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3

從心所欲 2020. 11. 24. 04:48

풍랑이 심하여 8월 21일은 배를 평도 항구 깊숙한 곳으로 옮겨 정박했다가, 22일 새벽에 순풍을 얻어 순식간에 황성도를 지나고, 한낮에는 진주문(眞珠門)을 거쳐 묘도(廟島) 앞 항구에 다다랐다. 묘도에서 등주까지는 80리라고 기록되었으니 마침내 육지인 등주(登州)를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中 진주문(眞珠門), 묘도(廟島), 등주외성(登州外城) 봉래각(蓬萊閣)]

 

여섯 척의 배 중에 5척은 도착했지만 제4선으로 불리는 배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도 험난한 바다를 무사히 건너온 기쁨에 사신 일행은 그날 저물녘에 신녀묘(神女廟) 앞으로 배를 옮기고 제문을 지어 해신(海神)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홍익한은 “이날 밤에 바람은 자고 물결은 고요하니, 뱃길을 떠난 후에 비로소 편안히 잠잘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다음날 저녁나절에 제4선이 뒤늦게 도착했다. 황성도(皇城島) 앞바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을 만나 키를 잃고 배를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암초(暗礁)에 부딪쳐 배에 물이 들어오는 것을 퍼내고 다른 키로 바꾸어서 겨우 살아 올 수 있었다고 했다.

 

저물녘에 등주(登州) 수문(水門) 밖에 정박하였는데, 마침 등주의 총독(總督)이 새로 부임하여 고을 관원들이 모두 그를 영접하느라 다 교외(郊外)로 나가버린 탓에 숙소를 배정받지 못하여 돈을 주고 민가에서 지냈다.

사신들은 25일에야 보정사(普靜寺)라는 절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새로 부임한 총독에 대한 현관례(見官禮)는 29일에야 이루어졌다. 예를 마친 후, 신임 총독 무지망(武之望)과의 대화를

홍익한은 「조천항해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배신(陪臣)이 북경에 온 것은 무슨 볼일이오?”

하기에, 표정로(表廷老)를 시켜, 사은(謝恩)과 진하(進賀)와 주청(奏請)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의정부의

신문(申文)과 우리들의 정문(呈文)을 올리니, 군문(軍門)이 말하기를,

“황자(皇子)는 벌써 여름에 작고했소.”한다. 조금 후에 또 묻기를,

“그대 나라의 폐군(廢君)이 아직 평안하오?”

하기에, 잘 있다고 대답했다. 군문(軍門)이 또,

“그대들의 이른바 작년 칙봉(勅封)은 실지로 봉한 것이 아니라, 나랏일을 임시로 서리하는 것이었소. 그런데 아직도 몇몇 과관(科官)들이 지론(持論)을 고집하여 의론이 귀일(歸一)되지 않고 또 내관(內官)들이 바닷길을 꺼려서 가려 하지 않으니, 오랑캐를 쳐서 멸하고 요동 길이 통한 후에야 비로소 조사(詔使)를 보내어 봉전(封典)을 완결 짓게 될 것이오.”한다.

우리들이 다시 고하기를,

“200여 년간 전해 오는 규례가 반드시 조사(詔使)를 보내어 즉시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반사(頒賜)하였는데, 이번 봉전에서만 두 가지 일로 나누니, 한갓 본국(本國)이 듣기에 해괴할 뿐만 아니라, 상국(上國) 열성(列聖)의 전례(典禮)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노야(老爺)께서 주소(奏疏) 한 장을 갖추어 우리 일행 편에 같이 보내 주시어 본국의 소망에 어긋남이 없게 해 주소서. 또 표 노야(表老爺)가 일찍이 제청(題請)한 일이 있으니, 본국의 사정을 노야께서도 통촉할 것입니다. 원컨대 노야께서는 의정부의 신문(申文)과 우리들의 정문(呈文)을 살펴보시고 표 노야가 올린 주본(奏本)에 따라 속히 봉전을 완결 짓게 해 주시면 동방의 창생들이 또한 장차 정성을 다하여 보답할 것입니다.”

하니, 군문이 말하기를,

“내가 4월 전에 북경(北京)에 있을 때 예부(禮部) 임 노야(林老爺)와 친분이 있었으므로 이 일을 소상히 알고 있는데, 조정의 의론이 서로 엇갈린 상태였소. 지금은 각부(閣部)에서도 명백히 알고 있으니, 그대들은 북경에 가서 다만 각로(閣老)와 종백(宗伯) 앞에 소상히 전달하오.” 한다. 우리가 또 고하기를,

“노야가 상본(上本)할 때에 각로와 종백 및 과관(科官)에게도 아울러 서신을 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군문이 쾌히 승낙하였다.】

▶배신(陪臣) : 신하의 신하. 명나라 황제의 신하인 조선 왕의 신하.

▶군문(軍門) : 제독(提督)에 대한 존칭

▶표정로(表廷老) : 조선 역관 이름.

▶봉전(封典) : 중국 황제가 공신 및 그 조상에게 작위(爵位), 명호(名號)를 사급(賜給)하는 일. 여기서는 인조의 책봉에 따른 전례(典禮).

▶노야(老爺) : 어르신네. 나리. 주인어른 등의 뜻으로, 옛날 중국에서 윗사람, 관리, 고용주 등에 대한 붙이던 경칭

▶주소(奏疏) :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

▶정문(呈文) : 하급 관청에서 상급 관청으로 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올리는 공문서(公文書). 신문(申文)도 같은 뜻이다.

▶각로(閣老) : 내각(內閣)의 원로(元老), 즉 재상(宰相).

▶종백(宗伯) : 여기서는 조선의 예조판서에 해당하는 중국의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에 사신들은 총독에게 예단(禮單)을 올리고 관리들에게도 예단을 나누어준 후,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각별히 신경을 써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시원했던 처음 대답과는 달리 며칠 후 무지망(武之望)은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경솔하게 황제에게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이에 사신들이 다시 또 간청하여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받아내기는 했다. 사신들은 또 인조의 책봉에 의견을 달리하는 관리들의 이름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무지망은 자신이 예부상서에게 들은 일이라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황제에게 올리는 게첩(揭帖)의 마련 여부를 탐지하는 사이, 등주에서 사신들에게 제공할 인부와 말의 준비가 지체되어 사신 일행은 9월 12일이 되어서야 등주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등주에서 제공하는 인부와 마필, 양곡이 사신 일행이 요청한 것보다 많이 삭감되었고, 서장관에게 제공하는 옥교(屋轎)도 빠졌다. 이에 역관이 체모가 서지 않으니 옥교를 빌리자고 했지만 홍익한은 “이미 규례에 정해진 일이면 옥교를 탄다 하여 체모가 설 것도 없고 말을 탄다 하여 위의(威儀)가 손상될 것도 없다. 일은 순편한 것이 귀중하니, 일개 서장관이 말을 탄들 무엇이 해로우랴? 내 근력이 아직 강성하고 말 타는 데 익숙하며 또 옥교는 값이 많이 들고 노새는 적게 드니, 비싼 것을 사양하고 헐한 것을 취하는 것이 국비(國費)에도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다시 여러 말 하지 말고 좋은 노새를 구하라.”고 하여 홍익한은 돈을 주고 말을 빌려 타고 떠났다.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中 등주부(登州府)]

 

그림의 가마에 앞서 가는 말 위에 ‘표(表)’와 ‘자(咨)’라고 쓴 것은 각기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말한다. 표문(表文)은 중국의 임금에게 보내는 문서이고, 자문(咨文)은 조선의 왕과 명나라의 육부(六部) 관아 사이에서 오고가는 외교문서이다. 이 사행에서는 인조가 명나라 예부상서에게 책봉을 청하는 문서이다.

등주부(登州府) 옆에 ‘제(齊)’라고 쓴 것은 전국시대에 이곳이 제(齊)나라 땅이었다는 의미다.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中 액현(掖縣)]

 

9월 15일에 내주(萊州) 액현성(掖縣城)의 동관(東關)에서 유숙하였다. 그림 속의 동래서원(東萊書院)에는 동래선생(東萊先生) 여조겸(呂祖謙, 1137 ~ 1181)의 사당이 있고 그 안에 여조겸의 소상(塑像)이 있다고 했다. 여조겸은 남송(南宋)의 관리이자 이학(理學)의 대가로 주희(朱熹), 장식(張栻)과 더불어 동남삼현(東南三賢)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주희(朱熹)와 더불어 《근사록(近思錄)》을 편집했다고도 한다.

액현(掖縣)에서 북경까지 1,400리라고 적었다.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中 유현(濰縣)]

 

9월 18일 유현(濰縣)의 북관(北館)에서 유숙하였다. ‘안평중고리(晏平仲古里)’라고 쓴 것은 예전에 안평중이 살았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평중(平仲)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상(名相)이었던 안영(晏嬰)의 자이다. 청렴하고 검소하여 식탁에 두 가지 고기가 없고 처첩이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여우 갖옷[호구(狐裘)] 한 벌로 30년을 입었다고 하며, 가난한 종족(宗族) 70여 호가 그의 도움으로 생활하였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참고 및 인용 : 조천항해록(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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