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들은 북경의 옥하관(玉河館)에 머무르면서, 10월 18일 새벽에 조회(朝會)에 참석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五拜三叩頭] 뒤 물러나왔다.
그 뒤 그들의 북경에서의 나날은 바다에서 겪던 고초만큼이나 고달팠다.
11월 8일
【예부의 복제(覆題)가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므로 우울함을 견디지 못하여 소갑(小甲)을 불러 그 연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근자에 남교(南郊)의 대례(大禮)가 박두하였으므로 지체되었습니다. 일전에 예부의 여러 관원이 회의하는 곳에서 들으니 평이 좋았으니, 과히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복제(覆題) : 회답하는 글. 인조의 왕위 책봉을 상주한 글에 대한 회답. |
11월 15일
【맑음. 세월은 흘러가고 사세(事勢)는 점점 요원하므로, 황효성(黃孝誠) 등을 불러 그 연유를 묻고 지연됨을 책망하였다.
그것은 대개 명(明) 나라 조정에 탐재(貪財)의 풍습이 크게 번져 공경대부(公卿大夫)와 대소 관리들이 모두 이욕으로 판을 차리고 정치를 뇌물로써 이루면서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신(陪臣)을 만나면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기회를 만났다고 여겨 침을 흘리고, 날마다 패자(牌子)와 소갑 등을 시켜 은자, 인삼, 수달피, 호피(虎皮), 지물(紙物), 저포(苧布) 등 물품을 요청하는 소리가 입에서 떠나지 않아, 아침에 겨우 요청을 들어주면 저녁에 또다시 그렇게 하였다. 때로는 소매 속의 단자(單子)를 연달아 요구하여 말하기를, “지난해 주청사(奏請使)가 왔을 때에는 모관(某官) 앞으로 은자와 인삼이 얼마요 모종(某種) 물품이 얼마며, 또 모관 앞으로 은자와 인삼이 얼마요 모종 물품이 얼마가 되었다.” 하며, 만단으로 토색하여 만족하지 않으면 그치질 않았다. 저들의 생각에는 만약 일이 속히 완결되면 뇌물의 길이 끊어지므로, 시일(時日)을 오래 끌고 문자를 수정하여 물품을 한껏 우려내어 반드시 지난해의 수효를 채운 후에 완결 지으려는 속셈이니, 아! 한도가 있는 물건으로써 밑 없는 구멍을 메우려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대개 지난해의 주문(奏聞)은 사체가 중대하므로 고하(高下)를 따지지 않고 저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주다 보니 이익을 넘보는 길을 터놓아 마침내 재물을 낚는 계기(契機)를 만든 것이다. 심지어는 예단 보내는 것을 채권문서(債券文書) 다루듯 하여 여러 번 싸고 깊숙이 간직하는 것이 준례가 되고 점차 조등(刁蹬 고의로 남을 어렵게 함)해져서 이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중국이 예로부터 명교(名敎)를 숭상하여 예의염치의 연원(淵源)이 되어 왔는데, 이제 이처럼 극도에 다다랐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소국(小國)의 배신(陪臣)이라 하여 오랑캐와 같이 취급하고 업신여겨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더욱 통분할 일이다.】
▶황효성 : 사행의 역관 중 1인. |
11월 20일
【내가 북경에 당도하던 날 들으니, 지난해에 우리 주문사(奏聞使)가 조정을 하직하고 물러간 후 이과급사중(吏科給事中) 위대중(魏大中)이 우리나라 일을 들어 소(疏)를 올린 일이 있다 하기에, 제독외랑(提督外郞)에게 부탁하여 그 원본을 구해 보니, 그 대략에,
“예의(禮儀)는 명분보다 중함이 없고 명분은 분의(分義)보다 중함이 없으며, 분의는 또 군신(君臣)보다 중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선국 이종(李倧 인조(仁祖))은 그 나라의 어지러운 틈을 타서 임금을 폐하고 그 자리에 올랐으니, 명분이 어디 있습니까? 오직 저들이 해외에 멀리 떨어져 있으니 죄를 묻는[問罪] 군사를 일으킬 필요는 없으나, 저 야만들이 우리의 전장문물(典章文物)을 본받아 다만 한 장의 무무(貿貿)한 문서로써 문득 구중(九重)의 조서(詔書)를 얻으려 하니, 이는 아마도 간사한 자에게 상을 주어 배반함을 가르치는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나라의 감결(甘結)에 이미 밝혀졌다고 한다면 이러한 감결은 과연 온 나라의 여론에서 나온 것인지 또는 권신(權臣)의 소매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당당한 천조(天朝)에서 이적(夷狄)에게 속임을 당했다면 장차 만세(萬世)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중략)......만일 우리나라의 정사가 다스려지고 병력(兵力)이 강대하여 요동을 회복한다면 저 조그만 조선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는 만세의 전례(典禮)에 관계된 바요 시사(時事)가 분요하여 안정되지 않았으니, 요동을 평정한 후에 사신을 보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조정의 의론이 일치되지 않았으니, 우리의 볼 일이 지극히 염려스럽다.】
▶무무(貿貿) : 교양(敎養)이 없어 말과 행동이 서투르고 무식함. 경솔함. |
홍익한은 인조의 책봉을 받아내는 일이 험난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11월 22일.
【맑음. 예부 상서가 출사(出仕)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들이 곧 찾아가 정문(呈文)을 올리니, 상서 임요유(林堯兪)가 보고 나서 말하기를,
“요동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조사(詔使)를 보내어 봉전(封典)을 준허하는 것이 상국의 본의로서, 벌써 작년에 조정의 의론이 결정된 일인데, 그대들이 어찌 다시 와서 번거롭게 하오.”
하므로, 곧 표정로를 시켜 고하기를,
“홍무(洪武) 이래로 봉전(封典)이 있으면 곧 조사(詔使)를 보내어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반사(頒賜)하였는데, 지금은 봉전과 조사 보내는 것을 두 사건의 별다른 규례로 취급하니, 열성조(列聖朝)의 전례(典禮)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마침 요동의 일로 변경이 소요하니, 책사(冊使)를 보내어 봉전을 완결 짓는 것이 하루가 급합니다. 그래서 온 나라 백성의 여망(輿望)에 의하여 다시 바닷길을 건너와 은전(恩典)을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오니, 원컨대 노야(老爺)는 조종조(祖宗朝)의 전례(典禮)에 의거하여 속히 복제(覆題)하여 고명(誥命)을 완결 짓게 하여 주소서.” 하니,
상서가 매우 못마땅한 기색을 지으면서,
“상의하여 조처하겠소.”
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나가 버렸다. 이에 의제사(儀制司)에 찾아가 또 정문을 올리고 간청하였는데, 대답하는 바가 또한 여전하였다. 우리들이 반복하여 간곡히 진달하니, 낭중(郞中) 주응기(周應期)가 부드럽게 대답하기를,
“대당(大堂)의 비하(批下)를 기다려 조처하겠소.”
하므로, 부득이 물러 나왔다.】
▶홍무(洪武) : 중국 명나라의 초대 왕인 홍무제 주원장, 즉 명 태조의 연호(1368 ~ 1398년). ▶대당(大堂) : 관아(官衙)의 우두머리. |
11월 24일.
【새벽에 상사, 부사와 함께 정문을 지어 서쪽 장안문(長安門) 밖에 나아가 재신(宰臣)들이 조정에 들어오는 길목에서 기다리니, 고병겸(顧秉謙)ㆍ주국정(朱國禎)ㆍ주연희(朱延禧)ㆍ위광미(魏廣微)가 차례로 들어왔다.
이에 정문을 올리니, 여러 각로(閣老)가 모두 교자에서 내려 손을 모아 읍하고 서서 펼쳐 보므로, 표정로를 시켜 책례(冊禮)에 대해 간청하니, 손을 들어 면유(勉諭)하기를, “그대의 말을 잘 알았으니 오늘 회의에서 상의하여 처리하겠다.” 하고 자못 받아들이는 기색이 있었다. 주국정은 여러 각로들 가운데서도 풍채가 가장 훌륭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전후 사정을 소상히 물으므로, 우리들이 꿇어앉아 낱낱이 진달하니, 귀를 기울여 정성껏 듣고 돌아갔다.
그날 저녁에 내각(內閣)에서 예부에 지시하기를, “오늘 내각에 들어오는 길에 조선에서 온 배신을 만났는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내려 봉전을 완결지어 줄 것을 품(禀)하였으니, 예부에서 속히 복제(覆題)를 완결 지으라.” 하였다. 각리(閣吏)가 와서 희전(喜錢)을 구하거늘 곧 약간의 은자와 인삼을 주어 보냈다.】
▶면유(勉諭) : 타이르다. |
나라와 나라 간의 대등한 외교가 아닌 구걸이었다. 조선의 국사(國使)가 이런 대접을 받았다. 사실 명나라 입장에서는 후금으로 인하여 자신의 나라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는데 조선의 왕을 책봉하는 것은 우선순위에도 없는 일이었다. 사세를 모르는 조선은 여전히 명나라에 사대(事大)하는 일에 충실했지만 명나라는 사소(事小)하는 도리를 잊어버렸다. 명나라는 망해서 마땅했다.
그 후로 뇌물을 써가며 오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월 21일이 되어서야, 명나라 황제의 조서(詔書)가 내려졌다. 책사(冊使)는 3월 20일에 출발하기로 택일되었다.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오직 조선국은 대대로 충성을 바쳐, 매양 즉위 초에 으레 봉작(封爵)을 청하였으니, 이는 감히 임의로 천단하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황조(皇朝)께서 일찍이 그대 나라의 전왕(前王) 이혼(李琿)을 책봉하였는데, 뜻밖에도 저번에 덕을 잃어 폐위(廢位)되었고, 소경왕비(昭敬王妃) 김씨가 나라의 정상을 주달하여 그대 이종(李倧)으로 대통(大統)을 계승하고 고명(誥命)을 내려 동방을 진무(鎭撫)케 함이 마땅하다 하므로, 이제 특별히 그대를 조선 국왕으로 봉하여, 명(命)이 천조(天朝)에서 나오고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였으니, 그대의 작위와 강토가 이로부터 소속한 데가 있게 되었다. 그대 나라의 모든 신민(臣民)들은 짐이 신중히 선정(選定)한 뜻을 본받아 임금을 보좌하고 정사를 닦아 변방을 굳게 하고 오랑캐를 방비하여 짐의 요동을 수복하는 대업에 적극 협조하게 하라. 나 한 사람이 그대 새 임금에게 사사로운 뜻을 둔 것이 아니다. 이에 밝게 고시(告示)하노니 모두 소상히 알게 할지어다.”
하였다.】
▶이혼(李琿) : 광해군 ▶소경왕비(昭敬王妃) 김씨 :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이종(李倧) : 인조(仁祖) |
사신 일행은 다시 뱃길을 거쳐 4월 2일, 조선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에 상사(上使)의 배가 가도(椵島)의 항구에 당도하였고, 진시(辰時)에 여러 배가 일제히 선사포(宣沙浦)에 다다라 구사일생으로 고국 땅을 다시 밟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신 일행에 대한 탄핵 소식이었다. 사행을 떠날 때에 수종(隨從)을 많이 거느렸고 군관들이 도처에 폐단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홍익한은 “대계(臺啓)의 논박을 입은 이상 공무를 집행할 수 없고, 또 관가의 공궤를 허비할 필요가 없으므로 다음 날 아침, 말을 세내어 타고 지레 돌아왔다.”고 적었다.
▶대계(臺啓) : 관리의 잘못을 지적하여 유죄임을 밝히려고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계사(啓辭). |
정사 이덕형과 부사 오숙은 선사포에 도착한 이후 소지품을 수색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일행 30여명이 배 문제로 함께 오지 못한 것을 두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라며 잡아다 국문해야 한다는 간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결국 의금부에 하옥되어 신문을 받고서야 풀려났고 동행했던 역관들은 중도부처 되었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조천항해록(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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