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박문사(博文寺)

從心所欲 2020. 11. 30. 12:51

지금 모두가 공원으로 부르고 있는 장충단은 공원으로 부르면 안 될 이름이다.

장충단(奬忠壇)은 충성됨을 기린다는 의미다. 일본공사 미우라가 주동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때에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장졸들을 기리기 위한 제단이었다. 을미사변 5년 뒤인 1900년에 고종의 명에 의하여 어영청(御營廳)의 분영(分營)인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사당을 짓고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뒤이어 을미사변 때 순사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순절한 문신들도 배향되었다.

이런 곳이 일제의 입장에서 눈에 거슬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일제는 1910년에 이 사당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1919년에는 이곳 일대에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고는 장충단공원이라 불렀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든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지었다. 박문사(博文寺)다. 박문(博文)은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사찰이 자리 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불렀다. 춘무(春畝)는 이토히로부미의 호다. 이 절은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되었다.

조선신궁으로 남산의 서쪽을 파헤치고, 동쪽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로 파헤친 것이다.

 

[박문사]

 

[박문사]

 

조선총독부의 <시정이십오년사(施政二十五年史)>에는 '조선 초대총감 이토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위해 기획되었다'고 그 건립 이유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 절을 짓기 위하여 사용된 재료들이 기가 막힌다. 총독부 청사를 짓느라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던 광화문 양옆의 담장 석재를 가져다 박문사의 담을 쌓았고, 경복궁 선원전과 그 부속 건물을 옮겨다가 박문사 건물로 삼았다. 또 지금의 조선호텔과 원구단 자리에 있던 남별궁의 석고단을 덮고 있던 석고각을 해체해 박문사의 종 덮개로 사용하였다. 절의 정문은 1932년 당시 이미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경성중학교로 변해버린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가져다 썼다.

 

 

[조선총독부 공사 현장. 1916년 6월 토목공사를 착공하여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의 ‘시정 기념일’인 10월 1일에 맞추어 1926년 준공하였다]

 

[1951년에 촬영한 경복궁 전경. 일제는 조산물진공산회를 준비하면서 경복궁 내 4,000여칸의 건물을 헐어 민간에 매각하였다. 그 황폐화의 흔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박문사의 위치는 지금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거나 그 근처로 보고 있다. 신라호텔과 장충단 사이에 장충단로라는 길이 있어 남산과는 별개의 지역인 것처럼 착각이 들게 하지만, 원래는 이곳까지도 모두 남산자락이었다.

 

1939년에는 이곳에서 이토히로부미를 포함하여 이용구ㆍ송병준ㆍ이완용 등을 기리는 ‘일한합병 공로자 감사 위령제’가 열렸다. 경상도 상주 출신의 종교인이자 정치가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이용구(李容九)의 아들인 이석규(李碩奎)가 제국주의 일본의 우익 조직인 흑룡회와 함께 개최한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 약 1천여 명이 참석하였다.

 

[남산에 지어진 조선통감부. 통감부는 1906년 2월 설치되어 1910년 8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조선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던 식민 통치 준비기구. 현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앞]

 

이석규는 비상시국에서는 종교단체가 필요 없다며 1938년 11월 아버지가 창시한 시천교(侍天敎)를 정치단체로 개편하여 대동일진회(大東一進會)를 조직한 인물이다. 대동일진회는 창씨개명을 강권하는 창씨상담실을 운영하는 것을 비롯하여 친일 시국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대동남국(大東國男)이라는 이름을 쓰며 살았고, 자신의 아버지를 변호하는 책을 내기도 했다.

 

소설가와 언론인으로 활동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흥사단에 입단하기도 하였다. 1937년 6월 흥사단 계열의 민족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1938년 11월 이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하였다. 1940년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역시 매일신보에 쓴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였다.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최린(崔麟)은 1919년 3월 조선민족대표의 한명으로 3·1독립선언에 참여해서 일약 사회적 지도인사로 부상한 인물이다. 1929년 천도교 교단 최고직인 도령(道領)에 올랐다. 1936년 11월 ‘조선인 징병제 요망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를 촉구한 것을 비롯하여 해방 때까지 끊임없이 친일 활동으로 일관했다.

 

윤덕영(尹德榮)은 대한제국의 관료를 지내면서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변치 않는 친일 행각으로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중추원 부의장까지 지냈다. 충청남도와 경기도 파주, 안성에 큰 땅을 소유했고, 1933년 기준으로 재산 100만원 이상을 가진 대부호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합병기념조선사진첩(倂合記念朝鮮寫眞帖)> 속의 조선귀족 일본관광단(朝鮮貴族の內地觀光團). 왜국이 대한제국을 강점한 직후인 1910년 11월 3일, 조선귀족 부부관광단의 도쿄 방문 기념사진. 조선귀족의 작위 범위는 「조선귀족령」 제2조에 의하여 “이왕의 현존하는 혈족으로서 일본국 황족의 예우를 받지 아니한 자, 가문(門地) 또는 공로 있는 조선인에게 조선귀족을 수여한다.”라고 규정하였다. 민족연구소사진]

 

 

 

참고 및 인용 : 신라호텔 자리는 이등박문 추모 사찰터(권기봉, 2005.03.23, 오마이뉴스), 원불교대사전(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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