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한은 9월 17일 창읍현(昌邑縣)으로 가는 길에, 과거에 급제하여 새로 벼슬을 얻어 북경으로 올라가는 왕응치(王應豸)라는 인물의 행차를 본 일이 있었다. 말단미관에 불과한 그의 행차가 심히 성대함을 보고 홍인한은 중국이 사대부를 우대하는 것을 알겠다고 감탄하였다. 홍익한 자신도 그 해에 치러진 정시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왔기에, 그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일에 창락현(昌樂縣) 남관(南關)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길에서 보았던 왕응치(王應豸)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그날의 일을 홍익한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곳에서 한 수재(秀才)를 만났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관정(觀政) 왕응치(王應豸)의 아들인데 내주(萊州)에서 아버지를 따라 같이 왔습니다.”
하고, 나에게 묻기를,
“공이 국왕의 명을 받들고 상국(上國)에 사행(使行) 왔으니 체통이 매우 중한데, 옥교(屋轎)를 버리고 말에 올라 초졸(草卒)한 행장이 시인 묵객(詩人墨客)과 같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불초한 소생이 동해 가에 있어 일찍부터 중화(中華)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이제 사행의 열에 참여하여 경전(經傳)과 사책(史冊)에서 상상하던 바를 오늘날 목도하게 되었으니, 내가 말에 올라 채찍을 드날리며 강산풍월(江山風月)로 벗을 삼고 온갖 민속(民俗)을 구경하여 훗날 생소한 손이 되지 않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소? 내 또 어찌 부녀자의 행색과 같이 보교(步轎)를 타고 장막에 내 형체를 숨기고 내 안계(眼界)를 가리겠소? 마땅히 긴 채찍과 쾌활한 준마를 타고 내키는 대로 달려 혹 이름난 화원(花園)을 구경하고 혹은 승지 명루(勝地名樓)에 오르며 혹은 선현의 유적을 찾아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소?”
하니, 수재가 찬탄하며 말하기를,
“공의 말이 옳으니, 비록 계자(季子)가 풍악을 듣고 그 나라의 정사를 아는 것과 자장(子長)이 멀리 유람한 것도 이보다 지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내가 북경에 들어가 옥하관(玉河館)에서 공을 기다릴 것이니, 공은 마땅히 금낭(錦囊)에 간직한 시를 내보여 이 저속한 안목을 맑게 씻어 주십시오.”
하며 재삼 간곡히 부탁하고 작별하였다.】
▶수재(秀才) : 장가를 들지 않은 남자를 높이어 이르는 말 ▶계자(季子) : 계자(季子)는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넷째 아들로,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어질었다. 왕위 물려받기를 사양하여 연릉(延陵)을 봉하여 연릉계자(延陵季子)라 하였다. 여러 나라에 사행(使行)을 다녔으며 일찍이 노(魯)나라에 사행 가서 주(周)나라 풍악을 들은 일이 있었다. ▶자장(子長) : 자장(子長)은 사마천(司馬遷)의 자이다. 일찍부터 멀리 유람하는 것을 즐겼다. |
홍익한이 호연지기를 나타내는 말로 상대방의 찬탄을 얻어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비참한 생각이 들었을까 싶다. 명색이 일국의 사신인데, 경비를 아끼기 위하여 옥교 대신 말을 빌려 타고 가야했던 조선과 자신의 처지에 많은 자괴감이 들었을 것 같다.
그림 위쪽 산 위에 조그맣게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사당인 이제묘(夷齊廟)가 표시되어있다. ‘공손홍별업(公孫弘別業)’은 한무제(漢武帝) 때의 정승이었던 공손홍의 별장을 말한다. 그는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무명 이불을 덮고 현미밥을 먹어 겉으로는 검소하고 근신하는 듯했으나 실은 간사한 소인이었다고 한다.
한무제 때 해학과 풍자가 뛰어났던 동방삭(東方朔)이 태어난 곳이라는 표시도 보인다.
9월 20일에는 청주(靑州) 익도현(益都縣) 남관(南關)에서 유숙하였다.
청주 성 밖에 제나라의 공족(公族)이었던 맹상군(孟嘗君)의 옛 집이 있었다. 맹상군은 위나라의 신릉군, 조나라의 평원군,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과 더불어 전국시대에 식객(食客) 3천을 거느려 명성을 떨친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의 하나였다.
북경까지 천리(千里)가 남았다.
9월 22일 장산성(長山城)에서 유숙했다. 제 나라 때 벼슬을 거절하고 남의 집 정원에 물 대주는 일을 하고 살았던 선비 진중자(陳仲子)의 옛 마을이 있다고 표시했다.
9월 23일 홍익한은 추사현(雛師縣)에 머물렀다고 적었는데 그림에는 추평현(雛平縣)으로 적혀있다. 추사현은 추평현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익한은 도착한 날 그곳의 유명한 정원(庭園)을 구경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림 오른쪽 아래에 액자 모양 사각형 안에 그 정원을 그렸다.
홍익한은 24일 길을 가면서 보고 느낀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아침 식사 후에 비가 그쳐서 길을 떠났다. 범 문정공(范文正公)이 독서하던 곳을 지났다. 앞에는 수광호(綉光湖)가 있어 넓이가 2, 30리나 되는데, 갈매기, 거위, 해오라기, 매 등이 호수 위에서 오락가락하고 뒤에는 장백산(長白山)이 있어 운하(雲霞)와 초수(草樹)가 그 남쪽에 뒤덮여 있다. 위에는 예천사(醴泉寺)가 있는데 범희문(范希文)이 이 절에서 죽을 마시면서도 은 구덩이를 초개와 같이 여겼으니, 당시 상신(相臣) 가운데도 그 지조가 빙설(氷雪)과 같았다.】
▶범 문정공(范文正公), 범희문(范希文) : 범중엄(范仲淹). 북송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탁월한 문학가로 "천하의 근심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 [선우후락(先憂後樂)]“라는 명언을 남겨 후대 사대부들이 잠언(箴言)으로 삼게 했다는 인물이다. 주희도 범중엄을 유사 이래 천하 최고 일류[天下第一流]의 인물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
9월 26일 제남부(濟南府) 성 남쪽에 있는 정각사(正覺寺)에서 유숙하였다.
27일은 천불산(千佛山)을, 28일에는 역산서원(歷山書院)을 찾았는데 그 안에 순(舜)임금의 소상(塑像)리 안치되어 있었다. 역산(歷山)은 순임금이 밭을 갈았다는 곳이다.
28일, 길을 떠나 제하현(濟河縣)으로 가는 길에 화불주산(華不注山)을 다녀왔다.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푸른 봉우리가 부용 같구나.[綠翠如芙蓉]”라고 읊었다는 곳이다.
그림 중앙의 ‘태산진향(泰山進香)’이라 쓰인 가마 행렬에 대하여 홍익한은 이렇게 기록했다.
【‘태산진향(泰山進香)’이라 쓰인 금자(金字) 소첩(小帖)을 머리에 쓰고 남녀노소가 떼를 이루어 길에 줄을 잇고, 불경 외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조그만 채두(綵兜)와 금여(金舁)를 어깨에 메고 등에 졌는데, 그 위에 조그만 불상(佛像)을 새겨 네 귀에 안치하고 오채(五彩)로 장식한 것이 지극히 정교했으며, 수놓은 깃대와 비단 깃발을 손에 받들고 풍악 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괴상히 여겨 물으니, 산서(山西)와 산동(山東)의 풍속이 가을 추수 후에는 으레 태산에 향을 올려 복을 빈다고 하였다.】
28일에는 제하현(濟河縣)에서 유숙하고, 29일에는 우성(禹城)에서 유숙했다.
여기까지가 전국시대 제(薺)나라 땅이었다.
참고 및 인용 : 조천항해록(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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