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왜국 막부에 파견하는 사절단은 통신사(通信使)라고 불렀다. 교린(交隣)의 차원에서 믿음[信]으로 내왕한다는 뜻이다. 반면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은 조천사(朝天使)라고 했다.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왕조’인 천조(天朝) 중국에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뵌다’는 뜻의 조근(朝覲) 사행이라는 뜻이다. 명칭에서부터 사대(事大)가 분명하였다. 자존심 상하지만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명나라를 이은 청나라에 보내는 사절단의 명칭은 그간 연행사(燕行使)로 알려져 왔다.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연행(燕行)은 개인적 여행의 뜻으로 쓰였고, 부경사(赴京使) 또는 부연사(赴燕使)가 정식 명칭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사대의 뜻은 없다. 현실적으로 내색이야 못하지만 오랑캐가 세운 나라를 천조(天朝)로 받들어 사대할 마음은 없다는 뜻이다.
1624년.
인조가 봄에 급하게 파견을 결정한 사절단이 준비하는 데만 몇 달이 걸린 끝에 8월이 되어서야 명나라로 떠났다. 사행의 목적은 인조(仁祖) 책봉과 관련하여 명 황제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고명(誥命)은 명나라에서 자국의 관원을 임명하거나 외국의 국왕을 책봉하는 황제 명령 문서이고, 면복(冕服)은 왕이 제례(祭禮) 때 착용하는 관복으로 명나라에서 새로 왕위에 오른 조선의 왕에게 하사하는 품목이었다. 따라서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는다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조선의 왕으로 정식 인정을 받는 것을 의미하며, 조선은 태종 때부터 모든 왕들이 이런 절차를 거쳐 중국의 추인(追認)을 받았다. 따라서 1624년의 사행은 의례적인 사행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내막은 좀 복잡하다.
명나라에 파견하는 사절단을 통칭 조천사라고 하지만, 사행 목적에 따라 별개의 명칭이 붙여진다. 1년에 세 번 가는 정례사행(定例使行)으로는 동지를 전후해 보내는 동지사(冬至使), 정월 초하루 새해를 축하하러 가는 정조사(正朝使), 명나라의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성절사(聖節使)가 있었다. 이 정례사행 외에도 수시로 파견되는 임시사행으로는 사은사(謝恩使), 주청사(奏請使), 진하사(進賀使), 진위사(陳慰使), 진향사(進香使) 등이 있었다.
▶사은사(謝恩使) : 중국이 조선에 베푼 은혜에 감사하여 보내는 답례 사절 ▶주청사(奏請使) : 정치적, 외교적으로 청할 일 또는 알려야 할 사항이 있을 때 보내는 사절. 임금이나 세자 책봉을 상주(上奏)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진주사(陳奏使) 혹은 주문사(奏聞使)라고도 하였다. ▶진하사(進賀使) : 중국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파견하는 축하사절 ▶진위사(陳慰使) : 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파견하는 조문사(弔問使). 큰 재난이 있을 때도 파견되었다. ▶진향사(進香使) : 중국에 국상이 났을 때 제문(祭文)과 제폐(祭幣)를 가지고 가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파견되는 사절. 통상은 진위사(陳慰使)와 같이 파견되어, 정사(正使)는 진위사가 되고, 부사(副使)가 진향사를 맡는다. |
1624년 인조가 파견한 임시사행은 ‘사은겸주청사’로 지칭되고 있지만, 정작 《인조실록》에는 다른 명칭이 등장한다. 《인조실록》 인조 2년 4월 1일 기사이다.
【변무 상사(辨誣上使) 이덕형(李德泂), 부사(副使) 권첩(權怗), 서장관(書狀官) 오숙(吳䎘)이 아뢰기를,
"바닷길로 가려면 배에만 의지해야 하는데, 지금 물력이 탕패된 때에 특별히 독촉하지 않으면 형편상 제때에 미칠 수 없습니다. 급히 하유하여 신지(信地)에 돌아와 배를 대게하고, 지난해 주문사(奏聞使) 일행이 일을 아는 차관(差官)을 먼저 보내어 여러 가지 물건을 정리한 것처럼 하여서 임시하여 궁박스런 걱정이 없게 하소서. 변무(辨誣)의 사행으로 말하면, 중국 사람이 그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기 때문에 요구하는 것이 많을 뿐더러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못하면 으레 트집을 일으켜 그들의 욕심을 채우고야 맙니다. 이번 변무는 정응태(丁應泰) 등이 한번 무함한 것과는 시세나 사기에 있어 경중이 아주 다르니 인정(人情)으로 쓸 것이 전보다 훨씬 많아야 할 것입니다. 각년(各年)의 변무사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때의 전례를 상고하여 노자며 제반 물품을 일체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고,
이어 문재(文才)가 부족하여서 변무하고 전대(專對)하는 직임에 맞지 않는다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충분히 중대한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직하지 말라. 노자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전대(專對) : 남의 물음에 대하여 자신 혼자의 지혜로 대답함 |
변무상사(辨誣上使)는 변무사(辨誣使)의 정사(正使)라는 의미다. 변무사(辨誣使)는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의 중요사실이 중국에 잘못 알려진 경우, 이를 해명 또는 정정하기 위하여 보내는 특별사절이나 그 사신을 가리킨다. 기사에는 사관이 기록한 명칭 외에 이덕형의 발언 가운데에도 ‘변무(辨誣)’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인조는 이 사절을 보내 무엇의 ‘옳고 그름을 가려 억울함을 밝히려’ 했을까?
1623년 인조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한 달 뒤, 명나라는 맹양지(孟養志)라는 추관(推官)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추관(推官)은 죄인을 심문하는 관원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인조가 일으킨 정변을 조사하기 위하여 관리를 파견한 것이다. 인조는 4월 8일 맹양지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의 왕은 혼미하고 용렬하여 조종께서 2백 년 동안 사대해온 정성과 임진란 때 구원해준 천조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오랑캐를 정벌할 때 몰래 수신(帥臣)을 사주하여 군대의 기밀을 누설케 함으로써 패하게 하였소이다. 불곡(不穀)은 마땅히 천조와 함께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합쳐 기필코 이 적을 무찌를 생각뿐이외다."】
▶전의 왕 : 실록 원문은 폐군(廢君). 광해군을 가리킴. ▶불곡(不穀) : 임금이나 제후(諸侯)가 상대방에게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자칭(自稱) |
광해군 때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한 것을 비난하며 자신은 명나라와 함께 후금 정복에 충성할 것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이에 대하여 맹양지도 듣기 좋은 소리로 화답을 하고 돌아갔다. 자신의 정변에 대한 당위성이 잘 설명되었다고 생각한 인조는 4월 27일에 이경전(李慶全)을 정사로 하는 주문사(奏聞使)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왕위 책봉을 주청하게 하였다. 그러나 7월에 이미 중국에 도착한 주문사 일행은 해를 넘기도록 책봉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3월 15일, 이들이 북경에서 보낸 치계가 조선 조정에 도착했는데 인조의 책봉이 명 조정 내부적으로는 결정이 되었지만 조선에 파견할 조사(詔使)를 선발하려고 해도 바다를 건너야 하는 위험 때문에 서로 기피하는 바람에 조정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조사(詔使) : 중국(中國)에서 천자(天子)의 조칙(詔勅)을 가지고 오는 사신(使臣). |
다소 황당한 이 보고를 받은 인조와 조선 조정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없는 통상의 책봉은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그간에 명나라에서 인조의 정변을 ‘왕위찬탈’로 보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기 때문에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조선 조정은 책봉이 지연되는 이유를 맹양지가 잘못된 보고를 했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이를 다시 해명하고 책봉을 주청하는 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를 파견하기로 전격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인조의 말마따나 이 일은 '중대한 일'이었다. 이 사행을 '사은겸주청사'라고 지칭하는 것은 인조 옹호세력이 자신들의 궁색했던 처지를 감추려고 포장한 것에 불과한데도,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부르고 있다.
당시 명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에게 사르후[살이호(薩爾滸)] 전투에서 대패하여 나라 전체가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또한 후금이 요동지역을 차지하고 있어서 육로사행은 불가능하여, 이미 광해군 13년인 1621년부터 중국사행은 해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1621년 명나라에 갔던 진위사 박이서와 진향사 유간 등이 해로에서 익사한 일이 있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광해 13년 4월 13일자 기사이다.
【중국에 갔던 사신 박이서(朴彛叙)와 유간(柳澗)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오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침몰되었다. [그 후 익사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에 요동으로 가는 길이 갑자기 끊어져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처음으로 수로(水路)를 개척하였는데, 바다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철산(鐵山)의 튀어나온 곳에 이르러 으레 침몰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신 강욱(康昱)과 서장관 정응두(鄭應斗) 등도 연이어 빠져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모두 사신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자 도모하여 뇌물을 쓰고 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1621년 6월에도 조선의 사은사와 명나라 황제의 등극을 알리러 왔던 조사가 함께 탄 배가 태풍을 만나 선박 9척이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때는 다행히 사신들과 조선 선원들은 구조되었으나, 중국 선원 수십 명이 익사하였다. 이처럼 중국으로의 해로사행은 목숨을 내놓고 가야하는 위험한 길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처음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던 권첩(權怗)은 정작 출발할 때는 이름이 빠지고,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었던 오숙(吳䎘)이 부사가 되고, 서장관에는 홍익한(洪麟漢)의 이름이 새로 올랐다.
홍익한이 서장관으로 중국 사행 길에 쓴 견문록「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에 의하면 그는 원래 변무주청사의 서장관이 아니라 따로 떠나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었었다.
그래서 동지사 일행과 함께 한양을 떠나 이동 중이던 7월 22일, 변무주청사의 서장관 채유후(蔡裕後)의 병세가 위중해져서 갑자기 그 후임에 임명된 것이라고 적었다.
이덕형(李德泂)을 정사로 하는 변무주청사 일행은 8월 4일에 평안북도의 선사포(宣沙浦)를 떠나 중국을 향한 항해에 오른다. 이덕형은 훗날 바닷길을 이용해 사행하는 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사행 길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는 서장관 홍익한의 배에 탔던 화원(畵員)이 그린 당시의 진본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당시 그려진 《연행도폭(燕行圖幅)》을 모본으로 하여 후세에 다시 모사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진위는 어떠하든 간에 이덕형의 사행을 담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선사포에서의 출항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는 곽산(郭山)이라고 지명을 적었다.
《대동여지도》에는 이 지역에 선사포(宣沙浦)라는 이름이 두 군데 보인다. 아래 오른쪽은 곽산의 선사포이고 왼쪽은 철산의 선사포이다. 곽산 선사포는 조선시대 명나라로 가는 조공선이 출발하던 곳 중의 하나였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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