신이기도 하다.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에 모신 신이 바로 이 이자나기의 왼쪽 눈곱이 여신으로 변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였다.
1916년, 일제는 남산대신궁을 조선총독부가 신사의 관리비용을 전액 부담하는 정식 신사로 승격시키고 이름도 경성신사로 바꾸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미 1912년부터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울 계획을 갖고 총독부 예산에 이를 반영해 왔다. 따라서 경성신사로의 승격은 조선신궁을 건립하기 위한 예비 작업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1918년부터 본격 작업에 들어가 1920년 조선신궁의 기공식을 갖는다.
신도(神道)는 애초 왜국의 민간신앙이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으로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700년 만에 왕정복고를 한 왜국이 실추된 천황의 권위를 되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신도를 국가 통치의 수단으로 삼게 된 것이다. 신의 아들인 현인신(現人神)으로서의 천황이 대대로 일본을 통치했다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국민에게 심는 수단으로 신도를 활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신사 가운데 일부를 국가에서 지정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취했다. 일제는 당연히 조선에도 이 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한성의 남산에 신사를 세울 계획을 추진한 것이다.
남산의 서쪽을 크게 훼손하면서 조선신궁(朝鮮神宮)은 1925년 10월 완공되었다. 신궁에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明治]천황이 모셔졌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도 한 때 공식적으로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던 때가 있었다.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궁에서 제관(祭官)을 보내어 기은제(祈恩祭)나 기복제(祈福祭), 구병제(救病祭), 기우제(祈雨祭) 등을 지냈다.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을 당시 남산의 정상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사당이 있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성으로 옮긴 1년 뒤인 태조 4년(1395) 12월에 “이조에 명하여 백악(白岳)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南山)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경대부와 사서인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는 것은 국가에서만 제사를 올리고 사적으로는 제사를 금지했다는 의미다.
이에 목멱대왕을 봉사(奉祀)하기 위하여 현재 남산 팔각정이 있는 자리로부터 한강 쪽 서남 방향에 목멱신사(木覓神祠)라는 사당을 지었다. 그리고 매년 관(官)에서 봄, 가을에 초제(醮祭)를 행하였기 때문에 일반에서는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역사 때문에 성종 때부터 강력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과 중종 때부터 실시한 도덕사회 건설의 기치 아래 모든 무속신당이 철폐되는 가운데서도 이 국사당만은 없애지 못하였다.
▶초제(醮祭) : 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 |
그런데 일제는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이 국사당을 옮기도록 강박하였다. 자신들이 짓는 조선신궁보다 국사당이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당을 헐어 그 재목으로 현재의 인왕산 국사당 자리에 다시 옮겨짓게 된 것이다.
참고 및 인용 : 일제강점기 사회와 문화(이준식, 2014, 역사비평사), 제국의 억압과 저항의 사회사(김수현, 정창현, 2011, 민속원), 한국민속신앙사전(2009.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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