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서울의 옛 이름 - 한성(漢城)

從心所欲 2020. 11. 28. 11:53

[전(傳) 김수철(金秀哲), <한양(漢陽) 전경(全景)>, 지본담채, 57.6 x 133.9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그림 중에서 아마도 집을 이렇게 많이 그린 그림은 없을 듯하다. 일명 <傳金秀哲筆京城圖>로도 불리는 이 그림은 조선 말기의 중인 출신 화가인 김수철(金秀哲)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수철의 생몰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862년의 관지가 있는 작품이 남아있어 대강의 활동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1800년대 중반의 한양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오른쪽 멀리 도봉산으로부터 삼각산, 백악산, 인왕산까지 이어지는 연봉을 배경으로 남산에서 내려다 본 한양의 도성 안을 모두 그렸다. 그러면서도 궁궐이나 관청에 특별한 비중을 두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도성 안을 민가로 가득 채운 점이 특이하다.

 

우리가 흔히 한양(漢陽)으로 알고 있는 조선시대 수도 서울의 정식명칭은 한성부(漢城府)이다. 한성부(漢城府)는 조선시대 서울의 행정구역 명칭이자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이기도 했다. 고려 때 한양부(漢陽府)로 불리던 것을, 태조 이성계가 1394년 수도를 옮기고 그 다음해인 1395년에 한성부라고 이름을 고쳤다. 그리고 1910년 경성부(京城府)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조선시대 내내 그 이름이었다.

 

고려시대의 한양부(漢陽府)라는 명칭은 신라 시대의 ‘한양군(漢陽郡)’이라는 지역 명에서 가져온 것이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남경(南京)으로도 불리기도 했지만 1300년대로 넘어오면서 다시 한양부(漢陽府)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한양부는 그 중심이 조선시대의 4대문 안이 아닌 경기도 양주지역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새롭게 궁궐을 지으면서 그 중심이 서울의 강북지역으로 옮겨오게 된 것이었다.

 

한성(漢城)은 멀리 북한산(北漢山), 관악산(冠岳山), 수락산(水洛山), 덕양산(德陽山)을 외사산(外四山)으로 하고, 백악산(白岳山), 목멱산(木覓山), 낙타산(駱駝山), 인왕산(仁王山)을 내사산(內四山)으로 하는 개념에서, 내사산을 연결하는 성벽을 쌓았다.

 

[『광여도(廣輿圖)』 속의 도성도, 18세기 후반, 서울대 규장각]

 

1396년 1월부터 시작한 도성(都城) 축조공사는 9월에 완성하였다. 높고 험한 곳은 돌로 쌓고, 낮고 평탄한 곳은 흙으로 쌓아 석축과 토축을 혼용하였었다. 그리고 세종4년인 1422년에 토축 성곽을 모두 석축으로 개축하고 성곽의 둘레도 확정지었다. 당시 실측한 성곽의 길이는 영조척(營造尺)으로 총 59,500척이었다.

▶영조척(營造尺) : 조선시대 목공과 건축에 사용하던 자. 목공척(木工尺)이라고도 한다. 1척은 30.65cm.

 

영조척의 기준에 따라 이 길이는 18,127m라는 주장도 있고 18,576m라는 주장도 있다.

이 성의 규모가 어떤지는 현대의 감각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특히 만리장성이 워낙 귀에 박힌 터라 이 성의 규모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성호 이익(李瀷,1681 ~ 1763)은 『성호사설』 천지문(天地門) 중 도성(都城)편에 이렇게 적었다.

 

【맹자(孟子)는, “3리(里)의 성(城), 7리의 곽(郭)”이라 하였다. 성을 굳게 지키려 한다면 넓은 것은 매우 곤란하다. 한퇴지(韓退之)가 말한 것처럼, “줄을 맞잡고 잡아당기면 반드시 끊어지는 데가 있다.” 한 것은 좋은 비유다. 줄이 아무리 질기다 할지라도 십척, 백척 정도로 긴 것을 가지고 잡아당긴다면 끊어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서울의 성이나 고려의 개성(開城)은 전후하여 천 년 가까이 되는 동안 외부에서 적의 침입을 당했을 때에 한 번도 앉아서 지켜본 적이 없었으니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송(宋)의 변도(汴都) 같은 곳은 튼튼하고 완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까지 모두들 이강(李綱)을 비난하고 충사도(种師道)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있으니,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야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령 성이 견고하고 병졸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그 성안에 사는 사람들의 8~9할이 축적된 식량이 없고 아침에 벌어 저녁에 먹고, 오늘 마련해야 내일을 살 수 있는 사정이라면 그 많은 남녀노소를 정부가 모두 식량을 공급하여 먹여 살릴 수 있겠는가? 반드시 며칠을 가지 못해서 굶주림과 아우성이 일어날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성문을 열고 적을 맞아들이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마침내 성을 도저히 지켜내지 못하게 된 뒤에 가서야 비로소 서울을 버릴 것을 계획한다면 임금을 적에게 그냥 내어 주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랴?

종전의 예로 보면, 난리를 만나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른 때에 더러는 성문을 닫아버리어 남아 있는 백성들을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또 아무 세력도 없는 대신을 임명하여 유도대장(留都大將)이라고 해 놓으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나라에서 내버리는데 저 병졸도 없는 외톨박이가 무슨 재주로 허물어진 판국을 수습하겠는가?

당 명황(唐明皇)이 피난길을 떠날 때에 백성들을 모두 주작교(朱雀橋)까지 건네주었으니, 지난 일은 그만두고라도 백성을 건네주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게 된 것이다. 당(唐)이 망하지 아니한 것은 당시의 선심을 베푼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려 때 홍두적(紅頭賊)의 난에 공민왕(恭愍王)이 복주(福州)로 피난을 가면서 경성(京城)의 부녀자와 늙고 어린 사람들을 먼저 성 밖으로 내어 보냈으니, 후대에 성문을 닫고 자물통을 채운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겠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처음에 도성(都城)이 지나치게 큰 것을 문제 삼지 않은 것은 평화시에 안팎을 방호하기 위한 것이요, 비상시에까지 결사적으로 여기를 지키고 버리지 않겠다는 계책이 아니었을 것이다.”고 하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성(城)’은 안쪽에 쌓은 내성(內城)을 가리키며, ‘곽(郭)’은 바깥쪽에 쌓은 외성(外城)을 가리킨다. 삼중의 성곽인 경우에는 맨 안쪽을 내성, 다음을 중성, 바깥을 외성이라 하고, 도성(都城)의 경우에는 왕궁과 관아를 둘러싼 안쪽의 성을 왕성 또는 재성(在城)이라 하며, 그 바깥쪽을 나성(羅城)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한성은 나성인 것이다.

그 나성인 곽을 맹자는 7리라고 했다는데, 10리를 4km로 본다면 2.8km이고 5km로 쳐도 3.5km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익은 18km가 넘는 한성(漢城)은 너무 커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는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경복궁의 둘레는 약 1만 척으로 3.3km 정도이다.

 

한성부는 동서남북과 그 가운데의 중부(中部)까지 5부(五部)로 나누고 모두 52개의 방으로 나누어서 관할하였다. 지금으로 치면 5개 구(區)와 52개 동(洞)인 셈이다.

 

[김정호제작 『동여도(東輿圖)』 속의 도성도(都城圖)]

 

한성의 인구는 세종10년인 1428년에 11만이라고 했다. 그러다 왜란 중이던 1593년에는 4만 명이 안 되는 숫자로 급감하였다. 병자호란까지 넘긴 1657년에는 8만 명을 넘어서고, 그로부터 불과 10여년만인 1669년에는 19만 명을 넘어설 정도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조선 후기인 정조 4년 1780년에는 38,742호에 201,070명의 부민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어, “4만 호의 기와집이 빽빽이 들어서서 흡사 크고 작은 고기들이 잔잔한 파도를 누비는 것 같다”는 박제가의 시 구절이 허황된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공식적 통계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 두 배에 가까웠을 것이란 추정도 있다.

 

한성부는 도성 내 뿐만 아니라 성저십리(城低十里)라고 하여 성 밖 십리이내지역까지 관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성 밖에는 인구가 많지 않았고 거주지역도 일부지역으로 국한되어 있었다. 서대문, 서소문, 동대문의 3개 문 밖에만 마을이 형성된 정도였다.

그러다 18세기 후반에 상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육상과 수운을 이용한 도성 외곽의 상품유통의 거점인 용산, 서강, 마포, 서빙고, 두모포(豆毛浦) 등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동국여도(東國輿圖)』 속의 도성도, 19세기 전반, 서울대 규장각]

 

[도성도의 서대문과 남대문 외곽지역]

 

위 도성도를 보면 남대문과 서대문 외곽의 서남부 지역으로 시가지가 확장된 것을 볼 수 있다. 한강 변에도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나타냈다. 이 도성도에서는 기와집을 푸른색으로, 초가집을 노란색으로 표시하였다. 도성 안은 푸른색의 기와집이 많이 표시됐지만 숭례문, 소의문(昭義門), 돈의문(敦義門) 바깥 지역에도 기와집이 즐비한 것이 눈에 띈다.

▶소의문(昭義門) : 속칭 서소문(西小門),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西大門)

 

18세기 후반 용산과 마포의 인구는 약 15,000 명으로, 당시의 대구인구보다 많고 전주보다는 조금 적은 규모였다고 한다. 서강의 인구는 약 6,000명으로 안동이나 경주와 거의 비슷했고 두모포가 약 4,500명, 그리고 서빙고와 동빙고, 송파, 누원(樓院), 말죽거리, 과천이 3,000명 부근의 인구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인구 5,000이상의 도시가 전국에 49개밖에 없었고 10만 이상은 서울이 유일하였다. 개성과 평양이 겨우 2만을 넘었으며, 만 명 이상의 도시가 상주, 전주, 대구, 충주, 의주, 진주의 6개 도시에 불과 하였다고 한다. 15,000의 마포 용산의 인구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규모였던 셈이다.

사실상 한성은 조선시대 전국 유일의 도시였다.

▶두모포(豆毛浦) : 성동구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에 있었던 포구

▶누원(樓院) : 도봉구 도봉동과 의정부시 경계에 있던 마을

 

한성부의 치안의 역사는 좀 복잡하다. 초기에는 주로 절도, 난동,·풍기 등을 단속하는 치안기관인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가 주로 담당하였지만 한성부와 의금부 등도 이에 관여하였다. 그러다 포도청이 설치된 이후에는 포도청과 아울러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군문(軍門)에서도 담당하였다. 포도청은 좌포도청(左捕盜廳)과 우포도청(右捕盜廳)이 설치되어, 좌포도청은 한성부의 동, 남, 중부와 경기좌도 일원을 담당하였고, 우포도청은 한성부 서부, 북부와 경기우도 일원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경기도 일원은 제외되고 한성부 관할구역의 치안만을 담당하였다. 또한 훈련도감(訓鍊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禦營廳)의 3군문(三軍門)도 한성부 치안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전(傳) 김수철(金秀哲), <한양(漢陽) 전경(全景)> 중 오른쪽 부분]

 

[전(傳) 김수철(金秀哲), <한양(漢陽) 전경(全景)> 중 오른쪽에서 2번째 부분]

 

전(傳) 김수철(金秀哲)의 <한양(漢陽) 전경(全景)>은 이런 한성의 모습을 과장과 왜곡 없이 가늘고 고른 필선으로 수만호의 집들을 성실히 그려 넣었다. 응봉 아래 자리 잡은 창덕궁은 중층의 인정전仁政殿 건물만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오른쪽 끝 중간부분에 원각사(圓覺寺) 탑도 보인다.

 

[전(傳) 김수철(金秀哲), <한양(漢陽) 전경(全景)> 중 오른쪽에서 3번째 부분]

 

백악산 아래 경복궁 터는 풀숲이 우거져 있어 1868년 경복궁 중건 이전의 경관임을 짐작케 한다. 군데군데 안개에 가려진 부분은 옅은 선으로 그리고, 화가가 바라보는 지점인 남산에 가까운 집들은 짙은 선으로 크게 부각시켜 원근의 거리감도 살렸다. 멀리 인왕선 능선에 성벽을 표시했다.

 

[전(傳) 김수철(金秀哲), <한양(漢陽) 전경(全景)> 중 왼쪽 부분]

 

유배에서 풀려난 김정희가 1849년에 제자들의 지난 십년간 공부를 점검해준 내용을 기록한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는 이한철, 허련, 전기와 함께 김수철의 이름도 올라있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원형백과(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옛 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문사(博文寺)  (0) 2020.11.30
조선신궁(朝鮮神宮)  (0) 2020.11.29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6  (0) 2020.11.27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5  (0) 2020.11.26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4  (0) 2020.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