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부터 37세 까지의 남자 13명이 1년에 열두 번을 이렇게 모였다.
음력 정월 : 다리 밟으며 달구경하기.
음력 2월 : 높은 산에 올라 꽃구경하기.
음력 3월 : 한강 정자에서 풍취(風趣)있는 놀이하기.
음력 4월 : 성루에서 초파일 등(燈) 구경하기.
음력 5월 : 밤비에 더위 식히기.
음력 6월 : 흐르는 물에 갓끈 씻기.
음력 7월 : 청풍산 산기슭에서의 수계(修稧).
음력 8월 : 국화 핀 동산에서 모임하기.
음력9월 : 산사에서의 그윽한 약속하기.
음력 10월 : 눈 속에서 마주앉아 고기 구워먹기.
음력 11월 : 매화나무 아래서 술자리 열기.
음력 12월 : 섣달그믐에 밤새우기.
그리고는 모일 때마다 모인 사람 모두가 시를 지었다.
시를 잘 지어 연이어 세 번 장원하는 사람은 예주(醴酒) 한 병을, 연이어 세 번 꼴찌 하는 사람은 벌주(罰酒) 두 병을 다음 모임 때 바쳤다.
이것이 18세기 중인층 여항문인 시사 중 가장 큰 규모였던 옥계시사(玉溪詩社)의 시작이었다. 옥계(玉溪)는 인왕산에 있던 계곡이다. 1786년 7월 16일 옥계 일대에 살던 중인층 인물 13명이 옥계 청풍정사에 모여 이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 모임은 시문(時文)을 즐기기 위한 모임이었기에 서로의 나이 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15세의 노윤적(盧允迪)이란 인물이 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규장각 서리로 근무할 정도로 사회에서 성인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모임이 처음 시작될 때의 13인 중에는 규장각 서리가 4명이나 되었고, 나중에는 7명까지 늘어났다.
이 모임은 처음에는 옥계시사(玉溪詩社)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1791년 모임의 일원인 천수경(千壽慶)이 옥계에서 서북쪽으로 십리 떨어진 송석원(松石園)으로 이사한 뒤에는, 천수경을 중심으로 시사가 재결성 되면서 이때부터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로도 불리기 시작하였다.
천수경은 중인 자녀들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이었다. 당시 위항(委巷)의 부호들이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천수경을 다투어 초청할 정도로 인기가 있어 가르치는 학생이 50∼60명이나 되어 반을 나누어서 가르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서당에서 유학과 한시문(漢詩文)을 가르쳤다. 어쩌면 노윤적도 천수경에게서 배운 제자 중의 하나였을 지도 모른다.
이들은 옥계시사를 결성한 지 3개월만인 그 해 10월에 자신들이 지은 시를 모아 「옥계십이승첩(玉溪十二勝帖)」을 엮었다. 13명이 12달의 행사를 주제로 각 한 편씩 지어 모두 156편의 시를 실었다. 아울러 4점의 그림도 함께 넣어 시화첩을 만들었다. 이는 ‘동인(同人)들이 정원에서 모이는 모습이나 산수 속에서 노니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내어 이야깃거리로 삼는다’는 시사의 규례에 따른 것으로, 그림의 주제도 모임의 주제를 따랐다.
그림은 역시 시사의 일원이었던 임득명(林得明, 1767 ~ 1822)이 그렸다. 임득명은 당시 스무 살로 규장각 서리(書吏)였다.
가교보월(街橋步月)은 정월의 ‘다리 밟으며 달구경하기’이다. 같은 주제의 시 13편 중 천수경(千壽慶)의 시이다.
【대보름은 아름다운 명절이라서 술에 취하여 서로를 부르네.
달빛이 대낮처럼 밝으니 봄놀이가 오늘밤부터 시작되네.
노니는 발끝 티끌이 큰 길을 맑게 하고 무리들의 악기 소리가 광통교에 들끓는데,
통금도 없는 밤에 맘껏 이야기하니 기쁜 마음이 갑절이나 더해라.】
등고상화(登高賞花)는 음력 2월의 ‘높은 산에 올라 꽃구경하기’이다. 13편의 시 가운데 김호문의 시이다.
【서울의 봄빛이 좋아서 꽃과 버들을 구경할 만해라.
산 오를 짚신을 급히 꿰어 신고 명아주 지팡이까지 짚고 나섰네.
저녁바람이 숲속의 내를 거두어가니 필운대 눈앞이 환히 트이네.
꽃구경이 몇 날이나 가랴. 우리 무리들이 날마다 찾아다니세.】
산사유약(山寺幽約)은 음력 9월의 ‘산사에서의 그윽한 약속하기’이다. 지금의 국립인쇄소라 할 감인소(監印所)의 사준(司準)이었던 장혼(張混)의 시이다. 사준(司準)은 교서관(校書官)에 소속된 종8품 잡직이다.
【산 빛과 향내가 십리에 뻗쳤는데 붉은 나뭇잎 사리로 은은히 외로운 절 보이네.
골짜기 어구까지 종소리가 저녁구름 사이로 들리고 숲속의 향내는 푸른 하늘로 흩어지네.
돌문과 노을달이 너무나 좋아 맑은 가을 풍경이 한 가지 운치만은 아닐세.
절간의 몇 스님이 막걸리 들고 찾아와 먼 길 오느라 애썼다며 밤새도록 취하게 했네.】
설리대적(雪裏對炙)은 음력 10월의 ‘눈 속에서 마주앉아 고기 구워먹기’이다.
규장각 서리로 당시 18세였던 김태한(金泰漠)의 시이다.
【눈 쌓인 산집 창가에서 촛불 잡고 마주앉아
화로를 껴안고 술을 데우니 그윽한 정태(情態)가 많아라
술에 취해 차가운 매화에게도 말을 붙이니
우리 무리들을 비웃지 마시게. 미쳐서 견디지 못한다고.】
이들은 정기적인 모임 외에도 거의 매일같이 천수경의 거처인 송석원에 모여 시문을 즐겼으며 시사는 1818년 천수경이 사망할 때까지 활발히 이어졌다.
참고 및 인용 : 웃대중인전(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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