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행에는 여섯 척의 배와 사백 여 명의 격군(格軍)이 동원되었다. 3척은 각각 정사, 부사, 서장관의 배인 기선(騎船)이고 나머지 3척은 봉물을 실은 복선(卜船)이었을 것이다.
8월 4일 선사포를 출발한 배는 포구를 벗어나기 무섭게 비바람이 크게 일어 결국 닻을 내리고 항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오후에 다시 출항하여 새벽에 가도(椵島)에 도착하였다. 가도는 철산 선사포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목장을 설치하여 감독관을 두고 말을 사육하던 곳 중의 하나였다.
▶격군(格軍) : 곁군의 취음(取音)이다. 수참(水站)에 소속 되어 배를 부리는 등의 일을 하던 수부(水夫). |
당시 이곳에는 모문룡(毛文龍)이라는 명나라 장수가 명나라 군대와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후금에게 빼앗긴 요동지방을 회복하려고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명나라가 주둔시킨 군대였다. 모문룡은 조선에게 자신들과 합세하여 후금을 공격할 것을 요구하면서, 군량과 무기를 강요하였으나 조선은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로 난국을 피했었다.
그림에도 6척의 배가 정박한 섬 위에 ‘가도 모사유진처(椵島 毛師留鎭處)라고 적혀있다.
날이 밝은 후에도 풍랑이 계속되어 배가 뒤집힐 지경이라 계속 가도에 머물면서 저녁에는 해신(海神)에 제사까지 올렸다. 8일에는 당시 명나라에 의해 좌도독(左都督)으로 임명된 모문룡의 군문에 찾아가 현관례(見官禮)를 행하고, 모문룡은 사절 일행을 위하여 연회를 열어 주었다. 날씨가 안 좋아 출발을 못 하다가 10일에 그림 오른쪽의 사포(蛇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는데 이 날도 역시 풍랑이 심했다. 당시 변무주청사 일행은 뱃길 19일 동안에 무려 17번이나 해신에게 제사를 올릴 만큼 날씨가 험난했다.
▶현관례(見官禮) : 외국의 사신(使臣)이 도착했을 때 영접하는 관원들이 방문하여 인사하는 의식 |
당시의 뱃길은 선사포에서 중국 산동성의 등주(登州)까지의 뱃길이 3,760리였다고 한다.
육로로 가는 사행이 한양에서 북경의 조양문까지 3,100여리였던 점을 감안할 때, 위 그림에 표시된 뱃길은 훨씬 짧아 보이는데도 실제로 더 먼 거리를 항해한 것은 당시 조선의 선원들이 이 해로에 익숙지 않았던 때문이다.
8월 11일 새벽 사도(蛇島)를 떠나 녹도(鹿島)를 지난 뒤 황골도(黃鶻島) 앞바다에 다다라 정박하였다. 바람을 타고 하루에 600리를 간 것이다. 서장관의 배가 가장 먼저 도착하였고, 정사의 배는 밤 이경(二更)이 되어 도착하였지만 다른 배들은 뒤따라오지 못하였다. 여기서부터는 이미 중국 땅이었다.
그림 위에는 거리 표시가 있는데 녹도에서 석성도는 서남쪽으로 500리, 석성도에서 장산도는 남쪽으로 300리, 장산도에서 광록도는 서쪽으로 200리, 그리고 아직 그림에 나오지 않은 삼산도(三山島)까지는 서쪽으로 300리라고 적었다.
일행은 8월 12일부터 8월 15일 사이에 이 구간을 지나 광록도에 도착하였다.
맑은 날도 있었지만, 큰 풍랑이 일어 일행이 혼비백산을 하기도 하고 역풍이 불어 배를 되돌리기도 하였다.
홍익한이 쓴 「조천항해록」외에도 정사 이덕형의 이름으로 전하는 사행록(使行錄)이 있다. 「죽천이공행적록(竹泉李公行蹟錄)」이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이 기록은 한글 필사본으로, 현재 국립해양박물관이 두 권의 책 중에 1권에 해당하는 한 권만 소장하고 있다. 거기에 8월 12일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서방을 바라보니 홀연 구름이 하늘을 막고 비 잠깐 내리더니 무엇인가 또렷이 보이는데 한끝은 하늘에 다하고 한 끝은 바다에 드리웠으니 몸 크기 두어 아름이 되고 아래는 점점 작아 끝이 극히 가느다라니 몇 길이 되는지 알지 못하노라. 허리 위는 오색구름 속의 은은하게 비쳐 자세히 볼 길이 없고 다만 누런 광채 공중의 밝게 빛나고 금 같은 비늘이 상하에 번득이니 그 기이한 형상을 말로 형용치 못하노라.”
용오름 현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림 중의 용 그림은 이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그림에는 용머리처럼 그린 것이 두 군데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고래를 본 장면을 그린 듯하다.
“장산도라 하는 섬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무엇인가 바다 속에서 나오니 높이 산 같네. 혹 반신을 드러내며 혹 전신을 들어내어 때론 물을 뿜어 구름과 안개를 지으니 좌우로 물결이 솟아난 고로 그 머리 눈은 자세히 보지 못하고 다만 그 등의 높이 헤아릴 수 없어 험악한 바위가 쌓인 듯하니, 사공이 이르되 이것은 고래라 성내면 저러하니 만일 근처에 가면 대환이 있다하고 급히 배를 되돌려 피하더라.”(「죽천이공행적록」 1624년 8월 13일)
일행은 가도를 떠난 후 4일만 인 8월 14일에야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풍랑으로 인하여 각기 흩어져 항해하다가 장산도에서야 겨우 다시 만난 것이다.
장산도를 떠나 광록도로 향하던 8월 15일은 중간에 역풍이 불어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광록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어 기상이 돌변했다. 그날의 상황을 홍인한은 이렇게 적었다.
“조금 후에 먹구름이 서쪽으로부터 일어나 하늘이 깜깜하고 소낙비가 삼대같이 쏟아지며 회오리바람이 바다를 휩쓰니, 산더미 같은 물결이 눈처럼 휘날리고 안개같이 용솟음치는데 어룡(魚龍)이 날뛰고 고래, 악어 등이 우글거린다. 여러 선박들이 서로 요동쳐 잠시도 안정되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했던 것은 부사(副使)의 배가 포구 가에 있어 바람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에 무릇 세 번이나 파도에 부닥뜨려 배 안에 차오른 물이 정강이에 이르고 방물(方物)도 모두 젖었다. 비장(裨將) 유경우(柳敬友)는 돛대를 안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뱃줄이 거의 끊어지게 되었는데, 마침 바람이 멎어 복선(覆船)을 모면하였다. 그 풍랑이 극심할 즈음에 당선(唐船) 한 척이 어디서인지 표류해 와서 풍랑에 뒤집히니, 주위에서 보는 자들이 모두 혼비백산이 되었다.”
▶악어 : 원문은 ‘타(鼉)’로 되어있다. 홍인한이 무엇을 보고 ‘악어 타(鼉)’를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날의 글 중에는 교룡(蛟龍)이 날뛴다는 구절도 있는데, 교룡은 전설상의 용이다. |
8월 16일부터 19일까지는 풍랑으로 인하여 섬에서 머물렀다. 19일에 제사를 지내고난 후, 20일에는 날이 청명하여져서 삼산도(三山島)를 지나 평도(平島)에 다다랐다.
가도(椵島) 그림부터 시작하여 갈수록 바다 물결을 높고 크게 그린 것이 눈에 띈다. 화가가 처음 겪는 풍랑에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요동반도의 서남부 돌출부인 철산취(鐵山嘴)는 주변에 암초가 많고 풍파와 조류가 심한 곳으로, 앞서 조선 사신들이 풍랑을 만나 익사한 곳이기도 하다.
참고 및 인용 :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이영춘, 2015), 『죽천이공행적록』, 바닷길로 떠난 중국 사행(김희경, 2016. 12, 해양박물관학보),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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